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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축일] 2014년 6월22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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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성경주 쪽지 캡슐 작성일2014-06-24 조회수12,347 추천수0


2014년 6월22일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자료 : 하비에르사도회 /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에제47,1-9,12 )(요한5,1-6)


오늘 교회는 성체성혈 대축일을 지낸다.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들 이다. 이 기적은 부활 사건처럼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건인데 미사성제가 바로 그 기적이다. 예수님은 미사를 통해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시어 우리에게 받아먹고, 받아 마시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 성체성혈의 신비는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기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사건이다.


 

오늘 복음은 제자 두 사람을‘도성 안으로 가거라.’하고 파견하신다. 파견 받은 두 제자는 큰 이 층 방에 이 기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 기적의 체험 즉, 성체성혈의 기적은 예수님의 파견을 받고, 준비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기적인 것이다.

 

예수님의 이 기적을 홀로 스스로 만드시지 않고,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심으로서 이루었다고 복음은 전해주고 있다.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매일의 기적은 찬미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기적이며, 내가 가진 것을 떼어 나눌 때 체험되는 사랑의 기적이라는 것이다.



 

♡ 이 주의 말씀 - 침묵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 글 : 이훈 바오로 신부

 

처음으로 가톨릭을 알게 된 것이 초등학교 5학년 때입니다. 그때부터 15년 남짓의 시간동안 당신께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어디계세요?’일 것입니다. 처음에는 성서에 나오는 예언가들이 멋있어서 그들을 따라서 ‘아버지 당신 어디계십니까? 제 앞에 나타나 기적을 보여 주세요.’ 라는 식의 객기어린 장난스런 마음으로 시작된 질문이지만, 그 이후에는 삶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 점점 장난스런 질문이 아닌 다양한 의미로 변해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때로는 지금이라도 빨리 ‘나 여기 있다’라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으로, 때로는 ‘도대체 어디에 계신요?’와 같은 원망으로, 때로는 ‘진짜 계시기는 한가요?’라는 의심으로. 이렇듯 당신을 알게 되면서, 그리고 당신을 생각하면서 삶의 순간순간의 고비마다 같은 문장이 정말 다양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결같이 ‘침묵’이셨습니다. 그 침묵, 솔직히 저에게는 너무 힘든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당신을 몰랐더라면, 그래서 당신께 기대하지 않았더라면 침묵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얼마 전 피정 안에서 저는 당신께 똑같은 질문을 했지요. ‘어디계세요?’ 그 때 당신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 오십시오. 내가 편히 쉬게 하겠습니다.

(마르 6.31)” 라는 성서 구절을 주셨습니다. 그 성서를 보면서 저는 다시 질문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저는’ 편히 쉬고 싶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디계시죠?” 2박 3일의 피정 기간 동안 저는 줄곧 이 생각만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중 우연히 기도실에 있는 십자가와 거기에 계신 당신을 보았습니다. 평소에는 무심결에 지나가던 그 십자가와 당신의 모습이 그날따라 눈에 들어왔고, 무척이나 지쳐보였습니다.

 

그때 마음속에서 어쩌면 힘든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그동안 매순간의 제 질문에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같이’ 슬퍼하고 있었기에, 그래서 제 아픔 때문에 제 곁에서 항상 같이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해서 지금 너무 지쳐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지 제가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고 ‘나만의 아픔’을 주장했고 ‘나만의 치유’를 원했기에 항상 곁에서 슬퍼하시던 눈물 소리가 침묵으로 들렸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 제 이야기만 했을 뿐 당신의 이야기를, 당신의 모습을 보려하지 않았기에 당신의 눈물이 저에게는 침묵으로 다가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침묵’의 의미가 ‘함께 슬퍼함’이라는 것을 조금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감히 저는 항상 제 곁에서 함께 슬퍼하고 기뻐할 변치 않는 인생의 길동무를 얻은 것이라고 해도 될까요? 마치 어머니처럼 언제나 위로와 어루만짐으로 함께 해주실 길동무를.

 

하지만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질문할 거 같습니다. “어디계세요?” 하지만 그 질문이 더 이상 답답함 혹은 원망만은 아닐 거 같습니다. 그래도 감히 당신께 말씀드리면 침묵하고 계신 당신을 느끼기 위해 조금 더 아등바등 거리며 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그냥 또 그렇게. 사랑합니다. 그리고 함께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하느님의 어린양,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다.

 

 


♡ 신앙&삶 UP -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수심 200~1000m의 깊은 바닷속에 사는 어류인 심해어는 수심이 얕은 곳에 나오면 몸이 터져 죽는다. 그러니까 심해어는 수압이 높은 곳이 최적의 생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담쟁이에게 벽은 생존을 위한 조건이 된다. 그 벽은 장애가 아니라 생의 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는 역경과 시련이 외려 삶의 동력과 활력이 되는 경우의 사람도 살고 있다. 담쟁이처럼 심해어처럼.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요한 6,51ㄱㄴ)

 

- 이재무

 

 


♡ 자연 - 영혼의 쉼터 - 빛과 그림자 - 글/사진: 류해욱 신부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겼네.

