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례] 전례의 숲: 성체 경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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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5-05 | 조회수5,139 | 추천수1 | |
[전례의 숲] 성체 경배
성체 공경의 역사는 거의 미사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초대 교회부터 미사 뒤에 성체를 보관하여 미사에 참여할 수 없는 병자나 임종하는 교우들에게 분배해 주었습니다. 이들도 영성체로 주님과 일치할 수 있게 하려는 배려였습니다. 보관된 성체는 마땅히 소중하게 다루었습니다. 이렇게 성체 보관과 미사 밖 영성체는 이미 성체 공경의 한 형태였습니다.
중세에 성체에 대한 특별한 공경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미사에서 축성의 말씀 뒤에 성체를 들어 보이는 예식도 생겼습니다. 나아가 성체를 바라보는 것은 영성체와 같은 효과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 뿌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신심입니다.
이 신심은 축성된 성체를 눈으로 직접 보려는 바람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축성된 성체를 보는 것은 눈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직접 보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미사 밖 성체 공경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수도회의 덕택으로 널리 퍼졌습니다(A. 아담). 성체 기적이 계기가 되어 1264년 성체 축일이(Corpus Domini) 제정되었고, 뒤이어 차츰 미사 밖 성체 행렬, 성체 현시, 성체 기도와 성가, 강복 관습이 생겼습니다.
성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미사 안에 계시는 분과 다르지 않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같은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미사 밖에서도 성체 안에 계시며 계속하여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성체 공경에서는 예수님께 집중하면서 미사에서 말할 수 없었고 행할 수 없던 것들을 이제 더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성체 경배(성체 조배)는 미사에서 시작되고 교우들을 미사로 이끕니다. 따라서 올바른 미사 참여는 참된 성체 경배에 자양분을 주고, 올바른 성체 경배는 결실 있는 미사 참여를 촉진합니다. 성체를 경배할 줄 아는 이는 미사에 충실히 참여하고, 미사에 제대로 참여하는 이는 미사 밖에서도 성체를 경배할 줄 압니다. 성체 경배는 열심히 하면서 미사 참여는 소홀히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체 경배는 전례 전체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성체 공경 예식에는 전례시기를 존중하며 기도와 성가 따위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성체 예식서 79).
성체 경배에서 신비한 방식으로 주님 만나
성체를 모신 감실 앞에서 누구나 경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체 보관을 하고 있는 성당이나 경당에서는 공적으로 성체를 현시하고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다만 미사를 거행하는 동안에는 현시를 할 수 없습니다.
현시는 성체를 성합이나 성광에 넣어 제대 가운데 모셔놓고 장엄하게 기도하는 방식입니다. 현시 끝에는 보통 성체 강복을 합니다. 현시와 강복은 사제나 부제가 합니다. 이들이 없을 때에는 시종이나 성체분배 권한을 받은 이가, 수도공동체와 평신도 성체 공경 단체에서는 지역 직권자가 지정한 그 공동체의 남녀 회원이 성체를 현시하고 감실로 다시 모실 수 있습니다(성체 예식서 91). 그러나 이들은 강복은 할 수 없습니다. 성체 현시 말고도 성체 행렬과 성체 대회와 같은 장엄한 성체 공경 방식들이 있습니다.
성체 경배는 훌륭한 관상 기도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교황은 성체 경배에 관하여 자신의 체험을 말합니다. “우리 시대에 성체 앞에서 드리는 기도는 특별한 독특하고 중요한 가치를 지닌 기도 방식입니다. 성체 경배는 사랑받은 제자처럼 그분 가슴에 기대어 그분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그분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끝없는 사랑을 맛보는 기도입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 앞에서 체험하는 영적인 대화, 침묵 속의 경배, 사랑의 동작입니다.”
성체 경배에서 신비한 방식으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은 빵의 모습으로 성체 안에서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신학 용어로는 “현존”이라는 말을 씁니다. “현존”이란 말은 함께 있는 이들 사이에 있는 관계를 가리킵니다. 주님의 현존은 주님께서 신비스럽게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몸으로 함께 있어도 영으로는 함께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도 함께 있을 수 있고, 자신의 일이나 이익, 즐김이나 욕심에 바탕을 두고 함께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현존은 우리가 그분 앞에 몸과 영으로 현존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만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분의 현존은 살아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방송을 듣거나 볼 때 주파수를 맞추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체 경배 방법 중 하느님 말씀 듣는 것이 첫 자리
이렇게 성체 앞에서 기도할 때는 무엇보다 자신이 지금 여기 계시는 예수님 앞에 있음을 마음에 새기고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자각은 자연스럽게 정성스런 동작이나 경건한 자세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특히 정성을 다하여 허리를 굽히거나 무릎을 꿇는 자세는 경배에 덧붙이는 자세입니다.
성체 경배 방법 가운데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이 첫 자리를 차지합니다. 성체의 식탁은 말씀의 식탁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엠마오 제자들처럼 우리들은 말씀을 들을 때 감동하고 빵을 쪼갤 때 그분을 알아 뵙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영의 눈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에는 그 말씀을 묵상하고 풀이하는 교회의 목소리로 이어집니다. 여기에는 세상의 목소리, 곧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신음과 위로가 담겨 있습니다. 교회는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 소외된 이들, 불의에 짓눌리는 이들, 희망을 잃고 있는 이들, 무엇보다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성체 경배는 성체가 그렇듯이 애덕과 연대의 정감이 솟아나는 샘입니다. 성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믿음 안에서 자신이 모든 종류의 분리 장벽이 무너진 세상의 시민임을 깨닫습니다.
감사와 찬양은 미사의 핵심이지만 성체 경배에서도 중심을 이룹니다. 감사와 찬양은 무엇보다 주님께서 이루신 그 큰일들을 보고 놀라는데서 흘러나옵니다. 놀라움! 이 놀라움이 무상으로 받은 선물에 대한 사심 없는 찬양과 감사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생명과 살아 있음, 계속하여 손을 잡고 이끌어 주심, 가족, 친구들 모두 하느님께 받은 선물들입니다. 감사드릴 것들을 헤아리다 보면 끝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체 성사가 하느님께서 세상에 주신 가장 큰 선물임을 깨닫고 다른 이들에게 외치게 됩니다. “숨 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라!(시편 150, 6)”
감사와 찬양에 청원의 옷을 입힐 수 있습니다. 내가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주님께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말씀드릴 수 있고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을 성찰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나의 전구 기도가 필요한 이들이 많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현시 때를 포함하여 성체 앞에서 시간전례(성무일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또한 묵주기도를 바칠 수도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성모님의 눈과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상입니다. 내가 관상하는 예수님은 지금 실제로 앞에 계십니다. 환희의 신비에서 성모님이 잉태하신 예수님이 지금 앞에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때 태중에 계신 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분이 바로 앞에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성체 경배에서 어느 정도 침묵을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보다 침묵 안에서 기꺼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이 활동을 멈추고 온갖 생각들이 힘을 잃으면 고요가 깊어집니다. 거기서 성령께서 활동하시고, 안 계시는 듯 여겨지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임마누엘)이 드러납니다. 물속에 잠기듯이 그분 품에 안겨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침묵은 이렇게 내면의 기도를 돕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들의 기도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5월호, 심규재 실베스텔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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