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례] 응답하라, 전례: 전례에서의 성부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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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2-03-11 | 조회수2,696 | 추천수0 | |
[응답하라 ‘전례’] 전례에서의 성부는?
천주교인을 알아보는 쉬운 방법이 무엇일까요? 손을 잘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손에 묵주반지를 끼고 있거나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조용히 묵주를 돌리며 기도를 하거나 식사를 하기 전과 후에 성호를 긋는 사람입니다. 곧 천주교인의 가장 큰 표지는 십자성호입니다.
군대에서 식사 시간에 십자성호를 긋고 기도를 하고 먹으니, 이상하게 쳐다보던 동료가 혹시 기도를 빠뜨리고 식사를 하려고 하면 “야! 너 기도하고 먹어야지~!”라고 가르쳐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말해 준 친구에게 “내가 기도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니?”라고 묻자, 그 친구는 “아니! 내 친구가 기도를 하니까 옆에 있는 나도 하느님의 은혜를 받는 것 같아서 좋더라”라고 말해주더군요.
특정 종교의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초월적인 분에 대한 신뢰는 누구든지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좋은 체험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느님’에서 ‘성부’에 관한 내용을 성경과 전례 기도에서 확인하려고 합니다.
전례 기도에서 드러난 삼위일체 하느님!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고 우리가 하느님에게 가는 길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에게 계시를 통하여 가르쳐주었습니다. 계시는 우리가 가야 할 최종 목적지가 삼위일체 하느님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계시의 표본인 성경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일치와 세 위격의 관계를 밝혀주며 전례에서 기도하도록 합니다. 대표적으로 미사의 인사 부분에서 인용되는 코린토 2서 13장13절 말씀이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의 표본은 아무래도 영광송일 겁니다. 모든 모임의 마지막에 하는 기도인 영광송은 모임의 시간과 행해진 일이 삼위일체 하느님에게서 기원했고 마무리된다는 믿음을 드러냅니다. 고대 교회의 영광송은 “Gloria Patri per Filium in Spiritu Sancto(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 영광이)”였는데, 4세기의 아리우스 이단자들이 이 기도 양식을 성자와 성령이 성부께 종속되는 것처럼 해석하면서, 점차 현재의 “Gloria Patri et Filio et Spiritui Sancto(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이)”로 변화되었습니다. 고대 교회의 영광송은 상호관계에서의 종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역사에 있어서 삼위의 역할과 외향적 관계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망각해서 생긴 일이라 하겠습니다.
온전히 거룩하신 하느님과 인간의 두려움과 경외심!
여러분은 ‘주님의 기도’의 첫 부분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할 때, 어떤 느낌이 다가오나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어렸을 적의 체험이 굉장히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봅니다. 아버지가 늘 엄격했으면 하느님이 엄하게 다가올 것이고, 친구처럼 다정했으면 하느님이 그렇게 느껴질 겁니다.
너무나 완벽하고 거룩한 존재 앞에 있으면 인간은 자신의 부족감에 주눅이 들거나 피할 겁니다. 어부들 앞에서 엄청난 물고기를 잡게 하신 예수님에게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라고 한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구약에서의 하느님은 인간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으며 오히려 그 범주를 무한히 초월하는 분이시기에, 인간으로 하여금 두려움과 경외심을 느끼도록 하는 존재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려 할 때,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창세 15,12)라고 하였고, 불타는 떨기를 보고 놀란 모세가 그 광경을 보려고 다가갔을 때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탈출 3,6)고 합니다.
접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온전히 거룩하심을 보고 체험하는 천사와 인간의 두려움은 이사야 예언자가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통해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천사들이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노래하면서 그들의 말뿐만 아니라 태도도 하느님의 엄청난 권능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보지 않기 위해서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 하느님 위엄 앞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그들 자신과 몸 전체를 덮습니다(참조. 이사 6,2-3). 그리고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축복하시는 하느님!
한편으로 지극히 거룩하시고 초월적이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경외심과 두려움을 느끼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필요한 복을 주시는 분이기에 그분 앞에 나아가는데 주저함이 없게 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강복”(1079항)이라고 증언합니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는 모든 생명체, 특히 남자와 여자에게 강복하셨지요. 또한 이사악의 탄생, 이집트 탈출, 약속된 땅을 주신 일,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신 일, 하느님께서 성전에 현존하시는 것, 정화를 위한 바빌론 귀양살이, 그리고 ‘소수의 남은 자들’의 귀환 등 놀라운 구원 사건 안에서 주님의 강복은 이어졌습니다.
하느님의 강복은 교회의 전례에서 온전하게 드러나고 전달됩니다. 교회는 다음과 같이 확신합니다. “성부께서는 피조물을 위한 모든 강복과 구원의 원천이며 목적으로 인정되시고 흠숭을 받으신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강생하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당신의 ‘말씀’ 안에서 우리를 복으로 채워주시며, 그 ‘말씀’을 통해서 모든 선물을 포함하는 ‘선물’, 곧 성령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신다”(‘가톨릭교회교리서’ 1082항).
예수님을 보내신 사랑의 아버지!
창조주 하느님은 지속적으로 당신의 창조물에 관심을 기울이며, 인간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시편 8,6). 또한 특별히 사랑하셨기에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종살이하던 집,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구해 내셨습니다(신명 7,8). 이러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요한 3,10)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과 새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청하는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본기도는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저희가 하느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더 깊이 깨달았으니 온갖 오류에서 벗어나 진리의 말씀을 더욱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히포 공의회(393년)에서 “제대에 서 있을 때에는 언제나 성부께 기도를 바쳐야 한다”(제21조)라는 결정에서처럼 전례 기도는 언제나 아버지를 향해 바칩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께서는 또한 모든 찬양과 감사 행위의 종착점이십니다. 곧 전례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구원 역사 안에서, 사람들의 삶 안에서, 전례 안에서 이룩하신 놀라운 업적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3월호, 윤종식 디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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