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례] 그리스도인의 희망과 기다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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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12-23 | 조회수6,740 | 추천수0 | |
[전례 생활] 그리스도인의 희망과 기다림
한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달에 우리는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대림 시기를 맞이한다. 대림 시기를 ‘희망과 기다림의 시기’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시기에 무엇을 희망하고 기다리는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 가운데 오시지 않았는가? 새로움과 설렘 없이 지난날의 사건에 대한 해묵은 기억처럼 대림 시기를 맞이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시기의 전례 거행의 정신에 비추어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언제나 간직해야 할 ‘희망’과 ‘기다림’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대림 시기의 두 가지 성격
대림 시기는 주님의 오심을 기념하고 간구하며 기다리는 시기이다. 우리는 흔히 대림 시기를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려는 준비의 시간으로만 생각하지만 이 시기의 전례 기도문은 우리에게 주님의 다시 오심, 곧 재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희망과 기다림을 상기시켜 준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대림 감사송 1).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의 신비에 속한다. 여기서 하느님과 인간의 결정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구원의 역사는 이 결정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기까지 기다림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의 기다림에 앞서 하느님의 기다림이 먼저 있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고 그분의 오심을 간청하기 훨씬 전부터 하느님께서는 오랜 기다림 속에서 우리 인간과의 놀라운 만남을 준비하셨다.
대림 시기에 주님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간절한 기다림을 기억하고 그 크신 사랑에 대한 감사와 찬미의 마음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이천 년 전 가장 가난하고 낮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맞이했던 베들레헴의 구유처럼, 대림 시기를 보내면서 우리 안에 그분이 머무르실 자리를 겸손히 마련할 필요가 있다.
한편 대림 시기를 ‘기다림의 시기’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의 두 번째 오심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곧 세상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영광과 위엄 중에 다시 오실 날을 희망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대림 시기의 ‘기다림’은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인 희망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은 희망하며 기다리는 존재이다. 바오로 사도는 현세의 고난을 넘어서 이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초대하였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18-25).
대림 시기의 미사에서 교회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이 희망을 상기시켜 준다. 그리고 깨어 기다리는 자세로 이 희망을 잃지 않고 살도록 하느님께 간구한다.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 백성이 다시 오실 외아드님을 깨어 기다리오니 구세주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저희가 등불을 밝혀 들고 깨어 있다가 그분을 맞이하게 하소서”(대림 제2주간 금요일 본기도).
“주님, 이 성찬에 참여한 저희가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를 살면서도, 지금부터 천상 양식에 맛들여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대림 시기 제1주일 영성체 후 기도). 그리스도인은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미련을 두지 않고 영원한 것을 지향하며 사는 존재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늘 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과도 같기 때문이다. 미사에서 주어지는 천상 양식인 하느님 말씀과 주님의 성체는 우리가 이 여정을 잘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 의장으로 활동하다 2002년 9월 16일 오랜 암 투병 끝에 하느님 품으로 떠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구엔 반 투안 추기경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희망과 기다림을 삶으로 보여 준 분이었다. 그는 2000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비롯한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들 앞에서 행한 사순 피정에서 ‘희망’이란 주제로 자신의 삶과 신앙에 관한 아름다운 증언을 들려주었다.
베트남이 공산화된 뒤 당시 사이공의 부주교였던 반 투안 주교는 1975년 성모 승천 대축일에 체포되어 무려 13년이란 긴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는데, 그 가운데 초기 9년은 독방에 갇혀 지내야만 했다. 언제 풀려날지 알 수 없는 극도의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에게 ‘기다림’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수감생활 초기에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을 견디기가 더 힘들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무엇보다 목자 잃은 양떼와 같았던 사랑하는 신자들과 교회 공동체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생각할 때 견딜 수 없는 슬픔과 괴로움에 휩싸이곤 했다. 당시 8년의 사목 경험을 가진 젊은 주교로서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시작하고 꿈꿨던 자신의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온 주님의 음성이 그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왜 그렇게 근심하느냐? 너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을 구분해야만 한다. 네가 이루었고 계속해서 하기를 바라는 모든 것은 훌륭한 일이고 하느님의 일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은 아니란다. 하느님께서 네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길 바라신다면 곧바로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하느님을 믿어라! 네가 선택한 것은 하느님이지 하느님의 일이 아니다!”
이 내면의 빛은 그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는 이 체험을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살고자 다짐했던 자신의 첫 마음을 성숙시키는 기회로 삼았다. 그리하여 순간순간을 온 사랑을 담아 자기 생애의 마지막 순간처럼 살기로 굳게 결심한다.
“나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사랑으로 채우면서 살리라.” 하지만 감방의 고립된 환경 속에서 이 결심을 유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13년이라는 오랜 수감 생활 동안 반 투안 주교를 영적으로 지탱시켜 준 두 가지 중요한 실천이 있다.
첫 번째 실천은 자신이 기억하는 성경 말씀을 감옥의 땅바닥에 써 놓고 깊은 관상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곧 날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한 구절의 성경 말씀을 되뇌며 하루 종일 그 의미를 곱씹고 또 곱씹은 것이다. 이 꾸준한 실천을 통해서 그는 자기 삶의 영원한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은 기도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얻는다.
또 하나의 실천은 날마다 세 방울의 포도주와 한 방울의 물을 손바닥에 올려 놓고 미사를 거행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의 제대였고 주교좌성당이었다. 그는 뒷날 감옥에서 봉헌했던 이 가난하고 소박한 미사가 자기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미사였다고 회고했다. 미사에서 이루어지는 주님과의 일치는 그의 삶의 유일한 희망의 근거였다. “성체성사는 내 안에서 날마다 거행되는 그리스도의 탄생이며 그분과의 깊은 일치의 표현이자 내 힘과 삶의 원천입니다.”
반 투안 추기경의 이 감동적인 일화는 그리스도인 신앙생활의 중심인 말씀과 성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 우리에게도 종종 삶이 감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반 투안 추기경의 모범을 기억하고 하느님 말씀과 성체성사의 은총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연습을 해 보자. 대림 시기를 보내면서 어떠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사는 기쁨이 모든 신자의 마음속에 솟아나길 두 손 모아 기도드린다.
* 한 해 동안 ‘전례 생활’을 집필해 주신 김기태 신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 김기태 사도 요한 - 인천교구 신부.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총무. 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전례학을 가르치고 있다.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8년 12월호, 김기태 사도 요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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