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바로보기 / 소금과 빛 (마태5:13~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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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21-06-23 | 조회수11,670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공동번역성서) 2021. 6. 00. 성경바로보기
소금 과 빛 (마태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 없어 밖에 내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15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16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다 오늘은 여러분이 잘 아는 소금과 빛의 비유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성경에 관심이 좀 있으신 분들은 다 알겠지만 대부분의 신학자들이나 주석가들, 그리고 해설자들이 이 이야기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비추고 세상의 부패를 막는 훌륭한 사람이 되자’로 결론을 짓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이 이야기의 메시지를 그렇게 정리하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열심히 선행도 행하고, 사회 개혁에도 참여하고 하지요? 그도 그럴 것이 16절을 보면 이 이야기의 주제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자’라고 확정짓게 할 만한 단어가 하나 나오는데 그 단어가 ‘착한 행실’입니다.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런데 조금만 깊게 생각을 해 보세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면 정말 세상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나요? 그럼 이런 말씀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요한15:18~19)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요한16:33) 33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도가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게 되어있다고 하십니다. 절대 세상은 우리의 빛과 소금됨을 보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빛과 소금을 존경해 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빛과 소금을 핍박하여 환난을 당하게 만듭니다. 그게 성경의 진술입니다. 그런데 아니잖아요? 착한 일 많이 하면 세상 사람들이 존경해 주고, 칭찬해 주고 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성경이 성도에게 요구하는, 오직 성도만이 행할 수 있는, 착한 행실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 누구나가 행할 수 있는 그런 도덕적, 윤리적, 사회적, 상식적 착한 일이 아닌 것이지요? 왜냐하면 성도가 세상이 추구하는 착한 일을 했을 때 세상은 성도를 칭찬하지 핍박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교회가 불우이웃을 돕는다던가,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던가, 불쌍한 이웃의 경조사를 돕는 등의 행위를 했을 때 일간 신문에서조차 칭찬해 주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도에게 요구되는 착한 일은 착한 일을 하고도 세상에게 욕을 먹는 그런 착한 일이란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주님이 요구하시는 착한 행실이라는 것이 그런 세상적 착함이라면 그 착한 행실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근거가 될 수가 없는 거잖아요? 만일 성도의 세상 적 착함이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라면 타 종교인들의 착한 행실은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까? 타 종교인들의 착한 행실도 우리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가요? 아니면 그들 각자가 믿는 다른 신들에게 영광이 되는 것인가요? 본문 16절의 착한 행실은 그런 종류의 착한 행실이 아닙니다. 헬라어에서 ‘착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는 ‘아가또스’와 ‘칼로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 둘은 서로 혼용해서 쓰이기도 하지만 ‘칼로스’라는 단어가 훨씬 폭 넓고 깊은 ‘선’을 가리킬 때 자주 쓰이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칼로스’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 단어는 요한복음에도 등장합니다. (요한10:11)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여기에서 ‘착한’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칼로스’입니다. 그리고 필립비서 1장 6절의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라는 어구에서 ‘착한’이 ‘아가또스’입니다. 예레미야에 의하면 그 두 단어는 서로 혼용해서 쓰였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착한 일, 성도의 착한 행실은 세상의 선악 기준에 의한 착한 일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착한 행실, 혹은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서 기인한, 성도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착한 행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착한 행실은 이 세상 속에서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비움으로 나타났습니다. 