빛을 창조하시자 어둠과 그림자가 따라왔네.

빛과 그림자는 낮과 밤이 하루이듯 하나라네.

 

그림자는 빛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네.

다만 물체가 빛을 가릴 때, 그림자가 생겨나네.

빛과 그림자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기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다만 빛이었는데

빛 속에 서면 물체는 그림자로 창조에 응답하네.

우리도 빛을 받아 아름다운 그림자를 그려야 하네.

 





▲ 8세기 이탈리아 란치아노 성당에서 화된 

성체, 성혈이 현시대에 보관되어 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이루어진 성체성사의 제정과 그 은총을 기념하는 대축일이다. 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첫 번째 목요일이나 일요일에 지켜지는데, 한국에서는 첫 번째 주일에 지내고 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은 교황 우르바노 4세의 교서로 교회에서 정식으로 지켜졌으며,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 의해 인가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성체 축일과 성혈 축일이 각각 기념되었지만, 1970년 이후 성체 성혈 대축일의 명칭으로 함께 기념하게 됐다. 

 

신심


성체(聖體, Eucharistia 유카리스티아)란 말은 「감사하다」는 희랍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느님께서 최고의 은혜를 주신 것에 감사함을 의미한다. 눈으로 보기에는 빵과 포도주에 불과하지만 실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심을 감사하는 것이다. 성체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비롯된 「실재적」이며, 「신체적」인 현존이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이다. 이러한 성체의 형상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믿음과 공경을 드러내는 신심행위로는 성체현시, 성체조배, 성체강복, 성체거동, 성체대회 등 여러 형태가 있다.

 

 

기적들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 예수께서 온전히 계신다는 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무수한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불식시키는 수많은 기적들이 세계도처에 일어나기도 했다. 이탈리아 란치아노-대표적인 성체 성혈 기적의 하나로 8세기에 이탈리아 란치아노 성당에서 일어났다.

 

어느 날 미사 중 바실리오회 한 젊은 수사신부는 축성할 때 손에 들고 있는 빵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로 변하는지, 포도주가 피로 변하는 지에 대한 의혹이 들어 괴로워했다. 당황해 하는 이 사제의 눈앞에서 성체가 살로 변했고, 축성된 포도주는 피로 변했다. 오늘날까지도 살과 피로 변한 성체와 성혈은 보존되어 남아 있다.

 

1970년 교황청 명으로 실시된 연구조사를 통해 △ 성체기적의 피와 살은 실제 피와 살이다 △ 그 살은 심장 근육조직으로 합성되어 있다 △ 이 살과 피는 인간의 것과 같다 △ 이 살과 피는 같은 혈액형이다 등과 같은 결과를 얻어 의학적으로도 성체 기적임을 인정받았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1345년, 한 어부가 병자성사를 받고 성체를 영한 것을 심한 기침 때문에 음식물과 함께 토해내 버렸다. 어부의 부인은 이를 화덕에 던져버렸다. 하지만 성체는 불 속에서도 타지 않고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곳곳에서 성체를 공경하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져 성스러운 행렬을 이루었다.

 

엄밀한 연구를 거쳐 우트레히트의 주교는 교서에서 이 사건은 진실이며, 성체의 기적을 널리 알리는 것을 허락한다고 발표했다. 그 뒤 1452년 새로운 기적이 나타났다. 암스테르담에 일어난 큰 화재로 온 도시는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기적을 일으킨 성체를 모신 성당과 감실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하지만 잿더미 속에서 성체는 물론 성체포도 흠 없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과 기적 / 박경희 기자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복음에서 들은 대로 예수님은 수난 전날 저녁 제자들과 함께 해방절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과 이별의 만찬이 됐습니다. 해방절은 이스라엘이 그 역사 초기에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사실을 기억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축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을 회상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의 사건이 지닌 의미를 오늘의 삶 안에 되살려 내는 일입니다. 우리가 조상을 위한 제사에서 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제사에서 우리가 돌아가신 어른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분들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분들이 아끼고 사랑하시는 후손인 우리 형제·자매들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깁니다. 제사 후 음복(飮福)을 하며 우리는 그분들의 시선으로 형제·자매들을 바라보고 사랑을 새롭게 합니다. 돌아가셔서 과거의 존재가 된 분들이 오늘 우리의 삶을 위해 갖는 의미를 되살려 내는 제사입니다.

