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례] 문화사에 따른 전례: 성찬 신학(8-11세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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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1-11-28 | 조회수2,546 | 추천수0 | |
[문화사에 따른 전례] 성찬 신학(8-11세기)
교회가 게르만화되면서,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참된 실재인 정신적이고 초월적인 원형이 세상의 사물 속에, 모형 속에 숨겨진 채로 현존한다는 ‘실재 상징’ 개념보다는, 물적이며 손에 잡히는 분명한 것만이 참된 실재라고 생각하는 게르만족 사고가 중심이 되었다.
이에 따라 가시적인 전례 안에 비가시적인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실재와 상징의 일체성이 붕괴되었고, 실재와 상징이 대립한다고 보는 관점이 형성되었다.
실재론 옹호자들은 역사적인 예수님의 몸과 성체를 동일시하는 극단적인 사실주의로 흘러가면서 성체성사의 상징성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반대로 상징론 옹호자들은 성체 안에는 그리스도의 상징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 현존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경향을 보였다.
상징주의가 설명하는 성체
그리스도 현존을 지나치게 상징적이고 우의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오히려 신앙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아말라리우스(775?-850?년)는 성찬 전례 때 ‘주님의 기도’와 ‘하느님의 어린양’ 사이에 사제가 성체를 세 조각으로 나누는 행동을 상징주의적으로 설명했는데, 이것이 논쟁을 일으켰다.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 세 조각은, 곧 죽음을 맛보고 죽게 된 몸이다. 첫 번째는 거룩하고 흠 없으며 천상으로 올림을 받은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몸이다. 두 번째는 땅 위를 걷는 몸이다. 세 번째는 무덤에 누운 몸이다. 성작에 넣어진 조각은 이미 죽은 이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드러내고, 사제나 신자에게 영해지는 조각은 땅 위를 걸으셨던 몸이며, 제대에 남겨 놓은 조각은 무덤에 누워 있는 몸이다”(『라틴 교부 총서』 [Patrologiae cursus completus: Series latina] 105, 1154-5). 여기서 제대에 남겨 놓은 조각은 미사의 연속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리옹의 부제였던 플로루스는 아말라리우스의 이러한 설명을 축자적으로 해석하여 비난했다. 마침내 838년 9월 퀴에르시 공의회에서 기소를 당하여 신랄한 비판을 받은 아말라리우스의 ‘성체의 세 부분’(Corpus triforme)에 대한 설명은 단죄되었다.
코르비 수도원에서의 성찬례 논쟁
1차 성찬례 논쟁은 한 수도원 내부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스 코르비의 베네딕도 수도원장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785/90?-859/60?년)는 그의 책 「주님의 몸과 피에 관해서」에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역사적 예수의 육체와 성체를 동일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이 성찬례를 통하여 날마다 반복된다고 주장했다.
곧 예수의 역사적 존재 방식과 성사적 존재 방식의 구별을 부정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영성체를 모실 때 주님의 살을 씹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 주장에 반대하여 같은 수도원의 수사 라트람누스(?-868년)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내세웠다.
‘빵과 포도주는 성변화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상징(figura)이 될 뿐이다. 그의 몸과 피는 신적인 능력과 함께 상징의 베일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을 실제로(in veritate) 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상징과 신비와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영한다고 하겠다.’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 몸의 실제적 현존을 부정하려는 의도라기보다 역사적 그리스도의 몸과 성체를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하는 데에 초점이 있었다.
두 번째 성찬례 논쟁
투르의 참사위원이었던 베렌가리우스(?-1088년)는 아우구스티노와 라트람누스에 의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례에 실제로 현존한다는 것을 부정했다. 왜냐하면 세상 종말 이전에는 현양된 그리스도의 몸이 천상에서 불려 내려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성찬례 안에서 빵과 포도주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음을 철학적으로 증명하고자 실체(substantia)와 우유(偶有, accidentia)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실체란 한 사물의 정신적인 본질이나 실재를 뜻하고, 우유는 겉모양을 뜻한다. 이들 개념을 동원하여 베렌가리우스는 성찬례에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한 뒤에도 그것들의 겉모양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라는 사실이 실체가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성찬의 양식은 천상에 계신 현양된 그리스도를 정신적으로 연결해 주는 수단, 초자연적 힘을 얻게 해 주는 수단일 뿐이었다.
베렌가리우스의 신앙고백문 서명
베렌가리우스의 견해는 1047년과 1054년 사이, 네 차례에 걸쳐 단죄되었다. 그는 1059년과 1079년 로마 시노드에서 신앙고백문에 서명해야만 했다. 1079년의 신앙고백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 베렌가리우스는 제단에 높여진 빵과 포도주가, 거룩한 기도와 우리 구세주의 말씀의 신비를 통해서, 진정하고 본래적이며 생명을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적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
축성된 빵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시고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희생되시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이고,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진정한 그분의 피다. 이것은 상징(signum)과 표상의 힘(virtus sacramenti)으로만 변화된 것이 아니라, 본성의 고유함과 실체의 진리 안에서 그리된 것이다.”
이 신앙고백문은 ‘상징’과 ‘표상의 힘’이라는 한편과, ‘본성의 고유함’과 ‘실체의 진리’라는 다른 편을 대립항으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초기 교회의 실재 상징적 사고가 사라졌음을 보여 준다. 그렇지만 “실체적으로 변화된다.”는 새로운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극단적인 사실주의가 극복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곧 실체는 감각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 통찰력으로 인지될 수 있는 한,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인 것이다. 그렇다면 ‘실체적 변화’란 본질적이면서도 어디까지나 정신적, 영적 차원의 변화이다.
교부들이 ‘원형-모형’의 구분으로 표현했던 ‘상징-실재’라는 긴장과 차이는 중세에 들어서자 ‘실체-외형’, 또는 ‘실체-우유’로 구분되어 표현된다. 이로써 성체성사를 상징과 실재 두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논쟁 과정을 통하여 실체 변화설이 서서히 확립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 윤종식 티모테오 - 의정부교구 신부.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이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전례학 교수이다. 교황청립 성안셀모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였다. 저서로 「꼭 알아야 할 새 미사통상문 안내서」가 있다.
[경향잡지, 2021년 10월호, 윤종식 티모테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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