자기부인으로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 의해 교회가 탄생을 한 것입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바로 그 새 창조의 행위, 자기부인과 순종으로 지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확장 과정, 그게 하늘나라 백성들의 세상 속 착한 행실입니다. (사도10:38)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착한)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예수의 착한 일이 성도에게서 그대로 재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과 소금의 삶, 착한 행실은 자기를 부인당하고, 수난의 삶을 통과하며, 하느님의 새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의 착한 행실, 순종의 착한 행실, 십자가의 착한 행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면, 그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 말도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 말은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상태를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했지요? 하느님의 능력이 성도의 삶 속에 가입을 하여 세상은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인내와 수고와 섬김과 순종의 삶이 성도의 삶에서 드러나게 될 때, 거기에서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이 세상에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는 삶, 그 삶이 바로 착한 행실이고, 빛과 소금의 삶인 것입니다. 그건 세상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그런 삶입니다. 그래서 그 삶이 성도에게만 요구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빛과 소금이라는 것의 근본 성질이 뭡니까? 구별입니다. 소금은 부패의 대척점에서 부패와의 구별을 의미하는 것이고, 빛은 어두움의 대척점에서 어두움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빛과 소금의 삶이란, 세상은 흉내를 낼 수없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성도만이 해 낼 수 있는 그런 삶이어야 합니다. 만일 성도의 빛과 소금의 삶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과 상식의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전에 입적(入寂)하신 법정 스님도 빛과 소금의 삶을 살다간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분의 산문집에서 몇 부분을 옮겨 읽어 드려 보겠습니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富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다음은 1997년 길상사 창건 법문 중 일부입니다.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요즘은 어떤 절이나 교회를 물을 것 없이 신앙인의 분수를 망각한 채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면서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완전 개혁주의 아닙니까? 이렇게 불가의 스님도 무소유의 삶, 비우는 삶, 절제의 삶, 청빈의 삶을 자신의 열심으로 살아낼 수 있습니다. 어디 그 이 뿐입니까? 힌두교인인 간디는 어때요? 슈바이처는 어떻습니까? 감히 우리는 상상도 못할 절제와 버림과 청빈과 섬김의 삶을 살다가 갔잖아요? 그러면 그들도 빛과 소금이 맞나요? 행위로만 본다면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훌륭한 소금이고 우리보다 훨씬 밝은 빛이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천국에 가야하고 우리가 지옥에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들도 하느님 나라 백성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이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는 산상수훈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잖아요? 그 말은 빛과 소금의 삶, 착한 행실의 삶을 사는 자들이 하느님 나라 백성이라는 말씀인데 착한 사람들은 전부 하느님 나라 백성이 맞아요? 그럼 예수님 옆에 달렸던 강도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 그들은 착한 행실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못 살았잖아요? 예수님이 성도들에게 고작 그런 착한 행실에 대해 권고하고 계신 것일까요? 그럼 예수님의 말씀과, 초등학교 도덕책의 권위와 가치가 별 차이가 없는 것이겠네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런 윤리 교과서에 나오는 착한 행실을 강조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금이 되어라, 빛이 되어라, 하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선포해 버리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이다. 그리고 그 빛과 소금은 당연히 세상에서 그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착한 행실이며, 그 착한 행실에 의해 세상에게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영광이 되는 착한 행실은 엄밀히 말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일, 즉 새 창조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옆에 달렸던 강도 속에서 일어난 새 창조의 일, 즉 구원의 역사가 바로 예수님의 착한 행실이며, 그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 의해 끌려가는 그들의 삶이 예수를 드러내는 빛과 소금의 구별된 삶인 것입니다. 설탕에 짠 맛이 있을 수 없고, 어두움 속에 빛의 속성이 혼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도 할 수 있고, 세상도 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소금과 빛의 삶이 아닙니다. 여러분, 세상과 성도가 빛과 어두움, 부패와 소금으로 구별이 되는 유일한 근거가 무엇일까요? 