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례] 문화사에 따른 전례: 스콜라 칸토룸의 발전(4-8세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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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1-02-02 | 조회수6,303 | 추천수0 | |
[문화사에 따른 전례] 스콜라 칸토룸의 발전(4-8세기)
스콜라 칸토룸(Schola Cantorum)은 본디 성가나 합창곡을 가르치거나 훈련시키는 학교를 뜻하며, 전례 음악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자 설립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신자들의 선두에서 노래를 이끌어 주며, 특별한 노래들을 공동체와 함께 또는 공동체의 능동적 참여 없이 번갈아 가며 선도하는 성가대를 주로 의미한다.
4세기에 설립된 스콜라 칸토룸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후원으로 대성당에서 전례를 거행할 수 있게 되면서 음악은 전례의 한 부분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스콜라 칸토룸은 314년 실베스테르 1세 교황이 설립했다고 한다. 367년 시리아의 라오디케이아 지역 공의회에서는 회중 노래를 금지하고 훈련된 성가대에게 전례 음악을 맡겼다. 전례의 음악적 부분을 위해 훈련된 성가대원들과 함께, 성직자들은 가장 중요한 전례 거행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나 회중은 전례 음악에서 멀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590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한동안 없어졌던 스콜라 칸토룹을 다시 설립한다.
이 성가대 학교는 유럽에 성가를 보급하는 중심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20-30명의 소년 또는 남성으로 구성되었으며 노래에 능숙한 사람만이 여기에 참여할 수 있었다. 가장 재능 있는 성가대원은 파라포니스타(paraphonista)라고 불렸고, ‘알렐루야’의 솔로를 담당했다.
스콜라 칸토룸에서의 학습 기간은 9년이고 학생들에게 성가를 외우도록 의무화했다. 성가 봉사를 하는 동안 감독이나 파라포니스타만이 책을 소유할 수 있었다.
중세 시대 초기에 서방 교회의 학문적 중심지로 기능했던 곳은 대수도원이었다. 또한 당시 전례 음악이 발전하는 고향이기도 했다.
카롤링거 왕국과 스콜라 칸토룸의 발전
피핀 3세와 그의 뒤를 이은 샤를마뉴는 그들의 왕국 전역에 로마 전례를 따르라고 명령했으며, 로마의 공식적인 전례 음악도 사용하라고 요구했다. 이 일을 완수하고자, 로마의 음악가들을 프랑크 왕국으로 데려와 성가를 가르치게 했다. 당시에 이러한 음악적인 목표를 이루려면 당연히 성가대를 보내야만 했다. 정확한 기보법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샤를마뉴의 요청에 하드리아노 1세 교황은 두 명의 성가대원, 베드로와 로마누스를 789년에 프랑크 왕국으로 보냈다. 불행하게도 로마누스는 병에 걸려 갈 수 없었고 베드로는 메츠로 가서 그레고리오 성가 학교를 설립한다.
메츠는 로마 성가와 프랑크 왕국의 성가가 만나는 지점이 되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성가를 오늘날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부른다고 미국의 저명한 중세 음악 학자 맥키넌은 그의 저서 「대림 프로젝트: 7세기 후반 로마 미사 고유문의 형성」에서 말한다.
다성 음악과 네우마 시스템의 발전
알프스 북쪽의 재능 있는 음악가들은 그레고리오 성가뿐만 아니라 다성 음악도 발전시킨다. 다성 음악은 두 개 이상의 성부가 동시에 소리 내는 음악이다. 오르가눔(organum)으로 알려진 다성 음악의 최초 형태에서는, 음악의 두 번째 성부(聲部)의 음이 본디의 성가 성부음에 맞춰졌다.
오르가눔의 가장 초기 유행은 병행 음조에서 동시에 노래되는 하나의 텍스트를 활용했다. 이후의 유형은 서로 다른 음조에서 동일한 텍스트를 동시에 노래하는(자유 오르가눔) 부분을 포함했다. 다성 음악은 복잡한 여러 개의 성부와 더욱 복잡해진 리드미컬한 패턴으로 발전하여, 전례 테스트를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레고리오 성가는 말 중심의 음악으로, 기도문을 지원하고 강화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는 초창기 교회 음악 전통과 연속성을 지녔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성가는 일반 사람들이 더는 이해하지 못하는 라틴어로 불려졌다.
북방의 수도원 중심지에서 음악을 기보하는 시스템이 개발되었다. 그 전에는 성가의 텍스트 부분만 기록되었고, 음악은 암기되어야 했다.
9세기 중엽에, 비교적 효과적이었던 기호 또는 ‘네우마’(neumes) 시스템이 개발되어 성가대들이 이전에 배웠던 성가를 기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네우마 시스템은 11세기 중엽에 매우 정교해져서, 악보만 갖고도 음악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회중의 창미사 참여는 제한적이었다
중세 시대 초기에, 적어도 주교좌 성당들과 유명한 전례 중심지에서는 회중이 여전히 미사 통상문의 일부를 함께 노래했다. 그러나 미사 고유문에서는 음악적인 역할이 거의 공유되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특별한 경우에 입당 예식의 일부로 영광송을 가끔씩 노래했을 뿐이다.
예컨대, 최초의 「로마 예식」(Ordo Romanus, 700년 무렵)은 스콜라 칸토룸이 노래하는 ‘키리에’(자비송)를 언급하지만, 프랑크 왕국에서는 9세기 말에도 사람들이 ‘키리에’를 함께 노래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통상문의 어떤 부분보다도 ‘상투스’(거룩하시도다)는 회중이 함께 부르도록 보장되었고 어떤 지역에서는 12세기까지 잘 지켜졌다.
그러나 결국에는 통상문의 다성 음악곡이 급증하고, 이에 더해 미사 전례문을 조용하게 낭송하는 경향이 커지면서, 사실상 회중은 ‘상투스’를 부르는 동안 조용히 있는 상황이 되었다. 성찬 전례에서 회중의 목소리는 더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공동체가 이 전례 동안에 음악적인 목소리를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다.
미사에서 자국어 노래를 허용하였던 부분은 로마의 교황이 하는 순회 미사(Missa stationalis)의 행렬 때 성인 호칭 기도들(litaniae)이나 화답 시편들(psalmus responsorius)로, 회중이 함께 불렀다. 프랑크 왕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행렬을 할 때 자국어로 된 종교적인 노래를 사용했으며, 미사에서는 강론 뒤 보편 지향 기도 다음에 회중이 다양한 형태의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으로 응답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스콜라 칸토룸은 더욱 전문화되었고, 라틴어로 그리는 미사에서 회중이 노래로 참여하는 정도가 축소되어 미사를 그저 ‘보러’ 가는 관객으로 점점 바뀌어 간다. 그래서 회중은 자국어로 편하게 부를 수 있고 찬미할 수 있는 대중 신심에 점차 눈을 돌리게 되었다.
* 윤종식 티모테오 - 의정부교구 신부.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이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전례학 교수이다.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였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 시복 미사 때 전례 실무자로 활동했으며, 저서로 「꼭 알아야 할 새 미사통상문 안내서」가 있다.
[경향잡지, 2021년 1월호, 윤종식 티모테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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