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미사] 전례의 숲: 새 로마 미사 경본 한국어 번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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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3-07 | 조회수6,056 | 추천수0 | |
[전례의 숲] 새 “로마 미사 경본” 한국어 번역
우리말 새 “로마 미사 경본”은 원문에서 새로 넣은 기도문들과 성인 전례문들, 새로 가다듬은 예식들은 번역하고 다듬었으며, 이미 있던 기도문들을 원문에 견주어 우리말 어법과 표현법에 더 어울리게 고쳤습니다.
사제(신부와 주교)나 부제의 인사에 교우들이 하는 응답 “또한 사제와 함께”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인사와 응답은 미사 시작 때 말고도 복음 선포, 감사송 시작 대화, 평화의 인사, 마침 예식에 있습니다.
번역이 바뀐 이유는 라틴어 원문(Et cum spiritu tuo)을 더 정확하게 옮기기 위해서입니다. 이 응답은 매우 오래된 표현으로서(3세기 초 “사도전승”) 초기 교회부터 동방과 서방 전례에서 써 왔습니다. 현대 언어들도 대부분 “영”을 넣어 번역하였습니다.
사도좌 지침은 말합니다. “전체 또는 대부분의 고대 교회 유산에 속하는 어떤 표현들은 인류의 보편 유산이 된 다른 표현들과 마찬가지로 되도록 문자 그대로 번역하여 존중해야 한다. 예를 들면, 교우들의 응답 ‘또한 당신의 영과 함께’”(올바른 전례 56).
“영”을 넣음으로써 이 표현이 성경에서 온 사실이 더 분명해졌습니다. 이 구절은 바오로 사도의 편지 마지막 인사에(갈라 6, 18, 2티토 4, 22) 뿌리가 있습니다. 다만 사도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영”(πνεύματος)은 당시 낯익은 표현으로 사람 전체를 가리킵니다. 편지를 받는 “그대” 또는 “여러분”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지 그 사람의 어떤 부분이나 차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여 영과 물질, 영혼과 몸을 구분하는 이원론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사제는 영적이고 회중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이 인사와 응답은 특히 로마 전례에서는 서품 받은 성직자(사제와 부제)와 교우들 사이에서 사용합니다. 성직자와 교우들은 인사를 주고받으며 하느님의 영이 활동하심을 깨닫고 기원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영”이란 낱말이 성직자가 서품 때 받은 영 또는 은사를 가리킨다고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교우들의 응답은 미사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성직자의 영적 은사를 기억시킨다고 하겠습니다.
“사제의 영과 함께” 미사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성직자의 영적 은사 기억
다만 우리말로 왜 “사제”로 옮겼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원문에도 “당신”으로 나오고, 다른 나라 번역에도 모두 “당신”으로 옮깁니다. “사제”라는 직무를 사용하면 대화에서 친밀한 느낌, 직접적인 느낌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2인칭 “당신”이 봉사자에 대한 존대를 적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미사 경본 노랫말과 성경에서는 주 하느님을 2인칭 “당신”이라고 부릅니다. 미사에서 봉사자와 신자의 직무는 구분되지만 모두 주님 안에 하나가 되어 제사를 봉헌하고 잔치에 참여합니다. 한편, 부제에게 하는 응답을 구분하였는데 조금 번거롭습니다.
