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부활] 사순기획1: 첨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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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4-03-10 | 조회수3,760 | 추천수0 | |
[온고지사순] (1) 첨례표 하느님 시간이 새로운 삶 기준이었던 선조들
- 서소문순교성지전시관에 소장 중인 을축년(1865년) 첨례표. 2월 4일 ‘성회례의 봉재’(재의 수요일)부터 3월 21일 ‘예수부활쥬일’ 표시로 당시 사순시기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희생과 극기를 실천하는 사순시기는 삶 그 자체가 신앙을 위한 희생과 극기의 연속이었던 박해시대 신앙선조들의 삶과 닮아있다. 박해시대를 살아가던 신앙선조들은 사순시기를 어떻게 지냈을까. 이번 사순시기, 모진 박해 속에서도 사순시기를 살아온 신앙선조들의 옛 모범을 배우며(溫故), 사순시기를 익히는(知四旬)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오늘날 우리는 사순시기가 왔음을 큰 불편 없이 쉽게 알 수 있다. 그저 교회에서 보급한 달력이나 「매일미사」 등의 책자를 보면 알 수 있고, 전혀 관심이 없더라도 매 주일 미사만 참례하면 주보를 통해 사순시기가 다가왔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오늘날 우리에겐 일상적인 전례력이지만 사실 사순시기를 기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순시기는 예수 부활 대축일을 기준으로 역산해 40일의 기간으로 정해진다. 이 예수 부활 대축일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니산(Nisan)달의 14일 다음에 오는 주일로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에 고정된 날이 아니라 기억하기 어렵다. 특히 음력과 24절기를 사용하고 주간(週間)의 개념조차 없던 선조들의 사회 속에서 양력에 따라 진행되는 전례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얼마나 큰 어려움이 있었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박해시대의 사료들을 보면 신앙선조들이 사순시기를 엄격하게 지켜왔다는 기록을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신앙선조들이 사용하던 음력에서는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전례력을 받아들여 사순시기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첨례표’에 있다.
첨례표는 한 해 교회의 주요 축일 등의 전례시기를 월, 일로 구분해 기록한 표다. 당시 교회에서는 첨례표를 제작, 보급해 신자들이 교회 전례를 따를 수 있도록 했다. 정확한 보급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801년 윤현의 집에서 압수한 서적 목록에 첨례표와 같은 용도로 추정되는 「첨례단」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당시에 이미 신자들이 개별적으로 첨례표를 소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앙선조들의 기도생활은 첨례표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첨례표는 사제도 없을 뿐 아니라 모여 기도하기조차 어려운 박해상황 속에서도 신자들이 전례력에 따라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기도생활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하던 박해시대의 첨례표에는 ‘매괴(묵주)회가 기도를 시작하는 날’이 표기되기도 했다.
첨례표로 기도생활을 이어오던 신앙선조들에게 전례력은 이미 삶의 중심이었다. 박해시대 신앙선조들은 당시 사용하던 음력이 아니라 전례력으로 날짜를 기억하고 기념했다. 신앙선조들은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의 사형집행일을 음력 8월 14일이 아닌 양력 9월 21일, 정확히는 ‘성 마태오 축일’로 기억했다. 1821년 윤 야고보라는 11세 소년이 예수 승천 축일 정오에 죽으리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고 그날 삼종경을 마친 후 죽었다는 기록 등은 어린아이조차 전례력을 삶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전례력을 따르는 삶은 신앙선조들의 생업이었던 농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성령강림절’ 전후에 심었던 담배인 ‘강림초(降臨草)’는 경기 북부지방에서 가장 좋은 품종의 담배로 여겨져 그 어원을 모르는 비신자들도 ‘강림초’라는 말을 사용했다. 또 중부지방에서는 봄 가뭄이 들 때 ‘베드로 바오로 첨례’날까지 비가 오지 않으면 그해 농사를 망치는 것이라는 말이 내려오기도 한다.