오직 성도만이 갖고 있는 세상과의 구별점이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그게 성도와 세상의 구별됨을 결정짓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생명이 있는 자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삶이 바로 빛과 소금의 삶일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보기에 예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의 삶과 세상 사람들의 삶이 도덕과 윤리로, 쉬운 말로, 착함으로 구별이 되던가요? 솔직히 정말 그렇습니까? 아니지요? 예수 안 믿는 착한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생명을 가졌다고 하는 성도의 삶 속에서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빛의 삶, 소금의 삶은 그러한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 건전한 삶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그러한 세상적 관점에서의 착한 삶은 빛과 소금의 삶의 열매로 맺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빛과 소금의 삶의 본질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열매는 생명이 있다는 흔적이요 결과이지 그 자체가 생명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열매만 맺으려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하느님은 분명 애굽을 탈출한 당신의 백성들, 구원받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신명11:8-9) 8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한다. 그러면 너희가 강해져서, 너희가 건너가 차지하려는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9 또한 너희는 주님께서 너희 조상들과 그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이게 하느님의 요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성공했나요?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말을 지킬 실력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쫓아 살려고 했더니 자기들이 세상 속에서 원하는 것이 하나도 주어지지 않아요. 결국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얻고 싶은 것을 쟁취하기 위해 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의 의가 아닌 다른 의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로마3:21~24)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성도들에게 그들 자신의 의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받고, 왜 자기들이, 선물로 주어지는 ‘義’만을 의지해야 하는지를 잘 배우며, 인간은 그렇게 예수님의 義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세상 속에서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과 소금의 삶이란, 신자 자신의 착한 행실을 내어놓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착한 행실이 어떻게 나에게 임하게 되었는지를 드러내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의 주도권도 주님이 쥐고 계십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소금의 삶, 예수님의 빛의 삶을 성도의 삶 속에서 드러내고, 자랑하는 삶이 바로 성도의 빛 됨과 소금됨의 삶인 것입니다. 그럼 이제 성도가 이 세상에서 드러내야 할, 예수님의 소금과 빛의 삶이 과연 어떤 삶인가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소금에 대해 보지요. 소금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언약의 상징물입니다. (역대하13:5) 5 너희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소금 계약으로, 다윗과 그 자손들에게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권을 영원히 주신 것을 알지 않느냐? 하느님의 구별된 백성, 이스라엘은 소금 언약으로 세상과 구별이 됩니다. 소금, 즉 하느님의 언약이 부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에제16:4) 네가 태어난 일을 말하자면, 네가 나던 날, 아무도 네 탯줄을 잘라 주지 않고, 물로 네 몸을 깨끗이 씻어 주지 않았으며, 아무도 네 몸을 소금으로 문질러 주지 않고 포대기로 싸 주지 않았다. 이렇게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모형하고 있는 역사적 이스라엘에게 소금, 즉 소금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알시피 성경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모든 언약의 뿌리는 하느님과 예수님 간의 피의 언약입니다. (히브9:13~22) 13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14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15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16 유언이 있는 곳에서는 유언자의 죽음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17 유언은 사람이 죽었을 때에야 유효한 것으로, 유언자가 살아 있을 때에는 효력이 없습니다. 18 사실은 첫째 계약도 피 없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19 모세는 율법에 따라 온 백성에게 모든 계명을 선포하고 나서, 물과 주홍 양털과 우슬초와 함께 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가져다가 계약의 책과 온 백성에게 뿌리며, 20 “이는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계약의 피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21 그리고 성막과 의식에 쓰이는 모든 기물에도 같은 방식으로 피를 뿌렸습니다. 