 

해방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하고 그들의 삶 안에 되살려 내는 의미는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과, 그 함께 계심은 이집트 종살이에서의 해방과 같이 그들에게 은혜로운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나자렛 예수의 몸과 피(성체성혈)  / 굿뉴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 만찬이 해방절 식사였던 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의 삶 안에 되살려낸 예수님이었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하느님이 주시는 해방과 은혜로우심을 깨달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식탁에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도주 잔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후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 빵을 받아먹고 그 포도주를 마셔서 제자들도 예수님과 같은 몸, 같은 피가 되도록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내 계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계약은 계약 쌍방이 미래의 행동 방식을 약속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신 빵을 먹게 하고, 당신의 피라고 말씀하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면서 쌍방의 미래 행동 방식을 정하십니다. 그 빵을 먹고, 그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 안에 예수님이 살과 피로 살아계셔서 당신의 삶을 그들 안에 발생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몸이라는 단어는 인간관계를 의미하고, 피는 생명입니다. 그 빵을 먹고 그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은 예수님이 지녔던 인간관계와 그분의 생명을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 만찬으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미래를 위한 행동 방식이 정해졌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하느님의 어린양,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생각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피’라는 오늘의 말씀이 그 사실을 요약합니다. 자비와 사랑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 주신 그 생명을 우리도 살겠다는 약속이 담긴 성체성사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 사회의 실세였던 사제와 율사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특권을 받았다고 믿으며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나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게나 하느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유대교의 제도권 안에 있든, 밖에 있든 하느님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3.45) 그 시대 사제와 율사들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그들 자신의 위신과 명예를 찾고, 그들의 욕심을 채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일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섬기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아들 되어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사람이 갖는 인간관계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강요하던 십일조와 제물 봉헌에 동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자유롭게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을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사랑으로 자유롭게 응답할 것을 기대합니다. 군림하고, 강요하고, 명령하는 것은 횡포지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베푸십니다. 그분은 우리도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베푸는 일을 자유롭게 실천할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하듯이 당신의 위신을 찾고, 당신 스스로를 높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죄의식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유대교 기득권층으로부터 죄인으로 낙인찍힐 위험이 다분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처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에 구애받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와 어울리시기에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당국이 죄인이라 낙인찍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당신의 몸짓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무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 와서 나를 따르시오.”(마르 10,21)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이 재물이든, 위신이든, 베풀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가로막는 것은 모두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성찬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몸이라는 빵을 먹고, 그분의 피라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우리의 인간관계와 우리의 삶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성찬에서 변하는 것은 빵과 포도주만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보는 우리의 시선도 달라집니다. 빵이 예수님의 몸이 되고, 포도주가 그분의 피가 되듯이 우리 자신도 내어 주고 쏟는 사람이 됩니다.

 

이 변화는 한 순간에 기적적으로 실현되지 않습니다. 생명은 한 순간에 자라고 한 순간에 무엇을 배우지 못합니다. 생명은 시간과 함께 서서히 성장하고, 서서히 무엇을 습득합니다. 우리는 성찬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면서 시간과 더불어 이 변화가 우리 안에 일어날 것을 빕니다. 우리만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으신 예수님의 삶이 우리 안에 서서히 실현되게 하는 성찬입니다. 성찬은 빵도, 포도주도, 우리 자신도 모두 변하게 하는 하느님의 일, 곧 성사(聖事)입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 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 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 나기정


잔칫집에 가면, 사람들이 모여서 그 잔치의 주인공을 축하해 준다. 그리고 그날 잔치의 기쁨을 나누고 음식도 나눈다. 음식을 나누는 것은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일이 된다. 옛날에는 잔치가 끝나면 하객들이 떠나갈 때 잔칫집에서 음식을 싸주기도 하였다. 대접받은 것만 해도 고맙고 기쁜 일인데, 집에 가서 다른 이들과 나누라고 음식까지 싸주는 것이었다. 근래에는 이것이 없어지고 답례품이나 기념품 같은 것으로 대신하기도 하는데, 가정의례준칙으로 금지한 때도 있었다.


이렇게 옛 전통의 잔치는 단순히 음식을 나누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하객들에게 잔치 음식을 싸서 나누어줌으로써, 하객들은 그 음식을 집에서 가족들과 또다시 나누게 된다. 그러면 그 가족들은 음식을 나누면서 잔치에 관한 이야기로 기쁨을 또다시 나누게 된다. 이것은 우리 전통의 아름다운 풍습이었다. 잔치와 축제의 기쁨을 축하객들의 가족에게까지 확대시켰던 조상들의 깊은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좋은 것 같다. 옛말에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진다고 하였다. 우리는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생명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나누었다. 마치 한 아이의 탄생에 온 가족이 기뻐하듯이, 또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사람의 가족들이 기뻐하듯이 새 생명에 대한 기쁨을 나누었다. 그리고 50일 간에 걸쳐 오랫동안 그 기쁨을 나누고 축제를 거행하였다. 여덟 번째 되는 주일에 우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고 부활시기를 마감하였다. 이제 성령께서 우리 교회 안에 머물러 계시고 함께 계신다.


그런데 부활시기가 끝나고 이어지는 주일들에 계속해서 주님의 축일들을 지낸다.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이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이 대축일은 하느님 아버지, 성자 그리스도의 구원사업(파스카 사건) 그리고 성령 강림으로 삼위일체의 신비가 드러난 것을 기념하는 신학적 축제이다. 또 그 주간 목요일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대축일을 성대하게 지내려고 주일로 옮겨서 지낸다.



