제목 | [성월] 오늘은 나, 내일은 너: 위령 성월 어떤 의미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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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1-11-06 | 조회수3,460 | 추천수0 | |
[위령성월 기획 I ]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 위령 성월 어떤 의미인가 산 이와 죽은 이들 모두 동일한 구성원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다 (히브 9,27).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특별히 기억하며 기도하는 위령성월을 맞았다. 누구나 한 번은 맞게 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 의미를 되짚어 보는 달이다. 또 이 땅에서의 생을 마감한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지 이웃들을 떠올리고 기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같은 위령성월의 역사적 근거와 진정한 의미는 어떤 것일까. 위령성월을 기해 그 유래와 의의 등을 정리해 본다.
역사
위령성월이 전 교회에 널리 퍼지게 된것은 10세기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998년 클뤼니 수도원 5대 원장이었던 오딜로(Odilo)는 자신의 관할 모든 수도자들에게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날 다음 날인 11월 2일을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의 날로 지내도록 명했다.
이 내용은 신자들에게 전해져 갔고 서방 교회 전역으로 퍼지게 되면서 자연스레 신자들은 11월 동안 죽은 이들을 위해 많은 기도를 바치게 되었다.
11월은 이러한 배경 속에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로 정해지게 됐으며 한국교회 역시 이 같은 교회 전통을 받아들여 11월을 위령성월로 지내게 됐다.
위령성월이 신자들에게 더욱 깊숙이 스며들게 된 것은 교황 비오 9세(1846~1878)와 레오 3세(1878~1903), 그리고 비오 11세(1922~1939)가 위령 성월에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 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한 것이 계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대사 선포로 인해 위령성월의 신심은 더욱 널리 전파되었고 더불어 11월은 세상을 떠난 부모나 친지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를 바치고, 자신의 죽음까지도 뒤돌아 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됐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
위령성월 중 11월 2일은 교회 전례력에서 모든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다. 이날은 무엇보다 아직 연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영혼들이 빨리 정화돼 복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며 그들을 위해 위령미사를 봉헌하는 날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성인대축일 다음날을 위령의 날로 지내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성인들을 먼저 기념하고 그 다음날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자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관습은 고대 로마시대에도 있었다. 기일에 무덤에 모여 죽은 이를 추도하며 헌주를 하고 음복을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4세기 까지는 일년의 마지막 날로 여겨졌던 2월 중 13~22일 사이에, 가족 중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념하는 위령제(Parentalia)를 지냈던 것으로 알려진다. 또 마지막날인 22일에는 죽은 이를 추모하는 가족행사를 거행하기도 했다.
로마교회는 이러한 관습을 받아들여 4세기부터 베드로좌에 모였고 베드로를 추모하는 예식을 거행했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 베드로 사도좌 축일(2월 22일)로 남아서 전해져 온다.
이에 비해 위령의 날이 공식 전례 축일로 선포된 것은 비교적 상당히 후대에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교 전래 이전에 이교도들이 행한 죽은 이들을 향한 미신적 관습이 오랫동안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중세를 거치며 위령의 날과 관련된 많은 전설도 생겼는데, 예를 들면 위령의 날에 이미 죽은 이들이 살아 있을때 자신에게 나쁘게 대했던 사람들 앞에 도깨비불 두꺼비 마녀 등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전설 등이다.
또한 위령의 날에는 특별한 음식을 먹거나 특별한 놀이를 하는 등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풍습이 내려오는 것으로 전해진다. 묘지까지 본당 공동체가 함께 행진을 하는 서구 본당의 모습이나 가족과 친지들이 있는 무덤을 방문, 꽃과 무덤을 장식하는 관습들이 그러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의미
위령성월을 이해할 수 있는 신학적인 근거는 ‘살아있는 이들이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으며 이 기도가 죽은 이에게 도움이 된다’는 전통 교리에서 찾아질 수 있다.