22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지고, 피를 쏟지 않고서는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언약, 아담의 언약, 아브라함의 언약, 노아의 언약, 모세의 언약, 다윗의 언약 등등의 원형입니다. 여기에서 ‘유언’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디아떼케’가 바로 ‘언약’이라는 단어입니다. 창세전에 성부하느님과 성자하느님 간의 언약이 있었는데 그 언약이 바로 피의 언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은 언약 당사자가 죽어야 비로소 효력이 발생하는 그런 언약이었다는 것이지요.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포도주 틀을 밟으심으로 자기의 몸에 자신의 피를 뒤집어쓰신, 나귀타신 예수의 이야기가 바로 이 피 언약의 구체적 그림인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언약이 소금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피로, 죽어야 할 자를 구해내는 피의 언약, 그것이 소금언약입니다. 따라서 소금이란, 죽어야 할 자 대신에 제물에 뿌려지는 예수님의 피 이며, 그 예수님의 피는 곧 예수입니다. 그러니 소금의 삶이란 피의 삶이며, 비움의 삶이며, 부인당함의 삶이며, 죽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금을 통해 나 아닌 다른 이가 덕을 보는 것입니다. 그게 소금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피가 자신의 힘을 포기하지 못하고 은혜를 무시하는 이들에게는 저주요, 걸림돌이 되는 것이고, 하느님의 은혜의 장중 안에 들어온 이들에게는 놀라운 구원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소금의 역할에 대해 여러모로 설명을 합니다. (2열왕2:19-21) 19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어르신께서 보시다시피 이 성읍은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나빠서 이 땅이 생산력을 잃어버렸습니다.” 20 이 말에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져오시오.” 하고 일렀다. 그들이 소금을 가져오자, 21 엘리사는 물이 나오는 곳에 가서 거기에 소금을 뿌리며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물을 되살렸으니, 이제 다시는 이 물 때문에 죽거나 생산력을 잃는 일이 없을 것이다.’” 예리고에 우물이 있었는데 물이 좋지 않아 사람들이 그 물 때문에 죽거나 아이를 유산하게 되곤 했습니다. 그 때 엘리사가 예리고의 우물에 소금을 뿌려 좋은 물로 회복시키는 장면입니다. 죽음의 물이 생명의 물로 바뀌는데 소금이 뿌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금은 회복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소금은 어떤 것을 거룩하게 하고 성결하게 만드는 것의 상징으로도 쓰였습니다. (탈출 30,34-35) 3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향료들, 곧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을 장만하여, 이 향료들과 순수한 유향을 섞는데, 각각 같은 분량으로 하여라. 35 너는 향 제조사가 하듯이, 이것들을 잘 섞고 소금을 쳐서 깨끗하고 거룩한 것을 만들어라. 이렇게 소금은 어떤 것을 거룩하게 구별시킨다는 의미도 함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금은 어떤 구별된 자들에게 먹여지기도 합니다. (레위2:13) 13 너희가 곡식 제물로 바치는 모든 예물에는 소금을 쳐야 한다. 너희가 바치는 곡식 제물에 너희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소금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너희의 모든 예물과 함께 소금도 바쳐야 한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제사 중에 소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특히 과월절 삼일 후인 첫 이삭 드리는 날에는 소금을 친 소제만 드리는 날이며, 그 소제를 드린 나머지로 떡을 만들어 먹습니다. 소금을 먹는 것입니다. 그렇게 첫 이삭 드리는 날에는 밀을 빻아서 소금을 치고 그 것을 태워 소제를 드리는 것에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는 구원의 이야기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각설하고 그 소제에는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합니다. 물론 다른 번제에도 소금을 칩니다. 그런데 소제에 친 소금은 그대로 떡으로 만들어져 아론과 그 후손, 즉 제사장들에게 주어집니다. (레위2:10) 10 남은 곡식 제물은 아론과 그 아들들의 것이 된다. 이는 주님에게 바친 화제물에서 온 것이므로 가장 거룩한 것이다. (레위6:14~18) 14 이 예물은 번철 위에서 기름을 섞어 만드는데, 잘 반죽하여 구운 것을 여러 조각으로 부수어, 그것을 곡식 제물로 가져와 주님을 위한 향기로 바친다. 15 아론의 아들들 가운데에서 그의 뒤를 이어 기름부음 받은 사제가 이 예물을 만든다. 이는 영원한 규정이다. 이 제물은 주님에게 온전히 살라 연기로 바친다. 16 사제의 모든 곡식 제물은 온전히 바쳐야 한다. 누구도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17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8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속죄 제물에 관한 법은 다음과 같다. 속죄 제물은 번제물을 잡는 곳, 곧 주님 앞에서 잡는다. 이 제물은 가장 거룩한 것이다. 소제를 드리고 남은, 소금이 들어간 곡식 가루로 떡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떡을 아론과 그의 후손들, 즉 제사장들이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소금 떡을 어디서 먹어야 하냐면, 회막에서 먹어야 합니다. 