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례] 성모 동산의 꽃과 풀들: 성모님의 꽃 이야기를 새로 시작하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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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1-09 | 조회수8,853 | 추천수0 | |
[성모 동산의 꽃과 풀들] 성모님의 꽃 이야기를 새로 시작하며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창세 1,11)
하느님께서는 창조 셋째 날에 이 말씀으로 ‘땅에 씨를 맺는 풀들과 씨 있는 과일나무들을 제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셨다. 이 세상을 지으실 적에 낮과 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데 이어 땅에 서식하는 존재로 가장 먼저 식물을 만드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을 만드시고는 바다와 하늘과 땅의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셨다. 이렇게 식물은 태초부터 사람과 가장 먼저 관계를 맺은 피조물이었다. 하느님의 분부대로 식물은 푸른 싹을 틔웠는데, 그 색깔(풀색, 녹색)이 사람에게 편안하고 안정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식물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씨를 맺기 위해 꽃을 피웠는데, 꽃의 모양새가 아름답고 냄새가 향기로웠다.
식물, 특히 꽃은 유사 이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류와 아주 가깝고도 중요한 관계를 맺어 왔다. 먼저 인류의 생존과 관련해서 그러했다. 또한 문화적으로나 소통의 도구로서도 그림, 건축, 선물, 장식 등 여러 분야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게 그러했다. 그러기에 19세기 미국의 개신교 목사 비처(H. Beecher)의 말마따나, 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뒤 깜빡 잊고 영혼들 안에 넣어 주지 못하신 것들 중에서 가장 달콤한 것’이었다.
문예 부흥기 이전에, 특히 중세 시대에 유럽에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은 주로 성직자, 수도자들이었다. 식물학자도 대부분 그들의 몫이었다. 글을 아는 그들이 식물들, 곧 꽃들과 풀들과 허브들을 조사하고 관찰했으며, 그 식물들의 이름과 온갖 특징들을 정리해서 글로 기록했다. 그런 과정에서 식물들의 이름을 지을 때는 관찰자로서 익숙한 환경, 이를테면 그들의 종교적 또는 신앙적 배경과 한계 안에서 연상되는 의미나 주제를 따서 붙이곤 했다. 학자들뿐만 아니라 신자들 또한 자기들의 주변에서 지천으로 자라는 꽃들이며 풀들을 보면서 신앙적인 이미지들을 쉽사리 떠올려서 연결하곤 했다.
식물 이름 중 특히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것 많아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식물의 이름들 중에는 특히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중세 시대에 이미 수백 종류의 꽃에 성모님과 연관되는 상징적인 이름들이 붙여졌다. 사람들은 이런 꽃들을 ‘성모님의 꽃들’이라고 불렀다. 성모 마리아와 그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삶, 덕행, 신비들을 상징하는 신앙적 의미를 지닌 꽃들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성모님의 꽃들’이 자라는 꽃밭을 ‘성모님의 동산’이라고 일컬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던 1960년대 초반만 해도, 서양의 신자 가정에서는 5월 성모 성월이 되면 성모님을 위한 제대를 꾸미고 저마다 자기 집에서 가꾸는 꽃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로 그 제대를 꾸미곤 했다. 오늘날에는 거의 사라진 전통이지만, 꽃들과 풀들을 보면서 성모님께서 겪으신 고통과 슬픔들, 그분이 누리신 기쁨과 영광들을 기리며 묵상하던 관습은 오늘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유산이다. 우리도 그러한 전통을 돌이켜서 성모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고, 우리 자신의 삶과 연결해 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지난날, 그리스도인들은 키 작고 소박한 제비꽃(바이올렛)을 보면서 ‘성모님의 겸손’을, 희고 향기로운 백합(나리꽃)을 보면서 ‘성모님의 정결’을 떠올렸다. 존자 성 베다는 백합의 흰 꽃잎이 성모님의 흠 없는 육신을, 황금색 꽃술들이 성모님의 고결한 영혼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백합 말고도 희고 백합 비슷하게 생긴 꽃들, 특히 은방울꽃. 은방울수선, 스노드롭 등이 같은 의미를 나타냈다. 한편, 아름답고 향기 좋은 장미를 보면서는 ‘성모님의 영광’을 떠올렸다. 성 도미니코는 묵주기도를 창안할 때 이러한 상징성을 알고 별개의 기도들을 ‘작은 장미 송이’들이라고 불렀다. 또한 꽃잎이 다섯 개인 장미는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장미의 흰색 꽃잎은 그분의 정결을, 빨간색 꽃잎은 그분의 피를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페튜니아를 보면서는 엘리사벳을 찾아가셨을 때 부르신 ‘성모님의 찬송’을, 보라꽃창포를 보면서는 보라색 꽃과 긴 칼처럼 생긴 이파리에서 ‘성모님의 고통’을, 매리골드를 보면서는 ‘성모님의 고결하심’을 연상했다. 그런 그들이 보기에 클레마티스는 성모님께서 집안일을 하시는 짬짬이 쉬시던 그늘이었고, 무리 지어 자라는 라벤더는 성모님께서 빨래를 널어 말리시던 풀이었다.
피어나는 꽃들 보며 성모님의 믿음, 생애 묵상
그런가 하면 봄부터 서리가 내릴 때까지 오래도록 꽃이 피는 개봉숭아는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베푸시는 ‘사랑’을, 꽃이 눈물방울과 비슷하게 생긴 제비고깔꽃은 성모님께서 십자가 아래에서 흘리신 ‘눈물’을 상징했다. 꽃의 중심 부분이 황금색 눈[目]처럼 생긴 물망초는 하늘에서 우리를 굽어보시는 ‘성모님의 눈’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양귀비의 붉은 꽃은 ‘그리스도의 피’로, 그래서 양귀비는 구세주의 핏방울이 떨어진 십자가 아래에서 싹이 나와서 자란 것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그리고 아침의 태양처럼 빛나는 꽃인 황금색 금잔화는 성모님께서 하늘에 오르시어 누리시는 ‘고귀함’을 상징했다. 먼동이 트듯 나타나신 성모님은 달과 같이 아름다우시며 해와 같이 빛나시는 여인이시라 여겼기 때문이다. 파란색 나팔꽃은 그 색깔 때문에 ‘성모님의 망토’라고 불렸다. 성모님은 지금도 그 파란 망토로 도움을 구하고 바라는 우리를 감싸 주시고 또한 모든 위험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이제부터 이렇듯 무려 40만 가지라고 하는 많은 꽃들 중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밀접하게 들어와 있거나 가까이 다가옴직한 꽃과 식물들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성모님의 동산에서 자라고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서 성모님의 믿음 충만한 생애, 탁월한 덕행, 구세주와 함께하신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게 될 것이다.
꽃 한 송이를 보면서도 성모님을 떠올리며 그분의 삶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향기로우며, 그래서 행복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런 꽃 이야기들이 우리를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모님과 함께 하늘나라를 행해 여행하도록 이끌어 주기를 기대한다.
(성모님과 관련된 꽃과 식물의 이름들이 서양에서는 성모님을 지칭하는 여러 단어들, 예컨대 ‘St. Mary, Our Lady, Madonna’ 등과 더불어 구성되었는데, 편의상 그리고 혼란을 없애기 위해서 이 어휘들을 이 글에서는 대부분 ‘성모님’으로 옮겼음을 밝혀 둔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1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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