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월] 플로레스 데 마요와 산타크루잔, 필리핀의 성모 성월 축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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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05-05 | 조회수7,542 | 추천수0 | |
[세상 속의 교회읽기] 플로레스 데 마요와 산타크루잔, 필리핀의 성모 성월 축제
흔히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들 말한다. 북반구의 4계절이 뚜렷한 지역에서는 온갖 초목들이 나날이 푸르러 가고 갖은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즈음이기에 더욱 실감나는 표현이다. 더욱이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성모님의 달이기도 하다. 비록 4계절이 분명한 곳은 아니지만, 필리핀도 이 점에서는 우리네와 마찬가지다.
그곳에서는 아예 5월 내내 성모님을 공경하고 기리는 축제들을 지낸다. 그 하나가 ‘플로데스 데 마요’(Flores de Mayo, ‘5월의 꽃들’)이라는 축제다. 그리고 이 축제 끝머리에 ‘산타크루잔’(Santacruzan, ‘거룩한 십자가’)라는 가장행렬을 한다.
필리핀에서 이 축제를 지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이다. 1854년에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가 선포되고 그 얼마 뒤에 마리아 신심을 소개하는 책자가 출판된 뒤부터다. 이를테면 플로레스 데 마요는 15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축제다. 필리핀 사람들은 필리핀 국내뿐만 아니라 그들이 진출해서 공동체를 형성한 곳 어디서나 이 축제를 지낸다.
필리핀의 5월은 한동안 지속되던 건기가 끝나고 우기가 시작되는 때다. 비가 내리면서 온갖 꽃들이 피어나서 향기가 진동하는 때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달이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가 된 필리핀 사람들은 은혜로운 달에 성모 마리아께 찬미와 공경을 드리는 가운데 비가 내리는 것을 경축하기 시작했다.
지역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개는 여러 종류의 꽃들을 가져다가 성당의 제단과 통로를 꾸민다. 그리고 성모님께 꽃들을 잘라 엮은 꽃다발을 드리거나 꽃잎들을 뿌린다. 성당이나 성모상 앞에 모여서 성모님의 덕행을 기린다.
묵주기도를 바치고 성모 성가와 성모 호칭 기도로 성모님을 찬미한다.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고서 농작물들을 무럭무럭 자라게 해 줄 비를 환영하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그리고 저마다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나눠 먹는다.
그리고 필리핀 사람들은 한 달에 걸친 축제가 끝날 즈음에 또 하나의 사건, 곧 성녀 헬레나가 예수님께서 못 박히셨던 십자가를 발견한 것을 기념하고 기리는 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한다. 산타크루잔이라는 가장행렬이다. 오늘날 교회는 9월14일에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며 성녀 헬레나의 십자가 발견을 기억한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5월3일에 이 축일을 지냈다.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달 5월
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의 어머니인 성녀 헬레나는 75세 고령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셨던 십자가를 발굴하기 위해서였다. 몇 지점을 파낸 끝에 마침내 십자가 세 개를 발굴했다. 그런데 어느 것이 예수님의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성녀는 마침 병에 걸린 하인을 각각의 십자가에 눕게 했다. 그리고 한 십자가에 눕는 순간, 그 하인의 병이 나았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였다.
산타크루잔의 유래는 이러한 날짜와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 어쨌든, 산타크루잔은 필리핀 전역의 수많은 도시들과 마을들, 심지어는 작은 촌락들에서도 열린다. 유명 연예인들도 주요 인물과 주변 인물들로 분장하고 참가할 정도로 전국적인 행사다. 이제는 젊음, 사랑, 로맨스까지 어우러진 전통이 되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이 행사를 앞두고 성 십자가를 현양하며 9일기도를 바친다. 그리고 가장행렬에 참여할 사람들을 지역이나 마을의 여성들 중에서 선발한다. 가장행렬의 주인공은 당연히 성녀 헬레나인데, 참가자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거나 가장 중요한 여성이 맡는다. 주인공을 선발할 때는 외모뿐 아니라 덕성도 고려한다.
