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례] 문화사에 따른 전례: 전례 용기들(8-11세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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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1-10-19 | 조회수2,813 | 추천수0 | |
[문화사에 따른 전례] 전례 용기들(8-11세기)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교의 시작부터 성찬례에 사용되었다. 사도들과 그 이후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에서 사용하신 빵과 포도주를 성찬례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다. 4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일상적으로 식사 때 먹던 빵과 같은 재료를 사용했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표지를 넣거나 고유한 형태로 빚기 시작했다. 또한 특별한 표지를 넣기 위한 빵 스탬프도 발달했고, 납작한 원반 모양의 성찬례용 빵을 준비하는 전통이 생겼다.
10세기까지는 발효된 포도주와 발효되지 않은 새 포도주, 그리고 포도 주스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라티아누스 교령집(1140년?)은 미사 때 발효되지 않은 포도 주스를 사용해도 괜찮다고 했던 율리오 1세 교황(337-352년 재위)의 말을 인용한다. “필요한 경우, 포도송이들을 성작 안에 짜 넣고 물을 섞을 수 있다. 교회 계율에 따르면, 주님의 잔은 물이 섞인 포도주와 함께 봉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줄어드는 성찬례 참석자와 봉헌 행렬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약화시키는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해 교회가 성자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참으로 신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평신도가 늘었다. 이와 함께 당시 출현한 ‘원죄 교리’는 평신도에게 스스로 죄 많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지니게 하여, 영성체에서 더욱 멀어지게 했다.
이렇게 성체를 모시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성찰한 평신도들이 정기적인 성찬례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 결과 교회에 예물과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지도 않게 되었다. 영성체를 하는 사람의 숫자가 급격히 줄었고, 많은 지역에서 봉헌 행렬이 사라졌다. 이 기간에 사적 미사가 많아지면서, 봉헌 행렬은 의미가 없어졌다. 그러면서 수도자나 성직자가 성찬례에 봉헌되는 빵과 포도주를 직접 준비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수도원과 다른 종교 기관이 예식화된 절차에 따라 성찬례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누룩 없는 빵
성찬례의 초현실성을 강조하자, 일반 식탁에서 먹는 것과는 다른 빵을 사용하는 편이 적합해 보였다. 특히 유다교 성전 제사에 사용한 누룩 없는 빵은 성찬례에서 순수한 이미지를 가지고, 특별한 빵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마련해 준다. 성찬례를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삶과 죽음의 재현으로 이해했던 것도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게 만든 또 하나의 요인이다. 미국의 신학자 러셀(James C. Russell)은 저서 「중세 초기 그리스도교의 게르만화」(1994년)에서 이 요인이 게르만화의 영향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누룩 없는 빵을 강조한 사람이었던 카롤루스대제의 핵심 고문 요크의 알쿠이누스(730?-804년)는 리옹의 수도자들에게 보낸 편지(798년)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축성되는 빵은 누룩이나 다른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매우 순수한 빵이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영성체 방식의 변화로 작아진 제병과 성반
늘어나는 사적 미사와 줄어드는 영성체하는 사람의 수, 그리고 누룩 없는 빵의 사용은 모두 제병 크기가 작아지는 데 영향을 끼쳤다. 9세기 이후부터는 손이 아니라 입으로 성체를 모시는 관습이 분명하게 나타났는데, 이 또한 제병의 크기가 작아지게 만든 요인이었다. 11세기 무렵, 교회는 성체를 모시는 사람들을 위해 전반적으로 작은 제병을 준비했다.
성찬례용 빵의 변화는 빵을 담는 그릇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부터 성찬례용 빵을 담던 바구니가 사라졌으며, 큰 빵 조각이나 영성체하는 사람 모두를 위해 빵을 여러 개 담을 정도로 충분히 컸던 성반이 작아졌다.
작은 성반은 이미 콘스탄티누스대제 시대 뒤부터 사용되었다. 그러나 중세 초기에는 전례 공동체의 규모나 본질에 상관없이 작은 성반으로 규정되었다. 신자들에게 분배할 빵을 전부 성합에 보존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 되었기 때문에, 성반은 더 이상 평신도를 위한 빵이 아니라 사제를 위한 빵만 담는 그릇이 되었다.
작아진 성작
지난 시대의 성작과 비슷한 크기의 성작은 손잡이가 달린 형태와 손잡이 없는 음료용 큰 잔의 형태가 있었다. 손잡이가 달린 성작은 시간이 갈수록 희귀해지다가 12세기 이후에는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전보다 성작 크기가 작아졌다. 성찬례에 참여하는 사람들, 특히 잔으로 성혈을 영하는 평신도의 수가 줄었고, 사적 미사가 점점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고귀한 성혈을 흘릴 수 있다는 두려움 탓에, 성찬례에 참여한 평신도는 대부분, 성혈을 받아 모시는 경우가 점점 더 드물어졌다.
이 기간 성작 디자인이 발전을 이루었다. 잔과 받침대를 잇는 손잡이 부분에 마디를 넣은 것이다. 이전 시대에도 이러한 특징을 가진 성작이 있었지만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손잡이 대에 마디를 넣는 것이 표준화되는 데에 영향을 준 한 가지 요인은, 축성된 성체를 만진 뒤에 엄지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을 붙이고 있는 사제들이 점점 많아진 것이다. 이 관습을 반대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13세기 무렵에는 일반적인 규칙이 되었다.
성혈용 대롱
이 시기에 등장한 매우 특이한 성찬용 도구 가운데 하나는 일종의 빨대 같은 성혈용 대롱이다.
8세기 로마에서 주교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한 봉사자들이 성혈을 영할 때 이 대롱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최초의 증거로 전해진다. 최소한 13세기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 전까지, 교황이 집전하는 전례에서 교황이나 부제가, 그리고 가끔은 주교들이 특별한 경우에 대롱을 사용했다.
이 시대에 빵과 포도주 형상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모인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냈던 전통적인 방식은 점점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게르만화된 전례 거행에서 성체와 성혈을 담는 그릇들은 공동체 자체보다도 더 귀하게 간주되기 시작했다.
* 윤종식 티모테오 - 의정부교구 신부.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이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전례학 교수이다. 교황청립 성안셀모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였다. 저서로 「꼭 알아야 할 새 미사통상문 안내서」가 있다.
[경향잡지, 2021년 9월호, 윤종식 티모테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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