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례] 전례 톡톡: 영성체는 하루에 몇 번까지 할 수 있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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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12-01 | 조회수6,776 | 추천수1 | |
[전례 톡톡] 영성체는 하루에 몇 번까지 할 수 있는가?
어떤 성당에서는 영성체를 같은 날 하루에 두 번까지 해도 된다고 하고, 또 어떤 성당에서는 안 된다고 그래요. 어떤 규정이 있는 건가요? - 코센차에서 프란카 -
미사 참여할 때마다 영성체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 몇몇 교부들이 청원을 했지요. 하지만 전례위원회는 이를 검토 대상에 넣지 않았답니다. 영성체가 질(質)보다 양(量)에 더 관심을 쏟고, 미사 거행으로부터 솟아나는 사도직과 애덕 실천 대신에 자주 수박 겉핥기에 불과한 경건한 갈망을 충족시키고자 애쓰는, 그런 순전히 신심적인 행위로 변질될까 염려했던 거죠.
미사 안이냐 미사 밖이냐?
1973년도의 훈령 『무한한 사랑』(Immensae caritatis)이 이 논리를 받아들였어요. 교회의 오랜 전통을 재강조하며, “신자는 영성체를 하루에 한 번만 할 수 있다. 이는 영성체를 오직 신심의 동기 때문에 소홀히 여기지 않게 하려는 규정이다”라는 말을 했어요. 하지만 이 훈령은 몇 가지 예외들을 인정했지요. 혼인이나 수도 서원, 주교의 사목 방문 같은 경우들이랍니다.
1983년 새 교회법전은 수많은 요청들과 마주하게 되면서, 성체를 이미 영한 이라도 같은 날 자기가 참여하는 성찬 거행 중에서만 다시 성체를 영할 수 있다(교회법 제917조)라는 규정을 만들어요. 그러니까 옛날 규정을 완화하고 단순화시켜, 딱 두 번 그리고 미사 중에서만 영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든 거죠. 미사 안에서 하는 영성체는 전례 헌장 55항에서도 언급됐는데 거기서 그 이유와 형식에 대해 설명하죠. 즉 영성체로 미사에 완전히 참여하게 되는 것이니 왜냐하면 신자들이 똑같은 희생 제사에서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즉 미사 안에서 축성된 제병을 받아 모실 때 그렇다는 거죠.
위의 교회법 제918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요. “신자들은 성찬 거행 중에 성체를 영하도록 간곡히 권장된다. 그러나 미사 밖에서도 정당한 이유로 청하는 이들에게는 전례 예식을 지키면서 집전되어야 한다”. 여기서 ‘정당한 이유’란 노동이나 건강상의 이유가 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지켜야 할 ‘예식’은 『미사 없는 영성체』(1979)라는 책 안에 다 들어있어요. 이전 예식에 비해, 현행 예식은 참되고 고유한 전례 거행이 되게 만들어져 있어요. 즉 영성체의 의미를 발전시키는데, 영성체가 ‘예수님을 자기 맘속에 모시는 것’같은 표현처럼 너무 단순하고 유치하기까지 한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게 돼있어요.
믿음의 지평
주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 미사 때마다 반복되는 그 말씀은 들어보면 달라요.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영성체를 통해 문을 열고 나아갈 방향은 이러한 믿음의 지평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자 동시에 그분의 십자가상 죽음의 의미요, 우리를 위한 영원한 생명의 빵과 구원의 음료인 빵과 포도주의 성사적 표징을 통해 우리가 참여하게 될 그분의 활동이랍니다. 영성체가 비록 신자와 주님 사이의 맞대면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때 하신 일을 반복하는 예식으로 거행돼요. 이를테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단이자 잔치 식탁인 제대에 참여하며,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기쁨과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어린양의 천상 만찬을 앞당기는 거죠
교회공동체적 예식 참여
따라서 우리가 미사 중에 영성체하라는 규정을 통해 자각하게 되는 것은 영성체의 숨은 본성이랍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예식에 교회공동체가 참으로 참여한다는 것이죠.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하고 그분께서 직접 명령하신 이 행위를 가리켜 희랍어 단어로 ‘에우카리스티아’(eucaristia)라고 하는데, 이 이름부터가 그분께서 바치신 기도, 곧 ‘감사를 드리고’라는 말에서 나오는 거예요. 영성체 순간이 주님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며 묵상하는 시간임을 부인하는 건 아니지만 자기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거는 건 주님의 뜻에 맞지 않고 교회의 뜻에도 맞지 않아요. 그것은 우리가 성부의 초대를 받은 한가족임을 잊는 것이자 성자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식탁에서 한마음 한몸이 되라는 초대를 망각하는 것이죠.
주님의 말씀을 좁은 안목으로 보거나 축소하고 잘라내거나 해서 만들어진 표현이라면 신앙과 삶의 모든 풍요로움으로부터 단절돼 버려요. 최후의 만찬과 전례 거행에서 서술하는 이야기에서 나오는 모든 보화들을 받아들일 수 없게 돼죠. 이 때문에 미사 안에서 하는 영성체는 단순한 갈망이 아니라 논리적 결론이요. 참으로 필수 불가결한 요구인 거죠. 트렌토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음식과 음료로 배령되도록(ut sumatur)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어요. 성찬례에 시작부터 참여하면서도 그것의 정점이요 논리적 성취인 영성체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식탁에 앉아 있되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는 식사 시간과도 같겠지요.
(R. Falsini,La liturgia. Risposta alle domande piu provocatorie, San Paolo, Cinisello Balsamo 1998, 32-34)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6년 가을호(Vol. 35), 번역 최종근 빠코미오 원장수사(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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