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례] 성모동산의 꽃과 풀들: 시핑크는 성모님의 방석, 금어초는 아기 예수님의 신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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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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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01-06 | 조회수6,929 | 추천수0 | |
[성모동산의 꽃과 풀들] 시핑크는 성모님의 방석, 금어초는 아기 예수님의 신발
성모님의 방석이라 불린 시핑크
소금기 많고 건조한 바닷가 황무지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이름에는 흔히 그 첫머리에 ‘갯’ 자가 들어간다. 그 중에 갯질경이과 식물이 있다. 갯질경이과 식물은 10여 개 속(屬)의 풀과 관목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 세계 곳곳의 바닷가에서 자란다. 그리고 그 중에서 몇몇 종류는 원예용 또는 관상용으로 사랑받는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유럽 원산의 재래품종들이 개량되어 널리 재배된다.
여러해살이 늘푸른식물인 시핑크는 가늘고 기름한 끈 모양의 잎들이 지표면 가까이에 도톰하고 다보록하게 뭉쳐서 자란다. 그리고 거기에서 10∼15cm 정도의 꽃줄기들이 솟아오른 다음 그 끝에서 주로 밝은 분홍색의 잔 꽃들이 둥글게 모여 달린 형태로 핀다. 더러는 연한 자주색과 흰색 등의 꽃들도 있다.
이 식물과 관련해서 교회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헤로데 왕은 베들레헴과 그 일대의 어린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은 어린 예수님을 데리고 황망히 이집트로 피난길을 떠나셔야만 했다. 성 요셉은 예수님을 품에 안으신 성모님을 나귀 등에 태우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그 와중에서 성모님이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앉아서 가실 수 있도록 성 요셉은 깔개 하나를 만들어서 나귀 등에 얹었는데, 이 깔개가 바로 시핑크 잎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중세 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식물을 일컬어서 성모님의 방석 또는 깔개(Lady’s Cushion)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아마도 시핑크 포기들이 지표면 가까이에 뭉쳐서 자라는 도톰하고 다보록한 모습을 보면서 방석이나 쿠션을 연상했던 모양이다. 다르게는 성모님의 바늘꽂이(Lady’s Pincushion)라고도 불렀는데, 이 또한 시핑크 포기의 모양새에서 연상된 이름이었을 것이다.
아기 예수님의 신발 금어초
이 식물에는 그 꽃의 생김새를 따라 여러 가지의 재미있는 이름들이 붙여졌다. 동양에서는 이 꽃을 보면서 금붕어의 입 또는 금붕어가 헤엄치는 모습을 연상했다. 그래서 금어초(또는 금붕어꽃)라고 불렀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용의 대가리(특히 입 부분)을 연상했다. 그래서 스냅드래곤(snapdragon)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리스에서는 이 꽃의 모습에서 동물의 코를 연상했던 모양이다. 이 꽃의 학명 안티리눔(Antirrhinum)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인데 ‘코처럼 생긴 꽃’이란 뜻이 있다(사람의 코처럼 오뚝하게 솟은 코가 아니라 납작하고 콧구멍 두 개가 뻥 뚫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돼지코를 연상하기 바람). 그런 식으로 이 식물은 사자의 입, 송아지의 코, 두꺼비의 입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런가 하면 꽃이 시들고 난 뒤 열매가 맺히는데 그 모양이 해골처럼 생겼다고 해서 용의 해골 또는 해골꽃이라고도 불렸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메시지를 은밀하게 전하고 싶을 때 꽃을 이용하는 관습이 있었다. 가령, 연인에게 자신의 진심 또는 진실을 전하고 싶은 사람은 히아신스를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히아신스와 함께 금어초를 보내는 것은 그 꽃들을 보내는 사람이 잘못한 실수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는 마음을 전한다는 뜻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금어초는 바위가 많고 척박한 곳에서 자라는 식물이기에 고유한 상징성을 가진다. 특히 여성이 불리하고 열악한 처지에 있던 시절에, 어려운 여건과 불리한 조건에 대응하고 극복하며 살아가는 이들(여성들)이 지니는 내면의 강인한 힘과 그들이 나름대로 누리는 은총을 상징했다. 그런 점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존재인 여성에게 금어초를 주는 것은 그 여성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중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꽃을 보면서 아기 예수님의 발에 신겨 드릴 신발을 연상했다. 그리하여 그 이름을 아예 아기 예수님의 신발(Infant Jesus’ Shoes)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생각해 보면, 성모 마리아께서도 여느 예비 엄마들처럼 아직 아기가 태중에 계실 때 배내옷이며 갖가지 출산용품들을 준비하시면서 예쁘고 앙증맞은 신발까지 미리 준비해 두셨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달콤한 기대감과 소소한 행복감은 산산이 날아가 버렸다. 느닷없이 아기 예수님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머나먼 타향으로 허둥지둥 피신하셔야 했으니 말이다. 그런 성모님을 위해, 그리고 아기 예수님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없는 예쁜 신발을 다시금 챙겨 드린 것이 아니었을까.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1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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