회막은 하느님의 임재가 있는, 하느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그러니까 소금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온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져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에제케엘서 16장이나 역대기하 13장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소금을 치시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 구약의 모형을 예수님께서 신약에서 풀어 설명해 주십니다. (요한6:32-35)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레위기에서 아론과 그 후손들에게만 주어졌던 구별된 소금 떡은 바로 하늘의 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 빵을 먹은 사람은 죽은 자에서 산 자로 회복이 되고, 부정함에서 성결함으로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소금의 역할이 죽은 것을 회복시키고, 부정한 것을 성결하게 구별하는 용도로 설명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금, 즉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비워짐, 예수님의 부인당하심, 예수님의 수난,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손해가 창조를 낳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렇게 소금은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담고 있는 웅숭깊은 것입니다. 그게 이 세상에 있는 유일한 착한 행실이란 말입니다. 신약에 보면 그 생명의 소금, 거룩의 소금을 만지고 거룩하게 된 여자가 있지요? 루가복음 8장의 혈루증을 앓던 여인 입니다. 혈루병은 부정한 병입니다. 그런데 그 혈루병에 소금이 닿자 부정함이 정함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마태8:16~17) 16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예수님의 질병 치유는 단순히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병의 원인인 죽음(死亡)을 당신이 빨아들이심으로 그 죽음에 사로잡혀 있던 자를 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1베드2:24) 24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니까 소금은 죽음을 빨아들이고, 죽음의 증상들을 빨아들여, 자신이 죽음이 되고, 자신이 저주가 되는 그런 피의 언약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피의 언약이 하느님 백성들에게 유업으로 주어집니다. (민수18:19) 19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에게 들어 올려 바치는 거룩한 예물들은 모두, 영원한 규정에 따라, 내가 너와 너의 아들들, 그리고 너와 함께 있는 너의 딸들에게 준다. 이는 너와 너의 후손들을 위하여 주님 앞에서 맺은 영원한 소금 계약이다.” 여기에서 히브리어 ‘호크’는 ‘몫, 과업, 의무, 규정’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분깃이 주어지는데, 그 분깃이 소금을 친 제물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금언약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들은 반드시 소금을 친 제물을 먹어야 하고, 그 제물과 연합이 되어 소금 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금언약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하느님께 드려지는 모든 제물에는 소금이 쳐지는데 그 소금은 피의 소금이요, 십자가의 소금이요, 저주의 소금입니다. 소금과 제물은 그렇게 연합이 됩니다. 그렇게 그 소금이 쳐진 제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 소금 쳐진 제물을 먹고, 그 소금 쳐진 제물과 연합이 되어 소금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이스라엘, 즉 성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소금이 하느님의 편애에서 제외된 이들에게 부어지게 되면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마르9:43~50)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9 모두 불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49절을 보면 지옥에 있는 죄인들에게 불 소금이 부어지고 있지요? 그리고는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왜 지옥 이야기를 하시면서 갑자기 소금이야기를 하십니까? 하느님의 피의 언약은 그 언약이 체결이 됨과 동시에 인류를 둘로 갈라 버립니다. 언약 안의 백성과 언약 밖의 소품. 그래서 이 역사와 공간이 창조 때부터 둘로 분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 궁창 위의 영역과 궁창 아래의 영역, 물과 뭍, 창세기 셋째 날까지의 그 구별은 그 자체로 언약을 담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창조의 힘에 의해 어두움이 모두 물러가고 빛만 남는 나라, 궁창 아래와 위를 나누고 있는, 궁창이라는 장애물이 사라지고 하늘과 땅이 화해를 하게 되는 새나라, 저주의 물이 모두 물러가고, 은혜의 뭍만 남게 되는 그 나라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라는 하느님의 언약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 셋째 날까지의 창조사역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언약 반대편에 속한 자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피와 십자가는 그들의 악마 됨과 그들의 지옥행을 확정짓는 확실한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불이 소금불입니다. 그 지옥불은 예수의 불이며, 성령의 불인 것입니다. 그 은혜의 불이 성도들에게 임하면 구원의 불세례가 되지만, 지옥 갈 자들에게 임하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지옥불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 밖의 세상들에게 예수의 피와 십자가를 전해 보세요. 코웃음도 안칩니다. 우리 같이 훌륭한 인품과 능력과 지혜를 가진 이들이 왜 그 허약해 보이는 예수의 피의 공로에만 목을 매달아야 하느냐고 오히려 화를 내지요. 