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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위령] 제례에 관한 교회 가르침: 효 실천하는 제례, 허용하지만 권장하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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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1-22 조회수5,126 추천수0

[설 특집] 제례에 관한 교회 가르침


효 실천하는 제례, 허용하지만 권장하진 않아

 

 

28일은 우리나라 최대 명절인 설날이다. 가톨릭은 세상을 떠난 조상을 섬기는 예식인 제례(제사와 차례)를 수용한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 역사를 돌아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불러온 것이 바로 제사 문제였다. 제례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살펴보자.

 

 

제례에 관한 교회 가르침

 

가톨릭교회에서 제사 문제가 처음으로 불거진 것은 16세기 중국에서였다. 당시 중국에서 선교하던 선교회들 가운데 예수회는 제사를 조상에 대한 효성을 드러내는 미풍양속으로 여겼지만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미신으로 봤다. 선교회들의 이러한 견해 차이는 제사 논쟁을 촉발했고, 100여 년간 계속된 제사 논쟁은 1715년 클레멘스 11세 교황과 1742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제사를 미신 행위로 여겨 엄하게 금지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이에 따라 신자들은 제사를 지낼 수 없었고, ‘신주’(神主)나 ‘신위’(神位)라고 쓴 위패를 집안에 모실 수 없었다. 

 

교황청의 제사 금지 지침은 18세기 말께 우리나라에도 알려졌다. 유교 문화가 지배하던 당시 조선 사회에 제사를 금한다는 천주교 가르침은 커다란 충격을 안겨줬다. 제사 문제는 결국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는 단초가 됐다. 

 

전라도 진산에 살던 윤지충(바오로, 1759~1791)은 제사를 금하는 교회 가르침에 따라 집에 모시고 있던 신주를 불태워 버렸고, 1791년 5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외사촌 형 권상연(야고보, 1751~1791)과 상의한 끝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천주교식 장례를 치렀다. 당시 사회 규범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두 사람은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수당하고 말았다. 한국 교회 첫 번째 순교자들이 됐고, 2014년 복자로 선포됐다. 

 

제사를 금지하는 교황청 가르침이 바뀌는 데는 20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1939년 교황 비오 12세는 「중국 의식(儀式)에 관한 훈령」을 통해 제사에 대해 관용적 조처를 했다. 제사가 미신이나 우상숭배가 아닌 문화적 풍속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 교회는 이후 시신이나 무덤, 죽은 이의 사진(영정)이나 이름이 적힌 위패 앞에서 절을 하고 향을 피우며 음식 차리는 행위를 허용했다. 제사를 인정한 것이다. 

 

제사에 관한 한국 교회의 공식 입장은 다음과 같다. 

 

“제사의 근본 정신은 선조에게 효를 실천하고, 생명의 존엄성과 뿌리 의식을 깊이 인식하며, 선조의 유지를 따라 진실된 삶을 살아가고, 가족 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이루게 하는 데 있다. 한국 주교회의는 이러한 정신을 이해하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제례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한 사도좌의 결정을 재확인한다.”(「한국천주교 사목지침서」 제134조 1항)

 

“설이나 한가위 등 명절에는 본당 공동체가 미사 전이나 후에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조상에게 대한 효성과 추모의 공동 의식을 거행함이 바람직하다.”(제135조 2항) 

 

주교회의는 2012년 봄 정기총회에서 승인한 ‘한국 천주교 가정 제례 예식’을 통해 제례에 대한 한국 교회 입장을 다시 한 번 밝혔다. 한마디로 허용은 하되 권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국 교회가 허용한 제례는 유교식 조상 제사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에 대한 효성과 추모의 전통 문화를 계승하는 차원에서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한 예식이다. 따라서 제례의 의미가 조상 숭배의 개념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자 가정에서 의무적으로 제례를 지낼 필요는 없다. 신자 가정은 기일 등 선조를 특별히 기억해야 하는 날에는 가정 제례에 우선해 위령 미사를 봉헌한다. 다만 여러 가지 필요로 기일 제사나 명절 차례를 지내야 하는 가정은 ‘한국 천주교 가정 제례 예식’을 기준으로 제례를 지낼 수 있다. 이때 위패에 조상의 이름을 적을 수 있으나 신위(神位)라는 표현은 쓰지 말아야 한다.

 

 

유교에서 제사의 의미

 

제사는 우리 민족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유교(儒敎)에서 출발한 의례다. 가톨릭이 한때 제사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제사가 절대자 하느님이 아닌 조상이라는 별개의 신(神)을 섬긴다는 이유가 컸다. 신주(神主)나 신위(神位)라는 위패를 못 쓰게 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그렇다면 유교의 시조인 공자(孔子)는 신(神)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공자는 귀신이나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렸다.

 

공자는 제자가 귀신 섬기는 것에 대해 묻자 “사람도 섬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고 했고, 죽음이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고 반문했다. 한마디로 공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조선 시대를 지배한 이념은 공자의 유교를 새롭게 해석한 신유학(新儒學), 다른 말로 성리학(性理學)이다. 성리학은 인간의 몸이 기(氣)로 이뤄졌다고 본다. 부모의 기가 하나로 합쳐져 탄생한 인간이 죽으면 기도 자연 속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다만 이 기가 흩어지는 것은 죽는 순간 바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서서히 진행된다. 결국에는 다 흩어지고 마는 기가 제사의 대상이 되는 조상의 혼백(귀신)이다.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남는 영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리학은 유물론에 가깝다. 

 

유교가 제사를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크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도덕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가장 필요한 덕목이 부모와 조상을 섬기는 효(孝)이고, 효의 정신을 나타내고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의례가 바로 제사이기 때문이다. 

 

제사로써 부모와 조상에 대한 고마움을 되새기고 가까운 가족 친지와 혈연의 정을 나누는 분위기가 확산할 때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가정 사목이 모든 사목의 뿌리를 이루며 복음화의 출발점이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제사를 미신이 아닌 미풍양속이라고 해석한 교황청의 판단은 옳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월 22일, 남정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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