이 축제는, 이제 성령 강림으로 온전히 태어난 교회가 성체성사의 신비를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해주는 축제이다. 파스카 신비를 통해 교회는 온전히 주님의 힘으로 산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 안에 성령이 함께 계신다. 마치 몸 안에 영혼이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교회의 자녀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다. 이제 이 몸은 그리스도의 몸, 곧 성체이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은 성체성사인 것이다. 이제 믿는 이의 몸(교회)은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을 기념하고 축제를 지내며, 잔치를 벌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이다.


그렇다면 이 축일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본래 이 축일은 13세기에 성체께 대한 신심에서 유래되었다. 당대에는 성체 신심이 많이 실천되던 시대였다. 또 이 시대에 오르비에토(Orvieto)에서 성체성사의 기적도 일어났다. 여행을 하던 한 사제가 성체성사에 의심을 품고 미사를 봉헌하던 중 빵과 포도주가 실제의 살과 피로 변하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우르바노 4세 교황은 교서를 반포하고 이 축일을 이날 목요일에 지내도록 결정했다. 그리고 14세기에 와서 전 교회가 모두 이 축일을 지내게 되었다. 이것은 성체성사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기적 사건이다. 또 이 사건과 신자들의 신앙 때문에 교회가 자신의 몸(교회)에 대한 축제를 지내게 된 것이다.


이날 축제는 더할 나위 없이 ’성체’께 대한 것이다. 주일마다 교회 공동체가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이미 ’성체성사’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이날은 이를 특히 더 강조한다. 이날 독서의 내용은 모두 성체성사의 신비를 말해준다. 구약 독서는, 멜기세덱의 제사(가해), 시나이산의 계약제사(나해), 사막에서 만나를 먹음(다해)으로 성체성사에 관한 구약의 예형들이다. 또 복음은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설교(가해), 최후만찬(나해), 빵을 많게 한 기적(다해)으로 성체성사에서 말하는 ‘나눔의 의미’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성체성사의 의미는 명료하다. 나눔의 신비이다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이나 최후만찬 이야기, 또는 빵을 많게 한 기적에서 보듯이 기적은 ‘나눔’에서 생긴다생명은 기쁨이며, 기쁨은 나누어야 더 커지고 많아진다. 그게 기적이다. ‘모인 이들 우리끼리만’ 나누고 즐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라는 범위에 한정되지 않는다. 마치 잔칫집과 같다. 집으로 돌아가는 하객들이 잔치 음식을 싸들고 가듯이, 우리도 또다시 나눌 기쁨을 싸들고 세상에 나아가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자신의 ‘몸’을 ‘생명’이 되는 ‘음식’으로 내어주신 그리스도,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나눔의 신비를 오늘 묵상해 보자.


나기정 다니엘/ 신부,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목실

[경향잡지, 1999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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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빵


-최인호-


263년 프라하에는 베드로라고만 알려진 독일 신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신앙심이 깊었지만 성체성사 때마다 의심이 일어나 고통을 받았답니다. ‘이를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니라.’ 미사 때마다 축성어를 하면서도 과연 살과 피를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성체 안에 현존하고 계시느냐는 의혹이 생겨서 괴로움을 겪고 있던 그 신부님은 로마로 성지순례를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그 신부님은 로마에 있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무덤에서 의심을 풀어주시도록 기도를 요청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볼세나를 거쳐서 성 크리스티나 성당에 이르게 된 신부님은 그 곳에서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신부님은 평소 미사 때처럼 성체를 축성한 뒤 둘로 쪼개었는데 그 때 갑자기 붉은 피가 그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쪼개어진 성체의 윗부분이 한 덩어리의 살로 변한 것을 보았으며 성스러운 피가 성체포 위에 25개의 점으로 떨어지고 가시관을 쓰신 주님의 모습이 그 점 속에 나타나신 것을 보았습니다.


놀란 베드로 신부님은 미사를 제대로 끝내지도 못하고 재빨리 그 피 묻은 성체포를 제의실 상자 속에 숨겨두고 그 성당을 떠났습니다. 그 후 베드로 신부님은 교황 우르바노 4세를 방문해서 이 비밀을 고백했으며, 교황님은 즉시 주교를 그 성당으로 보내어 성체와 성체포를 가지고 오도록 하는 한편 화가 라파엘에게 그 장면을 그리도록 하셨습니다. 지금도 바티칸에는 그 때의 사건이 생생하게 그려진 라파엘의 그림이 잘 보관되어 남아있습니다.


또한 이 성유물을 기념하기 위해서 웅장한 성당을 지었으며 이 성당에는 아직도 피 묻은 성체포가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해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바로 이 사건으로 교황 우르바노 4세가 성체 성혈 대축일을 교회 달력에 추가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황의 부탁으로 환희에 넘치는 축문을 썼다고 합니다.

