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미사] 전례를 살다: 미사의 시작 예식 (6) 대영광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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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3-07-12 | 조회수4,170 | 추천수0 | |
[전례를 살다] 대영광송
대영광송은 찬미가로 초대 그리스도교의 시(詩) 중에 특히 귀중한 시입니다. 이 찬미가는 앞에 나온 “자비송”과 같이 그리스도께 드리는 찬미와 찬송이며 장엄한 인사입니다. “자비송”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환영하는 인사라고 한다면 대영광송은 이미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을 좀 더 구체적인 말로 칭송하는 인사입니다. 기쁜 날, 잔칫날, 축제의 날에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기쁨을 아무리 해도 충만하게 드러낼 수 없으며 그 기쁨을 한 번만 외칠 뿐 아니라, 표현을 달리하여 멀리 메아리치도록 노래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되어 백성이 된 하느님의 자녀들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은 극히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기도문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는 날 밤에 천사들이 부른 찬양의 노래로부터 시작해서 하느님 아버지를 찬송하며 그 아들이시며,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기까지의 영광을 찬송하는 신앙고백으로 끝을 맺습니다.
본문 첫 부분은 하느님, 특히 성부께 드리는 찬송입니다. : “우리는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우리는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우리는 당신을 흠숭하나이다. 우리는 당신을 높이 받드나이다.”(“주님을 기리나이다, 찬미하나이다. 주님을 흠숭하나이다, 찬양하나이다.”) 이들 찬사는 표현은 다르지만 하느님을 끊임없이 찬미하는 마음을 다양하게 말합니다. 하느님 찬양은 경탄하고 감사하는 마음에서 저절로 용솟음치며 마치 바다의 파도가 서로 겹쳐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 흘러 넘치는 찬양의 동기는 “주님 영광 크시오니” 에서 다시 한 번 명백히 고백합니다. 실로 우리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흠숭하며 그분께 감사하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간청기도만이 아니라는 점이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만일 누가 물이 자기 목에까지 차오면, 또 그렇기 때문에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해 주십사고 기도한다면, 그는 아직도 그리스도교 신심의 초보단계에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대영광송 본문의 둘째 부분은 아버지께가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 향하며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발췌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 “주 하느님, 성부의 아드님,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주님.” 이 소절은 구세주께 향하는 여러 개의 존귀한 칭호로 시작합니다.:”주 하느님, 성부의 아드님, 하느님의 어린양, 성부의 아드님이여.” 이 각각의 칭호는 마치 그리스도 신앙의 단축양식과 같습니다. 그분에 대한 신뢰는 짧은 간청 도문으로 이끕니다. : “세상에 죄를 없애시고 성부 오른 편에 앉아 계시는 분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저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그리스도 찬가인 대영광송 전체는 이제 세 번의 ‘홀로’로 시작되는 찬양으로 그 절정에 이릅니다. :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 이 ‘홀로’ 찬양은 황제나 우상을 주님으로 숭배하라는 강요를 거절하고 목숨을 바친 박해시대의 순교자들의 확고한 신앙고백을 연상시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그 당시 잡신들과 제왕 숭배를 거슬러 싸우던 강력한 도전의 언사를 느끼게 합니다. 그 시대는 황제 숭배 시대였으며 화려한 신들의 축제들과 공개적인 제사의식, 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그리스도교도 박해시대였습니다. 많은 황제들은 신으로 올려져 공경하길 요구했습니다. 그들에게 분향 제사를 바치길 거부한 사람은 누구나 신과 국가의 원수나 적으로, 국민의 해충으로 의심받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그리스도께로 향한 신앙고백은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성격을 띤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홀로 거룩하시도다.” 라는 고백으로 그들의 제신들이 거룩하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리스도만이 ‘홀로 거룩하시고’ 그분만이 “하느님의 거룩한 분”(요한 6,69)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홀로 죄가 없으신 분”(요한 8,46)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홀로 주님이시며” 에서 ‘주님’ 이란 칭호는 황제들이 소유한 고유한 칭호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는 어떠한 인간도 자신을 주님으로 감히 행세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러한 영광을 스스로 지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위치를 선포합니다. : “홀로 높으시도다.” 모든 인간 중에는 아무도 그와 비교할 자가 없으며 그에게 접근할만한 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언제나 성령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신앙고백은 이제 그 실제적인 배경을 잃어버렸다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요즘의 사람들에게도 거짓 우상들이나 유혹하는 이념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많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과 삶에서 “주님 당신만이 홀로 거룩하시고 높으시나이다.” 하고 고백하기를 요구합니다. 이와 같이 의미심장한 찬미가로서의 대영광송은 모차르트 같은 뛰어난 음악가들이 창작의 소질을 발휘하여 불멸의 음악과 수많은 작곡을 하는데 늘 충동을 주어 왔습니다. 그래서 수세기를 거쳐 오면서 이 찬미가가 신자들의 확고한 기도로 바쳐지고 있다는 사실은 지극히 옳은 일입니다. 대영광송은 다른 어느 그리스도교의 찬미가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구원된 자들의 고유한 찬미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찬미가는 “성령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 안에 계시나이다.” 라는 삼위일체의 신앙고백 양식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오래된 그리스도교 찬미가를 노래하거나 기도하는 사람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로 향한 참된 찬송은 읊조리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대영광송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의식해야 합니다. 박해시대에 순교하는 처형장에서 드리는 하느님 찬송이 다르게 울리고 오늘날 직장인들의 일상에서는 또 다르게 울립니다. 평범한 일상의 짐이나 병고, 정신적 고통을 묵묵히 견디어 내는 것도,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것도 글로리아 곧 하느님 찬양이 될 수 있습니다.
미사전례 안에서 대영광송을 바치는 방법으로는 사제 또는 필요에 따라 선창자가 시작하고 선창 다음의 이어지는 부분은 회중이 모두 함께 노래하거나, 회중과 성가대가 교대로 부르거나, 성가대가 홀로 노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원이나 내용으로 보아 대영광송은 교회의 축일에 공동체가 다함께 부르는 축제의 노래이기에 성가대만의 아름답고 웅장한 합창도 좋지만 장엄성의 기준은 성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례의 본 의미와 내용을 정확히 표현하는데 있으므로 장엄성도 살리고 공동체 성가의 특성도 살리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모두 함께 또는 성가대와 공동체가 노래를 번갈아 가며 교대로 부르는 것이 원칙입니다. 특히 부활이나 성탄 축일처럼 교회의 가장 성대한 축일에는 성가대만이 아닌 신자들이 모두 함께 불러 축제의 성격을 더 한층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월간빛, 2013년 7월호, 최창덕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부설 평신도신학교육원 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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