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미사]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성찬례, 믿나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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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01-16 | 조회수5,603 | 추천수0 | |
[빛과 소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성찬례, “믿나이다.”
한번이라도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가슴이 뜨거워진 경험을 한 적이 있다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걸었던 여정의 세 번째 단계를 이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다시 말해서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나의 마음을 타오르게 한 그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에 더 머무르고 싶은 열망이 샘솟는 체험을 했다면 말이다. 언제 낯선 이를 나의 집에 초대한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했던 수많은 만남을 기억할지언정 그 만남의 대상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던 적은 별로 없다. 최소한의 믿음조차 없다면 누구도 쉽사리 낯선 이를 자신의 집에 초대할 리 만무하다. 그럴 때 인상 깊었던 만남도 추억으로만 회고될 뿐 어떤 깊은 관계로 발전되기란 어렵다. 더욱이 그 만남이 나의 삶에 어떤 결정적인 영향이나 변화를 주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엠마오의 두 제자들도 똑같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낯선 이의 모습으로 동행하던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했기 때문이었다(루카 24,28 참조).
사랑의 관계는 주고받는 행위이다. 아무리 상대방이 나의 마음을 뒤흔들고 뜨겁게 한들 내 편에서의 응답이 없다면 그 만남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초대’의 행위는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 지속하고 심화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순간이 된다. 성찬례 거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미사의 말씀 전례 다음에 이어지는 신앙고백과 예물봉헌의 순간은 이 초대의 행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초대란 나의 내밀한 공간을 타자에게 여는 행위이다. 특별히 주님을 우리의 공간에 초대할 때 그것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말씀 그 자체이신 주님을 맞아들임으로써 나에게조차 숨기고 싶은 부분까지도 열어 보이고 그분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성찬례에서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바로 이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주님, 저의 모든 삶을 당신께 맡깁니다. 저는 당신을 더 이상 낯선 분이 아니라 제 삶의 가장 친밀한 벗이요, 영혼의 동반자로 모시고자 합니다. 제 집에 당신을 모시고 저의 모든 것을 보여드리고 싶사오니 저와 함께 머무소서.” 엠마오의 두 제자의 입장이 그러했다. 그들은 나그네의 모습으로 함께 했던 예수님을 붙들고 용기 있게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루카 24,29). 이 초대로 말미암아 완전히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 곧 만남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자 성찬례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초대의 ‘식탁’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관계에 있어서 가장 친밀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이 식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 구성원이 기쁨과 친교를 나누고 때로 분노와 슬픔을 표현하기도 한다. 같은 식탁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난 전날 제자들과 고별 만찬을 나누시면서 사랑의 성사를 세우셨다. 그리고 바로 이 식탁에서 그분께서는 손님으로 제자들의 집에 들어오셨지만 오히려 주인으로서 당신과 충만한 일치에 이르도록 그들을 다시 초대하셨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신 여러 이야기가 있다. 그 가운데 마르타와 마리아의 일화는 주님께서 어떤 집에 초대받으셨을 때에 결코 ‘손님’으로 머물러 계시지 않으심을 보여준다. 예수님을 ‘손님’으로 대접하고자 분주하기만 했던 마르타의 모습은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그분을 ‘주인’으로 섬겼던 마리아의 태도와 대비를 이룬다(루카 10,38-42 참조).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르타는 마치 나그네를 맞아들이듯 주님을 맞아들였지만, 사실은 종이 주인을, 환자가 구원자를, 피조물이 창조주를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 그러나 저 위에서는 시중드는 것보다 시중 받을 것입니다. 거기서는 여기서 마리아가 택한 것이 성취되고 완성될 것입니다.”
[2017년 1월 15일 연중 제2주일 인천주보 4면, 김기태 사도요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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