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미사] 전례 탐구 생활16: 자비를 베푸소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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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0-07-12 | 조회수6,462 | 추천수0 | |
전례 탐구 생활 (16) 자비를 베푸소서
고백 기도에서 자신의 죄를 세 번(생각과 말과 행위로) 살핀 우리는 이어서 세 쌍의 자비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사실 우리가 전례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으로 가까이 나아갈 때 그분의 자비를 구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정녕 주님의 날은 큰 날 너무도 무서운 날 누가 그날을 견디어 내랴?”(요엘 2,11) 하고 예언자가 외쳤던 것처럼, 지극히 거룩하고 깨끗한 주님의 현존 앞에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을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구한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일까요? 자비가 실제로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청원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 자비를 베푸는 이와 자비를 받는 이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떠올리면 안 된다고 주의를 시키셨습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자비가 그것을 받는 사람을 낮추어버리고 따라서 그 사람의 존엄성이 손상된다고 섣불리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비의 관계는 루카 복음에 나오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15,11-32)에서 드러납니다. 그 이야기에서 제멋대로 살던 아들은 비참해진 자신의 꼴을 견디다 못해 자신이 저지른 죄의 실상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는 처절하게 뉘우치며 아버지를 찾아 집으로 돌아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따르면 이 이야기에서 “탕자는 자기 아버지 눈에 참으로 귀한 선(善)으로 비친 것입니다. 아버지는 진리와 사랑에서 오는 신비스러운 비추임 덕택에 아들에게서 일어난 선(善)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저지른 모든 악행을 잊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이 경우 아버지는 단순히 자기 아들의 잘못을 용서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지난 악이 아니라, 지금 아들 안에서 일어나는 선을 봅니다. 마음의 변화, 자기 죄에 대해 느끼는 슬픔, 자기 삶을 다시 본궤도에 올려놓고자 하는 고귀한 갈망 같은 것들 말입니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선을 보고 기뻐하며 그의 귀향을 열렬히 반긴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가 죄를 짓고 진심으로 뉘우칠 때 우리를 바라보시는 모습입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법적인 행위로만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뉘우치는 마음까지 보십니다. 시편의 말씀처럼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19). 이것이 바로 자비를 이해하는 올바른 맥락입니다.
우리가 부모 자식 관계를 불평등한 권력 관계가 아니라 신비로 맺어진 사랑의 관계로 바라보는 것처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신비가 하도 커서, 그 앞에서 우리는 그저 단순한 청원을 끈질기게 반복할 따름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소리 높여 부르는 자비송은 아직 제대로 말을 할 줄 모르는 아이의 입에서 되풀이해 나오는 옹알이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2020년 7월 5일 연중 제14주일(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 가톨릭제주 3면,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성소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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