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부활] 신앙선조들을 통해 보는 재의 수요일과 사순시기 | |||
---|---|---|---|---|
이전글 | [전례] 펀펀 전례: 위령미사와 연도 | |||
다음글 | [사순부활] 발 씻김 예식 수정에 관한 교령 주님 만찬 미사와 해설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02-10 | 조회수6,518 | 추천수0 | |
수원교구 신앙선조들을 통해 보는 재의 수요일과 사순시기
금육과 금식, 박해 중에도 철저히 지켜나가
사순시기의 시작을 알리는 재의 수요일. 대부분 휴일과 주일에 지내는 축일들과는 달리 평일에 이뤄지는 재의 수요일 전례는 바쁜 일상 속에 참석하지 못하거나 잊히곤 한다. 게다가 올해 재의 수요일은 설 연휴가 겹쳐 많은 이들이 재(齋)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다. 이렇듯 오늘날에도 챙기기 어려운 재의 수요일을 박해시기 신앙선조들은 어떻게 지켰을까.
재의 수요일은 예수 부활 대축일을 기준으로 7주 전 수요일이다. 예수 부활 대축일은 유다인의 달력으로 니산(Nisan)달의 14일 다음에 오는 양력의 주일로 정해지기에 기억하기 어렵다. 특히 양력은커녕 주간의 개념조차 없던 신앙선조들에게 전례력을 이해하고 재의 수요일을 지키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조들은 박해시기에도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하는 사순과 부활시기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지켰다.
이는 1801년 신유박해에 경기도 여주에서 붙잡힌 순교자들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복자 이중배(마르티노)와 복자 원경도(요한)를 비롯한 여주 지역의 신자들은 경건하게 사순시기를 보내고 여주 양섬에서 부활잔치를 벌였다. 그들은 큰 소리로 ‘알렐루야’와 ‘부활 삼종경’을 바치고 고기와 음식을 즐겼다. 이를 탐문한 고을 수령은 잔치에 참석한 신자들을 모두 잡아 들였고, 배교하지 않은 신자들은 순교의 길을 걸었다. 여주본당은 이 순교를 기리며 여주 양섬에 현양비를 세웠다.
신자들이 재의 수요일과 사순시기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첨례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첨례표는 한 해 교회의 주요 축일 등의 전례시기를 월, 일로 구분해 기록한 표다. 1801년 신자인 윤현의 집에서 압수한 서적 목록에 「첨례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신앙선조들이 첨례표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어농성지에서 현양하는 복자 주문모 신부도 명도회의 모임을 매 축일로 정해, 신자들과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선교에 힘쓰기도 했다.
신앙선조들은 재의 수요일을 ‘성회례’(聖灰禮), 즉 ‘거룩한 재의 예식’이라고 불렀다. 단순히 사순시기의 시작이기에 기억한 것이 아니라 이날만이 할 수 있는 교회의 전례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오래된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에서도 재의 수요일에 하는 재를 얹는 예식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전례를 집전할 사제가 거의 없었던 박해시기의 신앙선조들은 재를 얹는 예식을 하기 어려웠다. 또 박해를 피해 기도물품을 숨기고 거처를 수시로 옮겼기에 태워서 재로 만들 팔마나무도 구하기 어려웠다.
신앙선조들은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시기가 시작되면 더욱 엄격하게 재(齋)를 지키고 기도했다.
신자들은 깊은 산 속에 숨어 교우촌을 이뤄 살며 가난하고 굶주리는 가운데 생활하면서도 단식을 하는 대재(大齋)와 금육을 하는 소재(小齋)를 철저하게 지켰다.
수리산 교우촌에서 살다가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도 이런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
1850년 10월 1일자 서한에 따르면 11살 소녀 바르바라가 사순시기에 날마다 하루에 한 끼만 먹었고, 집안일을 할 때도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교리문답과 성인전,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 신심서 내용들을 늘 암송하곤 했다고 전한다.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에서는 “박해와 흉년으로 신자들의 처참한 상태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라면서 “그들이 겪은 이야기를 들을 때 천주교 계명의 준수(재의 준수)를 저지하고 싶은 고민으로 마음이 갈가리 찢어진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양근성지에서 현양하는 복녀 권 데레사도 병약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사순시기에 대재를 지키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런 불편함을 내비치지 않았다. 평상시에도 일주일에 2회 단식을 실천하던 복녀는 사순시기에는 더욱 엄격하게 금육과 금식을 실천했다. 그는 이를 통해 완덕에 보다 빨리 이르리라 믿었다.
신자들의 재의 준수는 비신자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질 정도였다.
신유박해 당시 경기도 이천과 충청북도 지역을 관할하던 충주목사로 있던 이가환은 신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금육일을 골라 선비들을 초대해 고기를 대접하고 신자 여부를 알아보기도 했다.
또 1866년 병인박해 중 다블뤼 주교와 신자들이 체포돼 서울로 끌려갈 때 평택 읍내에서 고기가 있는 식사를 내놓았지만, 일행은 식사를 들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신앙선조들은 사순시기를 보속의 시기로 지내면서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자 고신극기를 실천했다. 손쉽게 사순시기를 기억하고 편하게 음식을 접할 수 있는 오늘. 신앙선조들의 사순시기를 기억하고 절제와 나눔을 실천하고, 평소의 악습을 끊는 사순시기를 보내면 어떨까.
- 한국교회의 가장 오래된 기도서 「천주성교공과」.
- 최양업 신부가 작성한 서한.
- 여주본당 신자들이 지난해 5월 31일 양섬에 세운 순교자 기념비.
- 최양업 신부가 유·소년기를 보낸 수리산 교우촌.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6년 2월 7일, 이승훈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