무엇보다 ‘모든 성인의 통공 교리’는 신자들이 위령성월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된다. 즉 하느님 나라는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된 공동체로서 이 공동체의 주인이며 시작도 끝도 없으신 하느님 앞에서 시간은 무의미한 것이고 이 안에서는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도 살아있는 이들도 동일한 구성원이라는 것이다.
결국 살아있는 이들과 죽은 이들이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라는 유대감을 통해 살아있는 이들은 연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으며 또한 이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있는 성인들도 세상에 있는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이같이 산 이와 죽은 이들의 통교가 가능하다는 면에서 위령기도가 가능한 것이며 아울러 위령성월도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위령성월에 대한 보다 뚜렷한 신학적 근거는 1245년 제1차 리옹 공의회에서 선포된 ‘연옥(Purgatorium)에 대한 교리’로 꼽힌다. 리옹 공의회 이후 교회는 연옥 존재에 관한 교의를 지속적으로 확인해 왔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난 보통 사람들이 세례후 죄를 범했을 때, 그 죄를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받으면 범한 죄(Peccantum)와 영벌은 없어 질 수 있으나 잠벌은 남게 되며 이 잠벌은 보속을 통해야만 탕감 받을 수 있다.
이 세상에서 행해야 하는 보속이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치러야할 보속이 있다. 그 보속을 치르는 곳이 연옥이고 또 죄를 씻는 정화의 장소가 연옥이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속죄를 위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지상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기도와 자선 행위 및 미사 봉헌 등으로 이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위령성월은 연옥 영혼을 위한 특별한 기도의 시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는 위령성월 중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열심한 마음으로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신자들은 연옥에 있는 이들에게만 양도할 수 있는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알리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1년 11월 6일, 이주연 기자]
[위령성월 기획] 영화를 통해 생각해 보는 죽음의 의미 죽음,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우리는 영화라는 시청각 소재를 통해 직접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주제들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다. 때로는 추상적이고, 구체적인 존재가 없는 대상들도 그것을 시각화, 청각화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형상화해 경험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인간에게 지상 순례의 끝이라 여겨지는 ‘죽음’이라는 단어는 가장 불명확하고, 모호한 대상일 수밖에 없다. 영화는 이처럼 특별한 대상마저도 더욱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죽음’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위령성월을 맞아 ‘죽음’을 다룬 몇 편의 영화들을 살펴보고, 그 안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가운데 새롭게 다가오는 ‘죽음’의 의미를 찾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
히어 애프터(Here after)
히어 애프터는 ‘죽음’을 보는 남자, ‘죽음’을 겪은 여자, ‘죽음’과 함께하는 아이 등 세 주인공의 이야기가 옴니버스(omnibus, 몇 개의 단편을 결합해 전체로서 정리된 분위기를 내도록 한 작품)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첫 번째 주인공 마리는 기자로서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믿는다. 하지만 어느 날 여행지에서 갑작스런 쓰나미로 ‘죽음’ 이후를 경험하게 되면서, 커다란 삶의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죽음’과 사후세계의 보이지 않는 힘을 다룬 책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두 번째 주인공 조지는 죽은 자와 대화할 수 있는 남다른 능력을 지녔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오고, 형마저 그 능력을 돈벌이로 이용하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을 재앙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매번 ‘죽음’을 현실에서 받아들여야 하고, 떠나간 이와 남겨진 자의 안타깝고 고통스런 기억과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뜻밖의 교통사고로 쌍둥이 형을 잃은 세 번째 주인공 마커스는 형을 그리워하며 사후세계를 본다거나 죽은 이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이들을 찾아다닌다. 약물 중독으로 자신들을 돌볼 수 없는 어머니를 대신해 서로 의지하며 자라왔기에 서로의 존재가 너무나 각별했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결국 조지를 만나게 된 마커스는 형과의 대화를 통해 위안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각자 ‘죽음’과 사후세계에 관한 경험을 통해 ‘죽음’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진행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죽음이 마침이 아니라 주님 안의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는 점을 영화가 상징적으로 알려 주고 있는 것.
버킷 리스트(Bucket list)
버킷 리스트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을 적은 리스트를 일컫는다.
