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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부활] 사순기획2: 재(齋)의 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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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3-16 조회수4,046 추천수0

[온고지사순] (2) 재(齋)의 준수


박해 속에도 ‘재’ 엄격히 지키며 주님 수난 동참

 

 

한국 천주교 초기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두메산골에 숨어 살며 옹기를 구워 팔아 생계를 연명했다. 하루 한 끼 배불리 먹기 힘든 열악한 상황에서도 선조들은 엄격하게 재를 지켰다. (사진 출처 「전동 100년」 기념화보집)

 

 

사순시기에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수난과 고통 속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 희생과 사랑에 동참하고자, 죄와 욕망의 사슬을 끊고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금육, 단식의 재를 실천한다. 

 

점차 생활이 복잡해지고, 단식재를 지켜나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는 점에 비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 아울러 합당하다고 여겨지면 성토요일에 단식재를 실행하고 있지만, 박해시대 신앙선조들은 신앙을 지켜나가기조차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사순시기를 맞아 고신극기(苦身克己)로 엄격하게 재를 지켰다. 

 

신앙선조들의 재의 준수는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작성한 첨례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첨례표에서 단식재의 규정은 일러두기 난이 아니라 주일과 축일 난에 ‘대 ’라고 별도로 표시돼 있으며, 이를 지켜야할 때는 사순시기의 매주 금요일과 예수 성탄 전야 때였다. 교회법에서는 본래 사순시기 주일 외의 모든 날, 사계<춘계-봉재 후 1주간(사순 1주간), 하계-성신강림 주간(성령강림대축일 주간), 추계-성가 광영 주간(성 십자가 현양 축일 주간), 동계-장림 3주간(대림 3주간)> 때와 성령 강림 전날, 성모 승천 전날, 모든 성인의 날 전날과 예수 성탄 전야 때 단식재를 지켜야 했으나, 조선 교회에서는 교황의 관면으로 간소화 됐다. 

 

금육재의 규정은 복잡하고, 첨례표에 나와 있지 않은 평일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주의사항 난에 별도로 그 규정을 적어 놓았다. 1916년 첨례표의 일러두기는 사순절에는 본래 모든 날에 금육재를 지켜야 하나, 교황의 배려로 조선 신자들은 ‘봉재 안의 주일과 각 주일의 첨례 이와 삼과 오에 소재 관면’을 해줬다고 한다. ‘이와 삼과 오’는 주일부터 둘째, 셋째, 다섯째 날인 월, 화, 목요일을 말한다. 다만 성목요일에는 금육재를 지켜야 한다고 규정돼있다. 

 

매주 금요일은 어느 때를 막론하며, 사순시기와 사계 때는 수요일과 토요일에도 금육재를 지켜야 한다고 했으나. 1917년 세계 교회의 규정이 완화됨에 따라, 사순시기 매주 수요일의 금육재 규정은 없어졌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오지에서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신앙선조들은 하루 한 끼도 배불리 먹기 힘든 열악한 형편에도 단식과 금육을 통해 스스로를 제어하고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지기 위한 회개와 기도에 정진했다. 

 

순교자들 가운데 김광옥 안드레아(?-1801년)는 사순시기 동안 엄격히 금식을 하며, 여러 가지 극기행위를 실천했다. 그는 덕행들을 부지런히 닦아 자신의 성격마저 완전히 바꿔놓을 정도였다. 

 

그가 순교한 뒤, 그의 아들 김희성 프란치스코(1765-1816년)는 경상도 영양의 깊은 산골에서 지내며, 매년 사순시기 금식재를 철저히 지켰다. 그는 나무뿌리와 도토리 등으로 연명하며 항상 금욕생활을 했으며, 천성인 급한 성격을 고치려 노력한 끝에, 곧 온화함과 인내로 타의 모범이 됐다. 

 

아울러, 김종한 안드레아(?-1816년)는 사순시기는 물론, 꾸준히 금식재를 지키며 기도했다. 일상의 음식은 조밥에 소금을 얹어 먹는 정도. 이마저 없으면 나뭇잎이나 도토리, 풀뿌리, 산나물 등을 먹었다. 그는 맛이나 영양가 등은 한 번도 머릿속에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절제의 삶과 신앙의 모범은 그가 외교인을 많이 입교시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라고 손꼽힌다. 

 

김대권 베드로(?-1839년)는 사순시기, 평소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고 묵상하며 하루에 한 끼를 먹었고, 찬물에 밥 반사발만 말아 반찬도 없이 소금을 조금 찍어 먹었다고 한다. 

 

또한, 순교자들은 사순시기가 아닌 평상시에도 단식재를 엄격히 지켰다. 자기 성화를 향한 엄격한 생활로, 천주에 대한 사랑과 신앙을 증거한 것. 