신앙선조들의 삶은 단순히 양력이나 교회력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었다. 신앙을 받아들인 선조들은 천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을 새로운 삶의 기준으로 삼고 싶어 했다. 박해시대 신앙선조들은 당시 사회와 자신들이 살아온 시간의 방식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갔다. 200년이 흐른 지금도 신앙선조들이 지켜온 사순시기가 다시 찾아왔다. 양력을 표준으로 삼고, 전례력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얼마나 삶의 중심에 놓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3월 9일, 이승훈 기자]
[인터뷰] 전례력 따라 일상생활 하는 정규혁 씨 “어릴적부터 전례력은 ‘일상’이었죠”
- 정약용의 후손으로, 첨례표에 따라 생활하던 친척들 신앙을 보고 배운 정규혁씨는 지금도 전례력을 몸으로 체득하며 살아가고 있다.
정규혁(베드로·88·의정부교구 덕소본당)씨는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마재성지를 찾아 기도한다. 매일 아침·저녁기도와 삼종기도를 거르지 않고 성지에서 매일미사를 봉헌한다. 전례력은 마치 그의 일상과도 같다. 전례력 속에서 신앙을 지켜나가고 있는 정씨를 만나 전례력을 따르는 삶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저는 엉터리 신자예요, 엉터리.”
1일 인터뷰를 위해 찾아갔을 때도 그는 마재성지에서 막 미사를 봉헌한 참이었다. 신앙생활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자신은 ‘엉터리’라며 부끄러운 듯 웃음을 지었다. 늘 기도와 함께하는 그의 삶이건만 스스로 ‘엉터리’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제 믿음이 어디서 왔는가 생각하면 잘 모르겠어요. 다만 어렸을 적부터 첨례표를 받아 기도하던 것이 기억납니다.”
마재성지가 위치한 마재마을에서 나고 자란 정씨는 정약용(요한)과 이번 시복이 결정된 정약종(아우구스티노) 형제의 후손이지만 세례를 받게 된 것은 60세가 넘어서다. 정씨의 집안 남자들은 대역 죄인으로 처형된 선조가 있음을 숨기려 세례를 받지 않거나 신앙생활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정씨가 세례를 받고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전례력을 따라 기도하며 살아온 어머니, 아주머니, 고모 등의 신앙을 보고 배우며 자라왔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는 엄동설한에 얼음장을 깨고 세수를 하고 조과(아침기도)를 했어요. 아주 엄격해서 조과가 끝나기 전까진 말도 하지 못했어요. 조과가 끝나면 그제야 잘 잤느냐는 인사를 나눌 수 있었지요.”
특히 정씨에게 큰 영향을 준 이는 고모 정광섭(아나스타시아)씨였다. 해마다 40여km 떨어진 서울 중림동약현성당을 찾아가 새해의 첨례표를 받아와 매일 기도생활에 매진했고 정씨에게 교리지식이나 신앙을 가르쳤다. 정씨도 심부름으로 서울까지 첨례표를 받으러 가곤 했다. 늘 신공(기도)에 엄격했고 연도의 성인호칭기도조차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던 고모의 모습은 아흔을 바라보는 정씨의 뇌리에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의 정씨는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이미 첨례표와 고모의 신앙생활을 통해 전례력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덕소본당의 공소시절 마지막 공소회장이기도 한 정씨는 공소의 본당설립을 추진해, 덕소본당 1대 총회장, 연령회장 등을 역임하며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해왔다. 마재성지를 마련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멀리 서울까지 가서 첨례표를 받아 기도하고 세례를 받아서는 공소에서 전례력에 따라 공소예절이나 공소의 크고 작은 행사를 하며 전례력을 찾아 살아가던 그는 이제 더 이상 사순시기를 지키기 위해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달력을 보거나 집 근처 성당을 찾아 미사를 드리면 된다. 전례력을 찾아다니는 수고를 하지 않고 기도하는 지금의 신앙생활은 그에겐 ‘엉터리’다. 예전에 비하면 너무 쉽게 기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엉터리’는 어쩐지 감사하고 기분 좋은 엉터리다.
“외람된 말이지만 지금은 주님을 가까이 모신다는 느낌이 들어 행복합니다. 예전에는 전례력에 따라 기도하기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달력만 봐도 알 수 있으니 간편하죠.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계신 주님을 모시는 것이 더 좋지요.”
또다시 사순시기를 살아가는 정씨는 올해도 기도에 정진한다. 비록 옛 어른들과 달리 ‘엉터리’ 신자지만 그래도 그는 기도할 수 있어 행복하다. [가톨릭신문, 2014년 3월 9일, 이승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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