그래서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있던 세상이 ‘그거 아니니까 회개하고 은혜를 선물로 받으라’고 하신 예수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억지로 가기 싫은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에 굴복하기 싫어서 자기들 스스로 하느님 안 계신 곳으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자존심 상해서 은혜 같은 거 받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게 율법주의이며 인본주의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은혜 밖의 세상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피의 언약, 즉 소금이 저주의 소금이 되는 것이고, 불의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제사를 지내고,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고, 스스로의 힘으로 착하게 살아서 자신의 가치와 자존심을 챙깁니다. 그래서 바로 위의 내용처럼 자신들의 죄가 발각이 되면 팔과 다리라도 자를 기세입니다. 어떻게 이 더러운 것들과 ‘나’라는 고상한 존재가 함께 존재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이건, 가족이건, 자신의 팔 다리건, 자기의 존재가치를 끌어내리는 것은 가차 없이 정죄해 버립니다. 그게 유다였지요? 그러나 은혜의 소금이 발린 자들은 자신의 죄가 발각이 되고, 자신의 모자람이 폭로가 될 때 예수님의 은혜 뒤로 숨습니다. 그래서 ‘찍어 버리라’는 단어가 ‘아포콥토’로 쓰인 것입니다. 헬라어 ‘아포콥토’는 ‘자르다, 베어버리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제사용어임과 동시에 언약의 언어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언약을 맺다, 언약을 세우다’라고 할 때 ‘cut the covenant’ ‘언약을 자르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창세기 15장의 쪼갠 고기 사건과 17장의 할례 언약을 생각하시면 아주 쉬울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 제물을 쪼갤 때도 그 단어를 씁니다. 그렇게 ‘아포콥토’는 제사에서 제물을 자를 때 쓰는 단어임과 동시에 언약의 언어이기도 한 단어입니다. 그리고는 소금언약이 언급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몸에 죄를 조금이라도 묻혀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그래서 죄가 묻은 것은 다 잘라 버리고 나머지만이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유익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가 묻어서 잘라져 나가야 할 곳이 생길 때마다,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육신이 잘려 나간 것입니다. 그게 피의 언약입니다. 그게 소금언약입니다. 그것을 수긍하고 인정하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지옥에 들어갈 자들은 절대 그 은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가치향상과 자존심 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 전 인생을 올인 하는 삶을 삽니다.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과 양심으로 자기들 생각에 더러운 것들을 다 정죄하고 잘라내며 엉터리 빛과 소금으로 삽니다. 그들에게 화목이 있을 수 있습니까? 지금 이 마르코복음 9장의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전개되어 내려온 이야기인지 아세요?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큰 자인지를 놓고 다투고 있는 장면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이야기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지옥 같은 세상의 실체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향상과 자존심 챙기기를 위해서는 자신들의 팔 다리라도 자를 기세입니다. 그들의 그 큰 자 경쟁은 그대로 지옥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들에게 불 소금이 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소금 언약 속에 들어 있는 하느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가 폭로되고, 자신들의 연약함이 들킬 때마다 예수님의 팔 다리가 ‘아포콥토’ 찍혀 내 던져졌다는 은혜와 자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들의 팔 다리는 찍혀 버리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누가 큰 자인지가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그렇게 마음속에 소금을 둔 이들이 큰 자 경쟁에서 벗어나 화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 소금의 이야기가 이렇게 끝이 나는 것입니다. (마르9:50)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그 소금 언약을 제대로 알면, 세상의 힘의 경쟁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화목입니다. 그런데 소금은 절대 짠 맛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느님의 은혜의 폭력성에 의해 반드시 세상의 힘의 원리 속에서 빠져 나오게 됩니다. 성도는 그렇게 소금 언약 속에서 예수님의 소금되심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구원을 얻은 은혜의 소금들인 것입니다. 그걸 아는 소금들이 이 세상에서 ‘나는 아니요, 아버지의 은혜만이 능력입니다’라는 삶을 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소금의 삶입니다. 내가 착하게 살고, 내가 훌륭한 업적을 쌓고, 내 인격이 칭찬을 받아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소금이 아니라, 나는 자꾸 죽은 흙으로 낮아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서 창조의 착한 일을 하고 계신 예수만이 영광을 받는 삶이 빛과 소금의 삶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소금들은 힘겨운 고난을 통과하면서도, 하느님의 은혜가 가입한 자들이 그 고난을 어떻게 넉넉히 통과하는 지를 보여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폭로당하는 현장에서도 절대 자존심이나 자신의 가치를 챙기려 부산을 떨거나, 율법과 도덕과 윤리 뒤로 숨지 않고 그 연약함을 덮으신 하느님의 은혜를 높입니다. 