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례] 전례 톡톡: 영성체 성가가 분심을 일으키다니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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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7-31 | 조회수6,650 | 추천수0 | |
[전례 톡톡] 영성체 성가가 분심을 일으키다니요
미사 중 영성체 때 성가는 왜 부르는 거죠? 줄 서서 행렬을 따라 나아가다 보면 점점 묵상도 안 되는데 말이죠. - 바리에서 디에고 형제 -
대다수 그리스도인들, 특히 젊은이들은 이제 영성체 행렬에서 성가를 부르는 걸 자연스러운 일로 여깁니다. 예식에 노래가 없다면 예식이 지닌 매력과 기쁨을 잃을 지도 몰라요. 노래하란 말이 없는 곳은 오직 장례 행렬뿐이죠. 그런데 독자께서는 영성체와 노래를 동시에 못한다는 사실 외에도, 영성체 성가가 내적 묵상을 방해하기 때문에 문제라고 보시는군요.
어르신들의 불편
그런 고민 덕분에 우리는 많은 어르신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립니다. 또한 주님을 모시기 위해서 고해성사 뿐 아니라 기도문이나 화살기도로 내적 외적 준비를 해야한다고 교리 시간에 배운 내용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런 한 예로 아직도 현재 어떤 지역에서는 어린이 첫영성체 때 영성체 전후로 신덕송과 애덕송을 바치도록 계속 가르치고 있죠. 사실 옛날에는 영성체를 일반적으로 미사 밖에서 했어요. 성혈을 모시는 건 절대로 안 되고 그리스도의 몸만 모셨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으로 영성체 예식이 원래 자리인 미사 안으로 들어왔어요. 공동체의 신앙 자세와 감수성이 잘 표현된 하나의 예식서로 삽입됐답니다. 공동체가 주님의 식탁에 나아가 생명의 빵을 먹고 구원의 잔을 마시는 거죠. 실제로 많은 경우에 성혈도 영합니다. 따라서 영성체 준비란 미사를 잘 준비하는 것인 셈입니다.
독자께서 예로 드신 묵상 중심의 개인적 준비 방식은 영성체 예식에 통합돼 있건 생략됐건 아무튼 경본에는 나와 있지 않아요. 공의회의 『전례 헌장』(Sacrosanctum concilium)은 영성체가 ‘신자들이 같은 희생 제사에서 주님의 몸(과 그분의 피)를 받아 모시는 더욱 완전한 미사 참여’(55항)라고 선언해요. 이렇게 영성체 예식이 변화됐으니 사고 방식도 그에 맞게 바뀌어야겠죠. 그렇게 되지 않다면, 영성체 성가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다 문제가 되고 불편과 불만도 커질 거예요.
영성체 예식 전체의 특징은 뭐니뭐니해도 형제적 공동체성이며, 또 기쁨과 축제의 표현이고 같은 식탁에서 형제들과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친교랍니다. 주님의 기도는 당연히 원래부터 영성체 준비 기도로 여겨져 왔어요.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두 가지 청원 때문이죠. 양식을 청함은 무엇보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필요한 빵, 곧 성체를 가리킵니다.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행위 안에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일도 포함돼 있지요. 그렇게 해야 화해가 하느님과, 또 이웃과 이루어지는 거죠.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것도 형제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화해를 구체적이고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표시에요. 암브로시오 전례의 빵 쪼갬 노래와 로마 전례의 빵을 쪼갤 때 부르는 ‘하느님의 어린양’은 영성체를 물질적으로도 준비하면서 기쁨도 고조시키죠. 행렬이 제대로 나아가며 부르는 영성체 성가가 특히 이를 잘 표현합니다.
시편 선택
행렬할 때 부르는 노래가 셋 있는데 입당 성가, 봉헌 성가 그리고 영성체 성가죠. 여기서 가장 오래된 것은 영성체 성가에요. 동서방 교회의 거룩한 주교들과 박사들도 이 성가는 알고 있었어요. 노래 부르는 방법은 다양했지요. 전체 백성이 다같이 부르든지, 아니면 합창대가 부르고 백성은 후렴을 반복하든지, 아니면 하나나 두 합창대가 부르든가 했어요. 성가 가사를 뭘로 할지 고대 교회에선 그런 건 생각할 필요도 없었어요. 시편을 선택했으니까요. 특히 시편 145편은 회중이 행렬하면서 다음의 후렴구를 노래했죠.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오면, 먹을 것을 제 때에 주시나이다.” 또 시편 34편도 다음과 같이 후렴구로 불렀죠.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복되다 그 님께 몸을 숨기는 사람이여.” 하지만 파스카 성야에서 신영세자들인 성인들과 어린이들의 첫영성체 때는 시편 23편 주님은 나의 목자를 불렀어요. 거기에 나오는 ‘내 원수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내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외다’라는 구절 때문이에요. 이 시편의 의도는 성찬의 식탁에 초점을 맞추고 참여자들의 일치를 돕는 거지, 중세 이래 죽 행해졌듯이 이단자들과 싸우는 호교적인 이유로 그리스도의 참된 현존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랍니다.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믿음은 각자가 ‘아멘’하고 응답하면서 표현되죠.
형제애와 기쁨의 표징
로마 미사 경본은 성가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어요. “사제가 성체를 모실 때 영성체 노래를 시작한다. 한목소리로 부르는 이 노래는 영성체하는 이들의 영적인 일치를 드러내고, 마음의 기쁨을 표시하며, 영성체 행렬의 공동체 특성을 더욱더 밝혀 준다. 이 노래는 신자들에게 성체를 나누어 주는 동안 계속하여 부른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86항).
성가를 선택하고 부를 때에 많은 주의가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전례서에 나오는 성가들이나 주교회의 인준을 받은 곡들 중에서 골라 써야겠지요. ‘성체 분배가 끝나면, 필요에 따라 사제와 신자들은 잠깐 속으로 기도를 바친다’(88항)라고 미사 경본에 씌어진 대로 잠깐의 침묵과 묵상 시간도 갖지 마라는 건 절대 아니에요. 결론적으로, 개인적인 묵상과 공동체 행위의 참여라는 이중의 요구를 잘 조화시킨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다는 말씀입니다.
(R. Falsini, La liturgia. Risposta alle domande più provocatorie, San Paolo, Cinisello Balsamo 1998, 50-53)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7년 겨울호(Vol. 40), 번역 최종근 파코미오 원장수사(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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