선발된 여성들은 설정된 인물들의 특징을 살려 분장하고 각 인물을 표상하는 상징물을 휴대한다. 행렬에 등장하는 이들은 아래에서 보듯이 대부분 성경이나 전승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노인 ‘므두셀라’는 구약의 인물로서 세상이 덧없음을 나타내고, ‘깃발을 든 여왕’은 그리스도교의 전래를 나타내며, ‘아에타’는 옛날에 살던 필리핀 원주민들을, ‘무어 여왕’은 그리스도교보다 먼저 전래된 이슬람교를 믿는 필리핀 사람들을 나타낸다.
그리고 성경의 인물로서 솔로몬을 방문했을 때 벌써 십자가로 쓰일 나무를 알아보았다고 하는 ‘세바의 여왕’, 다윗 가문의 여인이자 예수님의 선조들인 ‘룻’과 ‘나오미’, 이교도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죽인 ‘유딧’, 하만의 손아귀에서 동족을 구한 ‘에스테르’, 우물터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 십자가 길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린 ‘베로니카’, 예수님의 죽음의 현장을 지킨 ‘세 명의 마리아’가 등장한다. 또한 초대 교회의 동정 순교자들을 나타내는 ‘죄 없이 유죄 판결을 받은 여왕’과 그리스도인의 기본 덕성들을 나타내는 ‘신덕의 여왕’, ‘망덕의 여왕’, ‘애덕의 여왕’도 있다.
성녀 헬레나의 십자가 발견 기념하는 가장행렬
그리고 성모님과 관련해서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들을 의인화한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옹호하는 모후’, ‘하느님의 목자’, ‘정의의 모후’, ‘천사의 모후’, ‘상지의 옥좌’, ‘하늘의 문’, ‘별들의 모후’, ‘신비로운 장미’, ‘성모 성심’, ‘묵주기도의 모후’, ‘달의 모후’, ‘촛불의 모후’, ‘평화의 모후’, ‘성조의 모후’, ‘예언자의 모후’, ‘증거자의 모후’, ‘순교자의 모후’, ‘사도의 모후’, ‘동정녀의 모후’가 있다.
이 인물들로 분장한 이들이 향기로운 꽃들로 장식한 아치 아래를 지나간다. 그들의 뒤를 ‘꽃들의 여왕’이 따르고, 그 뒤를 성녀 헬레나가 성 십자가를 상징하는 작은 십자가를 들고서 아들 콘스탄티노 황제로 분장한 소년의 호위를 받으면서 따른다. 그 바로 뒤에는 성모상이나 성모님 그림을 실은 수레가 따르고, 그 뒤로 악대가 연주하며 따라간다. 그리고 나머지 참석자들이 초에 불을 켜서 손에 들고 악대의 반주에 맞춰 기도문이나 성가를 부르면서 따라간다. 이 행렬은 마을의 후미진 곳에서 번화가까지 곳곳을 거친다.
가장행렬이 끝나면 대개는 마을의 대표가 다과를 베푼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위해서 파비틴(pabitin)을 공개한다. 파비틴은 사탕, 과일, 장난감 등을 줄에 매어 늘어뜨린 사각형 격자 구조물이다. 이것을 밧줄로 묶어서 튼튼한 나뭇가지나 기둥에 매달아 놓으면, 어린이들은 그 아래로 달려가서 뛰어 올라 줄에 달린 것을 따서 갖는다.
한국에 나와 있는 필리핀 사람들도 5월이 되면 규모는 크지 않겠지만 산타크루잔을 즐길 것이다. 장소가 필리핀이든 어디든 그들이 성모님을 기리고 십자가 발견을 기념하면서 꽃들의 향기로 세상을 진동시키는 것은 멋진 일이다. 혹시 필리핀을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아니면 국내에서 이런 축제 현장에 참여하는 것 또한 의미 있을 것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5월호, 이석규 베드로(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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