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위령] 위령 성월 유래와 의미, 죽음보다 더 강한 희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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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5-11-02 | 조회수5,763 | 추천수0 | |
[위령성월 특집 기고] 죽음보다 더 강한 희망
그리스도인의 죽음,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는 관문
삶이 영원히 주어져 있는 시간인 듯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 발길 아래로 뒹구는 낙엽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추사이망(追思已亡)의 때를 알리며, 고달픈 삶의 일손을 잠시 멈추고 사색의 시간 안에 머물게 한다.
정신분석가 미트쉐어리히(A. Mit scherlich)는 “인간의 출생과 죽음은 세상 모든 이에게 주어진 불가항력적인 현존의 두 기둥”이라 했다. 태어나고 싶을 때, 태어나고 싶은 곳에서, 원하는 부모에 의해 삶이 시작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살고 싶을 만큼 장수하고 삶을 마감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출생과 죽음이라는 두 한계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분명하게 체험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죽음은 자기의 현실 생명의 끝이기에 누구에게든 출생보다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 더 뚜렷하고,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진다. 더욱이 죽음은 단순히 생리적 현상으로서의 죽음만이 아니라 실존적 체험으로 극복해야 될 지금의 삶과 미지의 삶의 분계점이므로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삶의 과제이며,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동시에 마지막 부분이다. 또한 사람은 자기의 죽음을 직감할 때, 자신이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인지를 거짓 없이 깨닫게 되고, 자기 실존의 깊이를 깨닫게 되므로,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실존의 거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문명의 발달과 사회구조의 변화는 이와 같은 죽음의 인식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과학문명은 생명의 무한한 연장을 통해 죽음이란 단어를 삶에서 지우려하고 있고, 사회구조는 맹목적인 삶에서 죽음의 영역을 제거해버리려 한다. 마치 죽음이 죄인이 된 채 삶의 거처에서 내어 몰리는 세상이다. 예전에는 객사(客死)가 허락되지 않았다. 임종의 시간이 가까워지면 집안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이제는 그 반대가 되었다. 편리성과 유효성의 이유로 삶의 거처였던 집 밖으로, 가족의 품 밖으로 죽음이 내어 쫓기다시피 하고 있다. 그러니 죽음의 흔적이나마 찾을 수 있는 곳은 삶의 그늘진 자락이나 장례식장 정도가 되어버렸다. 죽음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와 기피, 죽음은 나와 상관없다는 “아직 아니”라는 착시현상만이 만연해 가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진정 사랑한다면 한 번 되돌아보자.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는 실존의 삶 안에 죽음은 “아직 아니”가 아닌 “이미 벌써”로 내재해 있다고 했다. 삶에 분주한 오늘의 인간이 죽음의 문제를 아무리 외면하고 거부한다 할지라도, 죽음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문제를 던져오는 이유는 바로 “아직 아니”가 아닌 “이미 벌써” 내 안에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고 있는 것은 이미 죽어가고 있는 것이며, 이미 죽어가고 있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가 삶으로서의 죽음, 그 삶의 문제인 죽음이란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삶의 중심에 “이미 벌써” 버티고 있는 죽음의 문제는 우리 삶의 시간이 하느님의 선물이며 매일의 삶, 그 충실함 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희망과 사랑과 믿음으로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을 때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죽음은 유한한 인간 생명이 영원한 삶을 향한 하느님 생명에로의 참여이며, 이 영원성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이 하느님에 의해 현양됨이라는 것을. 이를 통해 죽음은 희망과 구원, 곧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는 관문임을 고백할 수 있고, 이 고백으로 죽음보다 더 강한 희망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제 삶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희망의 종결이 아닌 희망의 계속적 과정 중의 한 사건이며, 영원한 삶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일치와 만남을 위한 것임을 고백하고, 죽음이 참 삶을 발견하고 자기를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자.
* 김정우 신부는 1983년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됐으며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서 윤리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2대, 5대 대구관구 대신학원장을 역임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1월 1일, 김정우 신부(대구가톨릭대 윤리신학교수)]
[위령성월 특집 기고] 위령성월 유래와 의미는?
클뤼니 수도원 전통에서 시작된 죽은 이들 영혼 위로하는 시기
가톨릭교회는 11월을 위령성월(慰靈聖月)로 보낸다. 위령성월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특별한 신심 기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위로’는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기도를 먼저 떠올릴 수 있지만 특히 연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영혼들이 정화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살아 있는 이들이 희생하고 선행을 베푸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위령성월 중 위령의 날을 통상 11월 2일에 지키는 것과 바로 전날인 11월 1일을 모든 성인 대축일로 지키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톨릭신자들이 미사 때마다 바치는 사도신경에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로 표현되는 통공 교리는 교회를 이루는 세 구성원인 세상에 살아 있는 신자들과 하느님 나라에서 복락을 누리는 성인들, 그리고 아직 고통을 겪는 연옥 영혼들이 하느님 안에서는 하나로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위령성월 기간 동안 살아 있는 이들이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느님 나라에 먼저 간 모든 성인들이 현세를 사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음을 믿고 기억해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이다. 또한 신자들이 살아생전 하느님과 맺은 친교는 죽어서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 즉 하느님의 백성은 죽음이 끝이 아닌, 즉 생과 사를 초월한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가톨릭교회에서 위령성월이 11월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998년 클뤼니 수도원 제5대 원장인 오딜로(Odilo)가 자신이 관할하는 수도자들에게 모든 성인 대축일 다음날 죽은 이를 위해 특별한 기도를 드리고 시간 전례를 노래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부터 위령성월이 시작됐다고 보는 견해가 정설이다.
클뤼니 수도원이 정한 전통이 교회 내에 널리 퍼지면서 11월 한 달 동안 위령기도를 바치는 관례가 정착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후 교황 비오 9세(재위 1846~1878), 레오 13세(재위 1878~1903), 비오 11세(재위 1922~1939)가 위령성월에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 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하면서 위령성월은 가톨릭전례력에서 더욱 굳은 지위를 얻게 됐다.
세속에서는 12월이 한 해의 마지막 달이지만 가톨릭교회 전례력 상으로는 11월이 연중 마지막 달이라는 점도 위령성월이 11월에 지켜지게 된 하나의 배경이다. 연중 마지막 기간인 11월에 위령성월을 보냄으로써 종말에 성취될 구원과 삶의 선한 끝맺음을 미리 묵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낙엽이 땅에 뒹구는 쓸쓸한 11월이야말로 그리스도교적 죽음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는 가장 좋은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가톨릭교회에서 죽은 이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관습은 훨씬 오래전으로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로마에서는 망자를 기리기 위해 헌주와 음복을 하는 것이 대중적으로 널리 행해졌고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무렵인 4세기까지는 당시 1년 가운데 마지막 달로 여겨지던 2월에 위령제를 지냈다. 로마 교회도 이러한 관습을 받아들여 4세기부터 2월에 베드로좌에 모여 베드로를 추모했는데 오늘날 ‘베드로 사도좌 축일’이 2월 22일로 정해진 것은 4세기의 교회 모습이 반영된 결과다.
현대 신앙인들이 알고 있는 위령성월과 위령의 날이 4세기로부터 한참 후대에야 선포됐다는 사실은 의문이 제기된다. 이는 이교도들이 행하던 죽은 이들을 위한 미신적인 관습이 오랜 기간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1월 1일, 박지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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