“당신의 구세주, 당신의 목동, 당신의 양육자, 시온아, 찬미하여라.”


하나의 교회인 베드로대성당, 장엄 성체조배 시간에 교황이 전세계에서 

은 시간에 동시에  성체강복 요청 / 가톨릭신문 



성체성사의 신비

-조명준 신부-

 

우리가 매일 먹는 쌀 한 톨, 배추 한 잎, 고기 한 점, 물 한 잔이 소화 작용을 통해 살이 되고 피가 되어 내 몸이 되고 나를 움직이게 합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이와 똑같이 미사를 통해 거룩하게 변모된 예수님의 몸과 피가 내 안으로 들어와 나의 살이 되고 피가 되고 나를 생기 있게 하는 원천이 됩니다.


이러한 과정과 믿음을 통해 조금씩 내 몸이 그리스도로 채워지고 변화되고 성장합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의 신비이고, 신앙의 신비일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이루어지는 신비입니다.


그러니 성체를 모시는 일을 통해 주님께서 내 안에 머무르고 내가 주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믿음의 결과인 동시에 실제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체성사의 신비는 생명의 말씀을 잘 소화했을 때 분명해집니다.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가 없을 때 성찬의 신비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사 때 말씀 전례를 먼저 행한 후 성찬 전례를 거행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제1독서의 말씀을 새겨들읍시다. 


감실 안에 나를 있게 한 것은 사랑이다. 나는 작고, 하얀 제병 안에 숨겨지고, 

빵의 조각들 아래 가려져, 밤, 낯 이천년이 넘게 여기에 머무른다. 

무시 고독, 겨열, 모독들, 불경스러움, 모욕, 신성모독, 이 모든 것들을 사랑으로 참아내고 있다. 



신나는바보-예수님과 하나되는 사건 성체- 전덕준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식사를 함께 하시면서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신다. 빵과 포도주를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은 내어주시면서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고린 11. 24-25)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당부하셨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은 최후의 만찬을 기억하는 것이고, 그 기억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우리들의 삶 안에서 이루어내기를 다짐하는 그 날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몸과 피, 빵과 포도주, 그리고 성찬례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예수님의 몸과 피는 인간 구성 요소인 몸과 피라는 의미를 넘어 죽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몸’은 약하고 한계를 지닌 인간을 나타낸다. 여기에 ‘너희를 위하여’라는 표현이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행위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결국,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곧 빵을 쪼개고 나누는 것은 너희를 위해 나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서다”라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피’는 생명의 원동력이며, 하느님께 속해 있는 것으로, ‘피를 흘리게 되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다. 곧 몸과 피는 당신의 결말을 피하지 않고 자유로이 자신을 내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할 수 있다.

빵과 포도주의 상징은 당신이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과 함께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음식으로 내어 주신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빵과 포도주는 축제의 상징인 동시에 수단이다. ‘빵’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양식으로 제시되고 있다. 빵은 배고픈 이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것으로 이 나눔은 의로운 인간의 원초적 행위(이사 58, 7 ; 에제 18, 7 등)로 보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이야기에서처럼 나눔의 행위는 당연한 것이었고, 이것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그 무엇을 함께 나누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함께 나누는 행위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전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빵은 생명력을 의미한다. 이 연관성은 “하느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루카 14, 15)라는 행복론의 결말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또한 ‘포도주’는 기쁨이 충만한 삶을 표현하는 것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즐거움, 우정, 사랑을 상징한다. 결국 이 포도주는 천상적 기쁨을 표현(아모 9, 14 ; 호세 2, 24 등)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나눔의 행위와 함께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고린 11, 24. 25)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그분의 행위를 반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구원의 의미로 당신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분의 구원행위는 역사 안에서 동떨어진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효력을 계속 발휘하며 여전히 사랑을 요청하고 있는 현재적 사건이라는 것을 드러낸다‘기억하라’(zakar)는 단어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힘과 효력을 되살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기억하도록 기도하는 것은 그분의 구원행위를 재현하기 위해 우리 또한 그 사건에 함께 할 것을 초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는 말씀은 단순히 반복되는 예식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의미를 다시 살아가라는 의미이며, 그럴 때에야 비로소 예식은 생명이 되고 당신 희생의 열매를 통하여 세상에 그리스도가 참으로 현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다시 기억하는 것은 주님의 부활이 어느 한 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부활시기가 지난 후에도 계속되는 현재적 사건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요, 지금 우리를 통해서 다시 이루어지는 사건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성체를 영할 때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우리는 부활사건의 살아있는 증인으로 오늘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의 정점이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를 특별히 기념하고 그 신비를 묵상하는 날이다. 이날은 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첫 목요일이나 주일에 지내도록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주일에 지내고 있다.

 

이 축일은 1264년 교황 우르바노 4세 때부터 공식적으로 지내기 시작하였으며, 성체 축일과 성혈 축일을 따로 지내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부터 함께 기념하고 있다.