영화는 노년의 자동차 정비공 카터가 갑작스런 시한부 선고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죽음을 앞둔 카터는 잠깐 다녔던 대학에서 과제로 받았던 버킷 리스트를 떠올리고 다시 적어본다. 하지만 40여 년을 가족을 위해 꿈을 버리고 헌신했던 그에게 버킷 리스트는 잃어버린, 또 이룰 수 없는 꿈을 상기시키는 씁쓸한 상처일 뿐이었다.
한편,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돈 벌기에만 혈안이 돼있는 재벌 사업가 에드워드가 카터와 한 병실을 쓰게 된다.
어느 날 에드워드는 카터와의 병원생활 중 우연히 카터가 버린 버킷 리스트를 보게 되고, 이를 실천하러 떠나자고 제안한다. 병원 침대 위에서 죽거나 하고 싶은 것을 하다가 죽거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심산에서다. 두 사람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버킷 리스트의 내용을 지워나간다. 세렝게티 초원에서 사냥하기, 문신하기, 카레이싱과 스카이다이빙하기, 눈물 날 때까지 웃어 보기 등 평범하고도 독특한 여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 여정을 통해 잔잔한 우정을 쌓아나간다. 무엇보다 이 여행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다시금 되찾게 된다.
카터는 버킷 리스트를 다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에드워드도 죽음과 함께 ‘히말라야 등정해 장관 보기’를 이루고 카터의 뒤를 따른다. 두 사람의 유골은 히말라야 산 위에 함께 묻힌다.
이 영화는 죽음을 앞둔 두 노인을 통해 삶의 기쁨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우리가 각자의 인생을 통해 채워나가야 할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인생의 기쁨을 찾았는가?’, ‘당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했는가?’
사랑한다는 말보다 아름다운 인사(Good & Bye)
도쿄에서 오케스트라 첼로 연주자였던 다이고는 오케스트라가 해체되는 바람에 졸지에 백수가 되고 만다. 게다가 빚을 내 산 거액의 첼로 역시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다이고는 모든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아내 미카와 함께 고향집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일자리를 구하던 다이고는 우연히 ‘연령 무관! 고수익 보장!’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의 여행가이드 구인광고를 발견하고 면접을 보러 간다. 1분 만에 면접이 끝나고 단순히 여행사인줄로만 알았던 가이드 일자리는 인생의 마지막 여정 길을 배웅하는 납관일이었다.
얼떨결에 따라간 첫 임무는 자살로 사망한데다 부패한 시체를 염하는 것. 다이고는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이고는 계속 그 일을 해나가면서 죽은 이들을 위한 숭고한 의식에 매료돼 납관일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다이고는 아내의 반대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일을 해나간다. 죽은 사람을 대하는 그의 모습은 언제나 정갈하고 단정했다. 아내는 다이고가 염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난 후에야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이고는 어느새 첼로를 다시 켠다. 오케스트라에서 보여줬던 연주와는 다른, 자신을 오롯이 담아낸 혼신의 연주였다.
얼마 후 다이고에게 아버지의 사망소식이 들려온다. 처음 다이고는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거부하려고만 한다. 아내의 설득에 못 이겨 아버지를 찾아간 다이고는 아버지의 시신을 함부로 다루는 상조회사의 모습에 분개하고 자신이 직접 염에 나선다.
다이고는 아버지의 몸을 조심스레 씻기던 중 꽉 쥔 손이 눈에 들어온다. 겨우 편 아버지의 손 안에는 어릴 적 자신이 아버지와 나눴던 작은 돌멩이가 들어있었다. 다이고는 그제야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이고는 눈물을 흘리며 정성스레 아버지를 배웅한다.
이 영화는 죽음을 마지막으로 떠나는 여행에 비유, 마지막 순간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한편, 납관일을 소재로 삼아 떠나가는 이와 남겨지는 자들의 마지막을 돌아볼 소중한 시간을 이야기한다. [가톨릭신문, 2011년 11월 6일, 이우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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