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축일] 성체 성혈 대축일 기획: 성체와 성체조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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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6 | 조회수7,295 | 추천수0 | |
[성체 성혈 대축일 기획] 성체와 성체조배
교회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면서 성체성사의 위대한 신비를 기념하고 특별히 성체와 성혈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공경한다. 대축일을 맞아 다른 그리스도교가 성체를 대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성체 신심을 돌아보고, 성체 신심의 대표적 표현인 ‘성체조배’에 대해 알아본다.
누룩 없는 빵 ‘성체’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교회는 가톨릭교회만이 아니다. 정교회와 성공회도 성체성사를 거행하지만, 가톨릭교회와는 다소 다른 면을 보인다. 가톨릭교회와 다른 그리스도교회가 성체를 대하는 모습을 비교하면서 성체에 관한 교리를 되짚어보면 어떨까.
정교회에서 성체로 축성하는 프로스포라(Prosphore)는 누룩이 들어간 빵이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라틴 교회의 옛 전통에 따라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여야 한다”(교회법 926항)고 규정하고 있다.
누룩의 유무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찬례를 제정한 것이 파스카 축제일에 일어났는지 아닌지에 관한 견해 차이에서 온다. 파스카 축제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것을 기념하는 날로, 이날 유다인들은 누룩 없는 빵을 먹었다. 가톨릭교회는 성찬례 제정, 즉 최후의 만찬이 파스카 축제일에 행해진 것으로 본다.
교회가 누룩 없는 빵을 성체로 축성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의 만찬을 재현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바로 성체성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완성된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부들은 전례헌장을 통해 성체성사를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어, 마음을 은총으로 가득 채우고 우리가 미래 영광의 보증을 받는 파스카 잔치”(47항)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이 성체성사를 통해 마치 이집트를 탈출할 때 어린 양을 바친 것처럼,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기억한다.
- 정교회의 성체빵. 출처 한국정교회 성바울로성당.
또한 그리스도는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이는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처럼 하느님께 순명하여 온전히 자신을 바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성공회는 가톨릭교회와 마찬가지로 성체성사에서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한다. 하지만 성체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성체성사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고 있음’은 가르치지만, ‘성체’ 그 자체를 강조하지는 않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가 미사의 희생제사 안에서 “집전자의 인격 안에 현존하시고, 또한 특히 성체의 형상들 아래 현존”(전례헌장 7항)한다고 가르친다.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년)는 ‘성체성사에 관한 교령’을 통해 성체와 성혈의 성변화에 관해 밝힌 바 있다. 이 교령을 통해 교회는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빵의 형상으로 바치신 것이 참으로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교회에서는 항상 이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면서 “빵과 포도주의 축성으로 빵의 온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포도주의 온 실체가 그분의 피의 실체로 변한다”고 선언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빵의 모습은 형태에 불과하고, 그 실체는 빵이 아닌 인성과 신성을 모두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성체 신비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리스도를 성사적으로 현존하게 하므로, 마땅히 감사와 공경을 드려야 한다”면서 “이 공경은 우리가 성당을 찾을 때든 병자 영성체가 이루어질 때든, 우리가 성체를 만나는 모든 순간에 언제나 두드러져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거룩한 시간 ‘성체조배’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 성당. 미사 시간도 아니지만, 신자들이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다. 어떤 신자는 서서, 어떤 신자는 무릎을 꿇고, 어떤 신자는 기도의자를 사용하는 등 모습은 제각각이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성광에 모셔진 성체 한 곳에 모여 있다. 바로 성체 앞에서 기도하는 신심행위, 성체조배의 모습이다.
성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믿고 공경하는 교회는 성체 앞에서 기도하는 성체조배의 전통을 중요하게 여겨왔다.
구속주회 창설자이자 교회학자인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성인은 “성체조배로 보낸 시간은 일생 중 가장 귀하고 유익한 시간”이라며 “15분간의 성체조배로 얻은 것은 24시간 동안 다른 신심 행위들로 거둔 것보다 훨씬 클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교회가 이렇게 성체조배를 강조하는 이유는 성체조배가 신자들이 그리스도 앞에 직접 나아가 그리스도의 현존을 더욱 긴밀하게 느끼고 일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사 중 거행된 성체성사가 공동체적인 만남이자 성사였다면, 성체조배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며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하느님과의 개인적·인격적인 만남의 시간이다.
복자 바오로 6세 교황은 회칙 「신앙의 신비」를 통해 “조배는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 그리스도께 대한 합당한 흠숭의 실천, 감사의 뚜렷한 표시, 사랑의 모정”이라고 밝혔다. 또 성체조배는 “성체 안의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하는 것”이라면서 “지상에서 이보다 더 큰 위안이 없으며 성스러움으로 나아가는데 이보다 더 큰 효력은 없다”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성체 앞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더 깊이 느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침묵 유지’다.
이 침묵은 단순히 소리를 내지 않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의 저서 「가르멜의 산길」에서 하느님과의 신비적인 일치에 이르기 위해 외적·내적 침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내적 침묵을 지키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기도문을 소리 내지 않고 외우면서 잡념을 없애거나 하느님과 자유로운 형태로 대화하며 친교를 나누는 방법은 누구나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다. 또 내적 침묵은 모든 인간적인 사고를 멈춘 채 오직 하느님께 매료되는 ‘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신자들의 성체 신심을 올바로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도직단체가 실천하는 방법을 따라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국천주교지속적인성체조배회’는 ▲ 경건한 마음으로 침묵을 유지하고 ▲ 조배에 앞서 주님께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며 ▲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마태 26,40)”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적어도 1시간 이상 조배할 것을 권고한다.
한국천주교지속적인성체조배회 김명관(안셀모) 회장은 “묵상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깨달으면 이를 이웃에게도 나눌 수 있게 되는 것 같다”며 “더 많은 신자들이 성체조배를 하면 좋겠다”고 밝혔다.
[가톨릭신문, 2018년 6월 3일, 이소영 · 이승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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