 

오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성찬의 식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습니다. 이 미사 동안,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시는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 모두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도록 다짐합시다.

(가톨릭굿뉴스홈에서)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1247년 리에즈에서 몽 꼬르니용(Mont-Cornillon)의 복녀 쥴리앙(축일:4월6일)이라는 한 수녀의 열성에 의해 처음 드려졌다. 1208년 환시 중에 주님께서 제대의 성체성사를 공경하는 연중 축일이 빠져 있음을 자신에게 알려주셨다고 그녀는 말하였다. 얼마동안의 시간이 지난 후 리에즈의 주교와 특히 후에 교황 우르바노 4세가 된(1261) 쟈끄 빤딸레옹 대부제가 이 계시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오르비에또(Orvieto) 근처 볼세나(Bolsena)에서 일어난 성체성사 기적에 감명 받은 우르바노 4세는 1264년, 오르비에또에서 교서 "Transiturus"를 반포하는 가운데 새 대축일을 제정하였으며, 이 대축일은 성령강림절 팔부 다음 목요일에 성체 성혈 대축일을 기념하여 지내게 되었다. 쥴리앙은 몽 꼬르니용의 한 젊은 수사에게 새 축일 시간전례 기도문을 만들 것을 부탁하였었다.

 

하지만 우리 시대까지 사용되고 있는, 교황의 교서에 함께 붙어 있는 시간전례 기도문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근대의 연구는, 이 축일을 위한 미사와 시간전례 기도문은 성 토마스가 만든 것이라는 전통적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경향이다.

 

교황이 새 축일을 서방 교회 전체가 지키도록 자신의 권위로 명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오랫동안 이 축일은 "새 대축일"이라 불렀다. 또한 성체성사 축일, 하느님 축일, 지극히 고귀한 성사 축일, 그리스도의 몸과 피 대축일로도 불렀다.

 

우르바노 4세가 새 축일을 세운지 두 달 후에 죽은 까닭에 그의 교서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클레멘스 5세(1311-1312)와 요한22세(1317)가 이 교서를 새로 확인한 다음에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이 전 교회에 받아들여졌다.

 

이 축일을 진작시킨 세 교황 가운데 성체 행렬에 대해 언급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러 지역에서는 빠스카 아침 지성소의 그리스도의 "무덤"에 빨마 가지를 든 채 성체를 모시고 행진하거나 또는 성대하게 성체를 옮겼다. 본래 의미의 성체 행렬(성체 거동)은 13세기 말 산발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풍습은 14, 15세기에 퍼져나갔다. 로마교회는 15세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홈에서)


*세계성체 대회 수호성인 성 파스칼 바이런 수도자 축일:5월17일. 게시판1768번.

*몽 꼬르니용의 복녀 쥴리앙 축일 : 4월5일(4월6일) 게시판178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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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거룩한 희생제사는 연옥의 불쌍한 영혼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그들이 고통받는 기간을  단축시켜주며, 그들을 속히 복된 왕국으로 데려다가 주기 위한 가장 효과적


성체성사


성체성사는 우리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그 깊은 신비에 도달하려면 보이는 것에서 출발하여 믿는 것이 이르고, 더 나아가 믿는 것을 실행하여야 한다. ‘보이는 것’이란 빵과 포도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물질적인 빵과 포도주를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주신다. 주시고 받는 양쪽의 행위가 그리스도와 우리의 계약을 암시한다.

 

‘믿는 것’이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미리 보여 주신 제사이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표징으로 인류에게 당신의 생명을 내주시며 당신의 파스카에서 온갖 은혜를 받아 누리게 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빵을 나눌 때마다, 당신을 내주시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제대 위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는 성사의 현존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 ‘믿는 것을 실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삶은 인간 존재를 충만하게 할 것이다.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사람들 가운데 살아 계시며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다. 여기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 계명이 하나 되고, 믿음과 삶은 다르지 않다는 체험을 입증하게 된다.

 

복음서가 전하는 성체성사의 제정은 예수님의 죽음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앞당겨 거행한 성사적 표징이다.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살과 피를 제자들에게 주신다. 이것은 새로운 계약의 예고이며, "흠 없는 어린양"의 희생으로 날인될,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의 죽음을 실현하는 성사가 될 것이다 .



◎ 알렐루야.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리라.

◎ 알렐루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사는 도다.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구원의 보증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희망과 기쁨을 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실 때마다 희망을 갖고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잔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매일미사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1

그리스도의 몸

1) 주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2)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3)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4)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희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나의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6-9).

5) 아버지는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고"(1디모 6,16),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며"(요한 4,24),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요한 1,18).

6) 그래서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주기에"(요한6,63) 영적으로써가 아니면 그분을 뵈올 수 없습니다.

7) 이와 같이 아드님도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에 아버지를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 또한 성령을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는 아무도 아드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

8) 이 때문에 주 예수를 그분의 인성에 의해 보았지만 영과 천주성에 의해 그분이 하느님의 참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은 모든 사람들은 단죄 받았던 것입니다.