 

원시보 야고보(1730-1799년)는 전에 식탐을 부렸던 자신을 성찰하며, 금요일마다 금식을 했고, 윤점혜 아가타(?-1801년)도 자주 금식하며, 기도와 묵상에 매진했다. 

 

또, 이보현 프란치스코(1773-1801년)는 보속과 고행에 열중했고, 고향을 떠나 산중에서 나물만 먹고 살면서 “천주를 섬기고 자기 영혼을 구하려면 금욕을 실천하든지 순교함으로 목숨을 바치든지 해야 할 것이며, 이것만이 천주의 진정한 자녀가 되는 방법”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단식재를 지키지 못하게 하는 사나운 아내에게 지쳐, 가족을 떠나게 된 김세박 암브로시오(1761-1828년)는 지방 교우들의 거처를 떠돌며 교리를 가르치고, 성경 필사로 생계를 이어갔으며, 식생활에서도 엄격한 한계를 정하고 이를 꼭 지켰다. 

 

영적 성숙을 갈망하던 권 테레사(1784-1819년)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재를 지켰다. 그녀는 병약했지만 기도에 전념하며, 잠자는 것과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기도 했다. 

 

또, 최 비르지타(1783-1839년)는 달력을 마련할 수 없던 시절, 사순시기인 줄 모르고 고기를 먹었던 스스로를 자책하며, 죽을 때까지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켰다. 

 

이 밖에도 많은 신앙선조들이 박해시대의 고난 속에서도 재를 지키며,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기 위한 자기 수양에 온 힘을 다 쏟았다. [가톨릭신문, 2014년 3월 16일, 이우현 기자]

 

 

갈곡리공소 회장 조병현 씨 부부


“사순절 ‘재’ 지키기 너무 당연한 일이죠”

 

 

의정부교구 법원리본당 소속 갈곡리공소(칠울공소) 공소회장 조병현(베드로·80)씨에게 사순시기 재의 준수는 몸에 익은 습관과도 같은 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또 그분들의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단식재와 금육재를 잘 지키라는 당부를 끊임없이 들어 왔어요. 사순시기에 재를 지키는 것은 내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요.” 

 

갈곡리공소 지역은 19세기 말 홍천과 인근 풍수원 등에서 박해를 피해 들어온 이들이 정착해 살면서 교우촌으로 형성된 경기 북부지역 신앙의 요람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조씨는 대대로 내려오는 신앙을 지키며, 일상의 신앙생활을 체득해왔다. 

 

“지금은 이곳 공소에서 매월 한 차례만 미사가 봉헌되지만, 이곳은 박해시대부터 신앙선조들이 살았던 곳이기에 뿌리 깊은 신앙의 전통을 갖고 있어요. 그 전통에 맞갖은 신앙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지켜온 단식재와 금식재도 그런 의미를 담고 있지요.” 

 

잠시 쉬어간 적도 있지만, 반세기에 이르는 오랜 시간 동안 공소를 지키며 공소회장을 맡아온 것도 탄탄한 신앙의 기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연령회장으로서 지역 주민들의 곁에서 함께해온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사순시기의 신앙생활 또한 일상의 실천으로부터 비롯됐다. 

 

“사순시기 동안 단식재를 실천하며, 각 가정마다 애긍미를 모았지요. 각 가정에서 식구 수대로 한 숟가락씩 쌀을 덜어내 어려운 이웃을 위해 모아두는 것입니다. 다들 어려운 살림에도 쌀 모으기는 잊지 않았어요. 모인 쌀은 갑작스레 상을 당한 빈곤한 가정이나 병으로 고통 받는 이 등을 위해 쓰도록 했지요. 또, 일부는 성모회를 통해 판매한 이윤으로 본당과 공소를 돌보는데 사용했어요.” 

 

사순 저금통이 보급되기 전까지는 이 같은 쌀 모으기 운동을 계속했다. 덕분에 조씨를 비롯한 공소 식구들은 매 사순시기 마다 각자의 희생과 나눔이 이웃과 함께하고자 하는 사랑으로 번져나가는 것을 경험했다. 

 

“사순 저금통은 쌀 모으기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어요. 지금도 하루하루 내가 먹을 식사 한 끼의 돈을 계산해 사순 저금통에 넣습니다. 적은 돈이지만 이것도 모이면 큰 역할을 할 수 있겠지요.” 

 

공소와 신앙생활의 의미가 퇴색돼가는 요즘, 조씨는 이번 사순시기에도 신앙선조로부터 이어오는 일상에서 체득한 그대로의 신앙생활을 꾸려나갈 생각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번 사순기간에도 열심히 성로신공(십자가의 길)을 바쳐야겠지요. 특별한 지향이 있기보다 일상의 꾸준한 기도가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3월 16일, 이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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