소금의 삶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부패성과 연약함을 폭로당하면서도 그 더러움을 덮으신 하느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삶인 것이며, 힘겨운 고난의 현장에서도 하느님의 능력으로 꿋꿋이 견디며 일어서는 예수의 증인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나는 부인 되고 진짜 소금인 예수가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것이 은혜의 소금들의 삶인 것입니다. 법정 스님이나 간디나 슈바이처는 자신들의 영광을 스스로 취해 가졌지만 성도는 절대 자신이 영광을 취하는 모습으로 이 땅을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게 소금이 맛을 잃으면 내다 버린다는 말씀의 진의인 것입니다. 그런데 소금은 절대 맛을 잃을 수 없으므로 성도가 자신의 영광을 취하는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이렇게 지리멸렬의 형국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오히려 예수가 저주의 소금을 맞고 온전한 제물이 되어 하느님께 드려졌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감추어지고 숨겨진 자로, 연약하고 무력한 자로 폭로되며, 그것을 덮는 하느님의 능력과 그 분의 은혜를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게 소금의 삶입니다. 여러분,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이라’는 오늘 본문이 산상수훈의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여러분이 알다피 산상수훈은 엉뚱한 하느님 나라를 기대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미 이 세상에 와 있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과 이 세상 속에서 보여지는 하느님 나라 백성들의 삶의 내용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임한 천국 백성들의 삶이 참으로 고단해 보이지 않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자, 자비로운 자, 마음이 청결한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예수 때문에 욕먹고, 악한 말을 듣는 자, 이게 다 이 세상에 임한 복 받은 천국백성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이렇게 설명해 주신 후에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니, 소금과 빛으로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산상수훈의 그 내용들이 바로 소금과 빛의 삶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 삶은 전부 자기를 부인하고 하느님을 위해 내가 핍박을 받고 순종을 하는, 비움의 삶이지 않습니까? 거기에 ‘나’는 없습니다. 그게 소금의 삶이란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참 빛은 소금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전체가 바로 그 빛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빛이신 예수가 세상에 오시니까 세상 전체가 어두움이라는 것이 드러나 버렸습니다. 그 하늘의 빛이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는, 본다고 하는 자들, 스스로 빛이라 자처하는 자들을 어두움으로 만들어 버리시고, 어두움이라고 하는 이들을 빛으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요한9:39~41) 39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40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4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성경은 이렇게,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자신의 실체가 흑암임을 올바로 직시하고 구원자의 은혜와 자비를 바라는 자들이 눈을 뜬 자들이고, 세상의 실체를 바로 보지 못하며 자신들의 세상 적 꿈과 야망을 좇아 일로매진하는 자들을 소경이라 합니다. 눈을 뜬 자들이 빛에 의해 빛의 나라로 들어온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빛의 나라 사람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볼까요? (예레 4:23) 23 내가 보니 땅은 혼돈과 불모요 하늘에는 빛이 사라졌다. (이사 59:9-10) 9 그러므로 공정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고 정의는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빛을 바라건만 어둠만이 있고 광명을 바라건만 암흑 속을 걸을 뿐이다. 10 우리는 눈먼 이들처럼 담을 더듬는다. 눈이 없는 이들처럼 더듬는다. 대낮에도 캄캄한 듯 비틀거리고 몸은 건강하다고 하나 죽은 자들이나 마찬가지다. 바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이 세상의 실체입니다. 이것을 직시할 수 있는 이들이 빛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눈이 어떻게 밝아졌는지도 아는 이들입니다. (이사42:18~19) 18 너희 귀먹은 자들아, 들어라. 너희 눈먼 자들아, 눈을 뜨고 보아라. 19 눈먼 자가 누구냐? 나의 종이 아니냐! 귀먹은 자가 누구냐? 내가 보내는 사자가 아니냐! 하느님께 봉헌된 이자처럼 눈먼 자 누가 있느냐? 주님의 종처럼 눈먼 자 누가 있느냐? 여기보세요. 누가 소경이 되었습니까? 하느님의 從, 예수가 소경이 되었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었던 우리 대신에 그 분이 비워지고, 부수어지고, 흑암이 되심으로 우리가 빛이 되고, 새로운 창조물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이들이 빛입니다. 그런데 그 빛은 참 빛이 이 세상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감추어진 빛으로 살게 됩니다. (마르4:21~23) 2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22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23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22절은 이중 부정의 곡언법입니다. 