9)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제대 위에서 사제의 손으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축성되는 성사를 보면서 영과 천주성에 의해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모든 사람들도 단죄 받습니다.

10)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이것을 증명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 "이것은 내 몸이며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흘릴 새로운 계약의 나의 피이다"(마르14,22.24).

11) 또한 말씀하십니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요한 6,54).

12) 이 때문에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서 머무르시는 주님의 바로 그 영이 주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13) 이 영의 한 몫을 지니지 않은 채 방약무인(傍若無人)하게 주님을 받아 모시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1고린11,29).

14) 그러니 "한다한 사람들이여, 언제까지나 굳은 마음을 갖으렵니까"(시편 4,3).



15) 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의 아들을 믿지 않습니까?(요한 9,35).

16) 보십시오! 그분은 어좌에서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17) 매일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18)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제대 위에 내려오십니다.

19) 그리고 당신 자신을 실제로 육(肉)으로 거룩한 사도들에게 보여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축성된 빵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십니다.

20) 그리고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는 그분의 육신만을 보았지만 영신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믿었습니다.

21) 이와 같이 우리들도 육신의 눈으로 빵과 포도주를 볼 때, 그것이 참되고 살아 있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도록 또 굳게 믿도록 합시다.

22) 이와 같이, "나는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하고 당신 자신이 말씀하시는 대로 주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과 함께 이런 형상으로 항상 계십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가톨릭대사전에서

 

성체 聖體

라틴어 Eucharistia

영어 Eucharist

 

빵과 포도주의 외적인 형상 속에 실제로, 본질적으로 현존(現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말한다. 어원적으로는 희랍어 ‘유카리스티아’(eucharistia)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말의 본래의 뜻은 ‘감사하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은혜에 감사함을 의미한다.

 

구약성서에는 성체에 대한 많은 예표(豫表)들이 나오는데 창세기 14장 18절의 ‘떡과 술’의 표현이 그 한 예이다. 또한 예수는 스스로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라고 하셨으며, 최후만찬 때 하신 말씀(마태 26:26-28, 마르 14:22-24, 루가 22:19-20, 1고린 11:23-25)을 통하여 성체성사(聖體聖事)를 설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체에 대한 확신은 예수의 강력한 말씀에 근거하므로 성체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성체는 미사 중 성찬의 전례 부분에서 축성되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해져 한 가지 신비를 세 가지 측면에서 보여준다.

 

우선 성체는 세상 끝날까지 인간과 함께 계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비롯된 ‘실재적’이며 ‘신체적’인 현존이다. 또한 성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즉, 미사성제를 통해 이 희생이 계속됨으로써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체는 사랑의 일치를 보여준다. 즉 신자들은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하느님과의 일치라는 영혼의 초자연적 생명을 기르게 되는 것이다.


▲ 로마에 있는 예루살렘 성 십자가 성당에는 헬레나 성녀가 발굴해 안치한 성 십자가와 성 못,

 예수님의 죄명패, 가시 면류관 조각 등이 보관돼 있다. /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성혈 聖血

라틴어 Sanguis Pretiosissimus

영어 Precious Blood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 성혈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이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상징한다. 예수께서도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피다"(마태 26:28)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성혈은 사도시대 이래로 신자들의 흠숭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특히 성체성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미사 때 봉헌되는 포도주가 사제의 축성으로 성혈로 변화되어 포도주의 외적 형상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하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성체를 받아 모심과 마찬가지로 성혈을 받아 마심으로써 살아있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게 된다(요한 6:54-56 참조). 성혈에 대한 신심은 전통적인 것으로서 특히 교황 글레멘스(Clemens) 6세(재위: 1342-1352)는 그리스도의 피는 성자와 함께 결합되어 있기에 너무나 귀중하여 단 한 방울의 피로써도 모든 인류의 속죄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또한 1849년, 교황 비오(Pius) 9세는 7월의 첫 일요일을 성혈 축일로 지정하여 모든 교회가 지키도록 했으며, 1914년 교황 성 비오(St. Pius) 10세는 축일을 7월 1일로 변경시켰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성혈 축일을 성체 축일에 함께 기념하게 되었다. 즉 삼위일체 주일 후의 첫 목요일이나 첫 일요일은 성체 성혈 대축일의 이름으로 기념한다.

 


최후만찬 : 

예수께서는 공생활 3년을 마칠 무렵 그 당시의 관습대로 예루살렘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려고 하셨다.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시고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같이 하기로 하셨다, 그것은 평소 예수께서 제자들과 같이 이 파스카 축제를 지내려고 하셨기 때문이다(루가 22:15). 예수께서는 ‘만찬 도중에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먹는 예식을 하시다가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니라"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26:26). 식사를 마치시고 포도주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내 피를 흘리는 것이다"(루가 22:20) 하시며 제자들에게 "나를 기념하여 이 예를 행하라" 하시며 마시도록 권하였다.

