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축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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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5-03-25 | 조회수7,553 | 추천수0 | |
[전례돋보기]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주님 탄생 뒤 기리는 첫 순교자들
정확히 주님 탄생 후 3일째인 12월 28일 교회는 깊은 슬픔을 기린다. 헤로데의 죄악이 저지른 무고한 아기들의 희생에 대한 추모이다. 왜 하필 교회는 대축일을 불과 3일 지난 이 시점에 이 같은 억울한 죽음을 묵상토록 하는 것일까. 삶 속에 깃든 악의 세력, 그에 따른 죄 없는 희생, 그러나 그 희생을 사랑으로 품는 그리스도의 구원 약속. 이 세 가지 키워드가 이 축일의 본질이다.
죄 없는 희생물을 요구하는 삶 속의 죄악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대축일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교회는 느닷없는 죽음을 기리라고 한다. 축제의 현장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아닌가 싶은 오해의 시선이 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이는 외형만 보았을 때 나올 수 있는 반응이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 삶의 본질이 담겨 있다.
사실 삶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인류사의 최대 모순은 죄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이는 표피이다. 더 깊은 본질은 그 아이러니를 딛고 일어선 예수님의 부활이다. 삶의 부조리, 죄악, 모순, 역겨움을 다 뛰어넘는 기쁨의 궁극을 보여준다. 궁극의 경지는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오지 않는다.
헤로데의 정신병적 불안이 몰고온 두 살 이하 아이들에 대한 대량 학살. 이 얼마나 참담하고 잔혹한 일인가. 아기 예수가 두려워 벌인 헤로데의 학살은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허허롭고 불안의 덩어리인지 극명히 보여준다. 그 결과는 어떤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이들이 쏟았을 피와 비명, 그 부모들이 겪었을 극한의 고통은 상상 너머이다. 어떤 표현도 부족하다.
예수님의 탄생 뒤 벌어진 이 희생은 우리의 삶 속에 늘 깃들어 있는 죄악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한다. 인간의 악이 치닫을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이다.
죄 없는 희생, 첫 순교자가 된 아기들
마태오 복음 2장 16-18절에 근거한 이 축일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기보다 시적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연구되어 왔다. 12월 28일이란 날짜는 아마도 예수의 성탄축일과 연관되어 정해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적어도 5세기부터는 이 순교 축일이 기념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5세기 무렵 로마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모자이크와 밀라노 대성당 상아(象牙) 복음서의 삽화에 무죄한 어린이들의 학살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 탄생을 기념하여 교회는 성탄 팔부 축일을 지내는데 그 중 기쁨보다는 슬픔, 생명보다는 죽음이 짙게 배여 있는 날이 바로 무죄한 아기 순교자들 축일과 성 스테파노의 순교 축일이다. 아기 순교자들은 주님을 대신해 죽는 첫 순교자들이다.
<제1독서>는 전날부터 봉독하기 시작한 요한 1서를 이날 축일과 관련 없이 계속 봉독한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이 되신”(1요한 2,2)이란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다가올 수난을 예고하고 이와 관련해 어린이들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묵상하도록 한다.
<복음> 말씀(마태 2,13-18)은 이날 축일의 배경이 된 아기 예수의 이집트 피신과 무고한 아기들의 학살 사건을 기록한다. 아기 예수의 피신은 잉태를 받아들인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과 같은 요셉의 무조건적인 순종의 결과이다. 요셉과 같이 늘 명령에 따를 준비가 되려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생활이 습관화되어야 한다. 무죄한 아기들의 학살은 모세 때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들을 죽이도록 한 사건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이번 학살은 이스라엘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스라엘 왕이 저지른 것이다. 결국 무죄한 아기들의 학살은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드러내며, 이와는 정반대로 철저한 순종의 자세를 취한 요셉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런 점에서 죄 없는 아기들의 희생은 연극적일 만큼 상반된 이미지를 그려낸다. 죄악에 물든 헤로데와 순백의 아기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왕이 무력한 아기들을 향해 저지른 학살, 요셉의 무조건적인 순종과 이스라엘의 불순종, 아기 예수 탄생의 기쁨과 그 안에 내포한 십자가 희생. 불안과 공포의 요소가 있지만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 구원에 대한 약속 안에서 다시금 영원한 기쁨으로 승화된다.
아기들은 ‘구원된 첫 열매들’
교회는 전례를 거행하며 ‘무죄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대신 그 어린이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해되었다”(입당송)고 말한다. 또한 영성체송을 통해 베들레헴의 이 어린이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구원된 첫 열매들’이라고 밝힌다. 그래서 이들을 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생각하여 공경하며 축일로 기리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무고한 아기들이 세상이 저지르는 죄악으로 고통 받으며 죽어가고 있고, 세상에 나오지도 못한 채 어머니 배 속에서 살해된 낙태아들이 많이 있음을 상기할 때 무죄한 아기들의 순교는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이 축일을 기념하며 먼저 우리 안에 만연한 죄악을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그러나 이날이 축일, 즉 기쁜 날이 되려면 그 죄의식, 죄책감 안에 머물지 말고 죽음과 부활로써 복음을 전하신 그리스도의 사랑, 구원 약속을 믿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야 마땅하다. 그것이 아기들의 희생 축일을 울상이 아닌, 진정한 축제로 즐기는 우리의 자세일 것이다.
[참고자료] 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매일미사> 2010년 12월호.
[복음화를 위한 작은 외침, 2011년 12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정리 최영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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