또 하나 돋보이는 변화는 감사기도 축성문에서 “모든 이를 위하여”를 “많은 이를 위하여”로 바꾼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pro multis) 흘릴 피다.” 하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번역 과정에서 많은 관심과 논쟁을 일으켰지만 대부분의 언어권에서 사도좌의 지침에 따라 “많은 이를 위하여”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몇 주교회의들은 이 번역과 관련하여 아직도 교황청과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몇 사람이나 많은 사람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은 분명합니다. 성경과(요한 11, 52; 2코린 5, 14-15; 티토 2, 11; 1요한 2, 2) 교회 가르침도(교리서 624, 629) 그렇게 확인합니다. 미사에서도 (가톨릭 신자만이 아니라) 죽은 모든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왜 바꾸었을까? 네 가지 이유를 듭니다(아린체 추기경). 첫째, 성경에 그렇게 나옵니다. 이 부분이 나오는 복음 구절(마태오 26, 28; 마르 14, 24)은 이사야 53, 11-12를 암시하며 “많은 이”라고 표현합니다. 현대 성경 번역들도 “많은 이를 위하여”로 옮깁니다. 둘째 로마 교회에서 고대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축성 때 “많은 이를 위하여”(pro multis)로 기도하였습니다. 셋째, 동방 교회들의 감사기도문에서도 해당 언어로 모두 “많은 이를 위하여”로 표기합니다. 마지막으로 신학적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이를 위하여” 이루신 구원에 모든 이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이 자신의 의지나 참여 없이 기계적인 방식으로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자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번역할 때 교회 내 다양한 목소리 들어야
새 번역에서 아쉬움이 없지 않습니다. 한자어 또는 어려운 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보기를 들면 주님 탄생 팔일 축제의 마지막 날(1월1일)에 지내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Sanctae Dei Genetricis Mariae)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성 마리아”로 하면 더 쉽고 분명합니다. 실제로 우리 미사 경본의 모든 감사기도문과 다른 기도문들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번역하고 있습니다(1양식만 “천주의 어머니”).
또 “거룩한 이름”을 “성명”으로 옮긴 것도 어색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명”(1월3일),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 성명”(9월12일), 두 기념은 신심 미사에도 실려 있습니다. “성명”을 “거룩한 이름”으로 알아듣기 쉽지 않고, 더구나 “성”과 앞에 나온 “(지극히) 거룩하신”은 같은 말의 되풀이입니다. 그리고 모호하고 어려운 말이고 신학적 문제가 있는 “위령”이란 말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번역에는 “위령 감사송”을 제외하고 위령 앞에 “죽은 이를 위한”을 붙였지만 조금 궁색해 보입니다.
나아가 가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감사기도 3양식에서 “그분께서”(Ipse)를 “그리스도 몸소”로 옮기어 성령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또 감사기도들에서 “주님” 또는 “하느님”을 자주 “아버지”로 옮기고, 어떤 때는 “하느님”을 빼기도 하였습니다. 그밖에 신학과 전통과 언어 차원에서 중요한 낱말이나 표현들을 빼거나 뭉뚱그려 옮긴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직역을 하였으면 좋았을 표현들도 꽤 있습니다. 보기를 들면, 2양식 성령 청원에 나오는 “성령의 힘으로”는 원문에는 “성령의 이슬로”(Spiritus tui rore)입니다. 이슬은 자연과 성경의 상징이 결합한 독특한 낱말로서 새로움, 생명, 은총, 강복을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또 거양성체에 있는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들” 표현은 묵시록(19, 9)에 나오는 천사의 말로 원문에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입니다. 미사의 종말론 차원을 힘차게 표현합니다.
교정이 필요한 곳도 있습니다, 주님 수난 금요일 예식의 영성체 전 기도에서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이” 구절은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심”(Perceptio Corporis tui)입니다. 이날에는 전날 미리 축성한 성체만 모시기 때문에 성혈은 모실 수 없습니다. 또 연중 시기 마지막 주일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예수 주 그리스도”(D. N. I. C. UNIVERSORUM REGIS) 대축일입니다. “임금”이 있는데 “왕”을 또 넣었습니다. 원문에 “임금”은 한 번 나옵니다. 그리고 모든 성인 대축일 감사송에서 중심 부분 마지막 문장 “그들의 모범은 나약한 저희에게 힘이 되나이다.”는 앞에 나온 “나약한 저희도 … 모범으로 힘을 얻어”의 되풀이로 보입니다.
번역 원칙이 바뀌었는데도(2001 올바른 전례), 주교회의 결정에 따라, 미사 통상문과 감사기도문들은 거의 손대지 않았습니다. 고칠 수 있는 황금 기회를 놓친 셈입니다. 다음에 미사 경본 개정판을 낼 때에는 주교회의가 마음을 더 열기를 기대합니다. 아울러 교회 안의 여러 목소리들을 수 있는 길도 더 적극적으로 열어야 할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3월호, 심규재 실베스텔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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