 

이로써 최후만찬 때 예수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새로운 계약을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과 맺었던 것이다. 사도들에게 파스카 축제를 같이 하기로 한 이유는 모든 이의 죄사함을 위한 새로운 계약에 제자들을 참여시키고 그들 제자들로 하여금 ‘이 예(禮)를’ 영속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미사성제(성체제의)는 영적 생명을 위한 양식이고 천상의 파스카 잔치의 전신인 것이다.

 

구약의 파스카와 신약의 파스카(최후만찬)를 비교해 보면 그 뜻이 확실해진다. 

구약의 파스카어린양의 희생 · 양고기(음식) · 양의 피(해방의 표시) · 노예생활에서 해방(육체적) 

신약의 파스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 · 그리스도의 몸(빵, 음식) · 

그리스도의 피(포도주, 새로운 계약) ·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영생) 

이렇게 비교해 볼 때 구약의 파스카와 신약의 최후만찬은 형태는 비슷하지만 내용은 전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의 파스카는 상징적이고 현세적 생명을 말하며 신약의 최후만찬은 실체적이고 영생을 위한 것이다. 

또한 구약은 신약의 준비이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완전한 해방, 즉 죄와 죽음에서 벗어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신약에서 자신의 몸과 피를 제물로 바쳐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희생되시고 ‘모든 사람들의 죄 사함을 위해’ 자신의 몸과 피를 제물로 바쳐 영적 양식으로 우리에게 남겨 주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을 신약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의 혈제를 피 흐르지 않는 제사 즉 빵과 포도주의 형태 안에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 것이 바로 미사성제(성체성사, 성체제의)이다.

*[성목요일]주님 만찬 미사:4월8일(이동축일).게시판170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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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  소나무 신부님,


십자가의 희생과 미사성제 : 

성체의 제전은 초대 교회 때부터 그리스도 신자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이 예를 나를 기념하기 위해 행하여라"란 말씀으로 가톨릭교회는 오늘날까지 세상 어디서든지 사랑과 신뢰와 신앙으로 성체의 제정을 행하여 왔다. 이 성체제전은 미사성제이다.

 

십자가의 희생은 그리스도가 인류 구원의 대사업을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봉헌했기 때문에

봉헌자도 그리스도이시고 제물도 그리스도이시다.

 

남을 위해, 남의 속죄를 위해 바치는 희생제물은 참다운 봉헌이고 참다운 제사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위대한 사업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성교회 안에, 특별히 전례행사 안에 항상 현존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미사성제에 있어서 특히 성체 형상 안에 현존하시지만, 사제의 인격 안에도 현존하신다.

 

즉 "전에 십자가상에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같은 분이, 지금도 사제들의 봉사를 통하여 제사를 봉헌하고 계시는 것이다"(트리엔트 공의회 제22차 회의, 미사성제에 관한 교리 제2장).

 

이렇게 미사성제에 있어서도 제물도 제관도 그리스도 자신인 것이다. 사람인 사제는 다만 그리스도의 도구인(道具因)일 뿐이다

십자가상의 희생이나 미사성제는 방법상 다를 뿐이지 인류 구원과 속죄의 제사임에는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또한 동정녀 마리아 몸에서 태어난 나자렛의 예수. 공생활 3년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 기적을 행하고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시던 예수,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어 성부께 영광을 받은 천상의 예수, 빵과 포도주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는 다만 한 예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최후만찬 때 자기의 사명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 돌아간다"(요한 16:28)라고. 그러나 그리스도는 혼자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니다.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성부께 데리고 가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자기와 같이 사람들을 성부께 데려가기 위한 가장 뛰어난 사업이 성체성사의 제정이다. 그래서 성체는 성부께로 가는 길이다.

 

성체는 우리를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께로 돌아가게 하는 성사이고, 구원사업의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완전히 실현하는 성사이다. 그리스도 즉 우리들의 사제이시고 중개자이시고 우리들을 위한 제물이고 길이신 그리스도는 성체 안에서 성부와 우리를 만나게 하신다. 성체성사는 다른 모든 성사의 정점이요 완성이다.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

 

○ 엎디어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

 

○ 십자가 위에서는 신성을 감추시고

여기서는 인성마저 아니 보이시나

저는 신성, 인성을 둘 다 믿어 고백하며

뉘우치던 저 강도의 기도 올리나이다.

 

● 토마스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

언제나 주님을 더욱더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하소서.

 

○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사여,

사람에게 생명 주는 살아있는 빵이여,

제 영혼 당신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그 단맛을 느끼게 하소서.

 

● 사랑 길은 펠리칸, 주 예수님,

더러운 저, 당신 피로 씻어주소서.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 내시리이다.

 

○ 예수님, 지금은 가려져 계시오나

이렇듯 애타게 간구하오니

언젠가 드러내실 주님 얼굴 마주 뵙고

주님 영광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 아멘.


    성체성혈 꽃꽂이 제주교구 노형성당


 

 

편집 : 불광동성당 미디어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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