곡언법은 어떤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히브리 사람들이 잘 쓰던 그런 수사법입니다. 그 구절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보면 ‘드러내려고 숨기고, 나타내려고 감추었다’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속에서는 등불이, 빛이 제 역할을 할 때 은닉되고, 감추어지고, 숨겨진다는 말인 것입니다. 천국 자체가 이 역사와 세상 속에 은닉되어 있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빛들 역시 이 세상 속에서 감추어지고 숨겨진 빛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드러나기 위한 감추어짐이요, 나타나기 위한 숨겨짐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삶, 소금과 빛의 삶은 이 세상에서 부인당하고, 비워지고, 약해지고, 무력한 자로 낮아지고, 섬기는 자로 내려가는 삶인 것입니다. 감추어지는 빛이고 숨겨지는 빛이란 말입니다. 자신의 의로움이나 선한 행위로 세상을 비추는 빛이 아니란 말입니다. 뭔가 대단한 업적을 쌓아 세상을 놀래키는 삶이 아니라, 티끌 됨이 폭로된 그 현장에서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의 은혜가 영광의 빛으로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게 빛입니다. 그게 소금입니다. 세상은 항상 빛을 끄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어두움을 감춥니다. 소금을 짓밟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부패를 감춥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의 소금과 하늘나라에서의 빛은 찬란한 영광을 발하고,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금과 빛이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면, 세상에 의해 짓밟히고, 꺼지는 모습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그게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산상수훈의 삶입니다. 그건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삶입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아침마다 읽고 지켜냈다는 산상수훈은 가짜입니다. 그건 간디에게 영광이 되는 산상수훈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 속에서 격발되는 산상수훈은 하느님에 의해 주도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철장으로 우리의 옛사람을 죽여 가시며,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만드시고, 우리의 죄와 악을 폭로시켜 우리를 애통하게 하시며, 예수를 위해 핍박을 받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게 산상수훈이고, 그게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그게 이 땅에 감추어진, 은닉된 하느님 나라 백성들의 삶입니다. 그렇다고 거기에서 낙심하셔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 속에서는 감추어지고, 숨겨짐으로 해서 하느님의 영광과 그 분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여지게 되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빛이신 하느님과 소금이신 우리 주님의 모든 풍요를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뭐 대단한 거 하려고 하지 마시고, 여러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난 죽었습니다’하며 죽어 버리세요. 그게 빛과 소금입니다. 대단한 칭송을 얻고, 대단한 명성을 쌓는 것이 빛의 삶이 아니라 예수만이 나의 힘이라는, 예수 믿는 믿음이 빛입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그 분의 능력을 중간에서 가로채지 마세요.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것이 하느님에게 미움 받는 것임을 잊지 마시고, 좋은 일을 하시거든 감추어진 등불처럼, 저주 받은 소금처럼 숨어 버리세요. 그 소금의 맛을 잃을 때, 여러분은 밖으로 내쳐져서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거름 취급도 못 받는단 말입니다. 어떠세요?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빛과 소금의 삶과 성경이 말하는 빛과 소금의 삶이 많이 다르지요? 다른 건 다 잊어도 니다. 한 가지만 꼭 기억하세요. 그 어떤 선한 일도 그 일이 자기의 자랑이 되고, 자신의 인기에 도움이 되며, 자신의 점수로 매겨지게 되면 그 즉시 그 일을 중단하세요. 그게 말 위에 놓여 찬란한 빛을 비춘다고 너스레를 떠는 빛을 잃은 등불이고, 그게 바로 하느님에 의해 불 소금을 맞을 짓입니다. 감추어지고, 숨겨진 등불과 소금, 거기에서 증거 되는 하느님의 영광, 그 진짜 빛과 그 진짜 맛을 확실하게 챙기십시오. 그걸 모르는 자들은 다 죽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도 지옥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가 지옥을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세상이 지옥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죽은 자들의 세상에서 인기를 얻고, 소유를 쌓고, 명성을 얻으려 하지 마세요. 죽은 좀비들이 재벌도 되고, 인기 연예인도 되고, 스포츠 스타도 되고, 작가도 되고 합니다. 그게 부러우면 안 돼요. 그런데 왜 우리는 죽은 자들의 소유와 인기와 명성에 이처럼 부러움을 금치 못합니까? 그게 아직 덜 영근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빛과 소금의 삶이 점점 영글어 가게 될 때 우리는 그러한 세상의 힘들을 초개처럼 여기는 진짜 짜고 진짜 밝은 빛과 소금으로 살게 될 것이고, 반드시 완성의 자리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만 꼭 붙들고 빛의 삶, 소금의 삶, 잘 견디며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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