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성경바로보기 / 떡 하나 주면 정말 안 잡아먹을까 1 (마르13,28-37)
이전글 이전 글이 없습니다.
다음글 송영진 신부님_<사도 직무, 신앙인들의 임무>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05 조회수5,844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7. 5. 성경바로보기

 

 떡 하나 주면 정말 안 잡아먹을까 1 

 

(마르13,28-37)

28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와진 것을 알게 된다. 29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 온 줄을 알아라. 30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31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2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33 그 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 34 그것은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종들에게 자기 권한을 주며 각각 일을 맡기고 특히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는 것과 같다. 35 집 주인이 돌아 올 시간이 저녁일지, 한 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혹은 이른 아침일지 알 수 없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 와서 너희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큰 일이다. 37 늘 깨어 있어라.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 전래동화 중에 해님달님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떡장수 엄마가 장에서 장사를 마치고 산을 넘고 고개를 건너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호랑이가 나타나죠. 그리고는 연신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호의를 베풀면서 어머니가 팔다 남은 떡을 다 빼앗아 먹습니다. 그렇게 떡을 다 빼앗아 먹은 호랑이가 그냥 배를 두드리면서 갈 길을 갔나요? 아닙니다.

호랑이는 그 어머니에게 더 이상 남은 떡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 어머니를 잡아먹어 버렸어요. 그리고는 어린 남매가 남아있는 집으로 가서 어머니 흉내를 내면서 그 남매까지 해치려고 하죠. 손에다가 뭐 밀가루도 바르고 별짓을 다합니다. 그때 남매는 하느님께 기도를 해서 동아줄을 내려달라고 해서 하늘로 올라가서 해님과 달님이 되었다는 그런 동화에요.

호랑이는 썩은 동아줄을 타고 남매를 잡으러 하늘로 올라가다가 동아줄이 끊어져서 수수밭에 떨어지는 바람에 수수의 꼭대기가 그렇게 뻘건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붙여 놨어요.

제가 복음을 알게 된 이후에 이 해님달님이라는 동화를 소재로 한 뮤지컬을 보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미 그 이야기의 내용을 이미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떡장수 어머니가 호랑이의 그 호의를 가장한 속임수에 속을 때마다 참 마음이 안타까웠어요.

결국에는 떡도 다 뺏기고 심지어 잡아먹히기까지 할 텐데 그 어머니는 자기를 잡아먹지 않겠다는 호랑이의 꾀임에 빠져서 자신의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팔다 남은 떡을 계속해서 호랑이에게 제물로 바치는 모습이 꼭 지옥에 가기 싫어서 하기 싫은 종교행위를 억지로 하고 마음에도 없는 사랑과 섬김을 짜내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는 오늘날 교회의 교인들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살기 위해 떡을 바치는 거죠.

목자들은 강론대에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라고 으르렁거리고 교인들은 회중의 자리에 앉아서 '정말 그러면 정말 지옥 안 가고 살 수 있어요?' 이렇게 맞장구를 치면서 자기의 소유와 에너지를 털리는 형국. 그게 꼭 사악한 호랑이와 어리석고 불쌍한 떡장수 어머니같지 않으십니까?

사실은 주기 싫어요. 하기 싫습니다. 내 떡이거든요. 그런데 그 떡 주면 안 잡아먹는 다니까 억지로 내놓는 거죠.

 

성도는 열심히 떡을 바침으로 죽음을, 지옥을 모면할 수 있는게 아니에요. 성도는 자신의 수중에 호랑이에게 바칠 떡이 하나도 없다 할지라도 어떤 이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삼켜서 파기시켜 버렸다라는 그 믿음으로, 그래서 나에게 떡을 요구하는 지옥의 호랑이는 비록 내가 떡을 내놓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수 없다는 그 믿음으로 지옥을 모면하는 거예요. 믿음으로. 그게 성도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 은혜의 현실을 당신 백성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때때로 성도의 삶 속에 내어 놓을 떡이 없게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너를 구원한다라는 것을 성도들에게 각인시켜 주기 위해서 떡을 내놓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죠.

마귀는 항상 떡 하나 주면이라는 이 인간 행위를 단서로 제시해요. '선악과를 따먹으면'이라는 행위를 근거로 하느님 처럼이라는 자기규정의 유혹을 했던 에덴동산의 그 마귀가 똑같은 방법으로 역사 전체를 아우르며 인간들을 미혹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묵시라는건 과거 현재 미래가 통합된 개념이거든요. 절대 연대기적으로 역사적인 순서로 그걸 이해하시려고 하면 안 돼요. 창세기의 뱀은 전 역사를 아우르며 계속 활동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창세기의 아담이 바로 우리란 말입니다. 그게 묵시에요.

 

인간들은 가치있고 소중하고 능력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생산되어지고 만들어지고 축적이 된 그 떡으로 생존과 행복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라는 아주 근사한 부추김이죠. 그게 마귀의 부추김이란 말입니다.

너희들은 가치있는 존재고 힘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떡을 생산하고 축적할 수 있다라고 부추겨 주는 거예요.

왜 하느님에 의해서 수동적이며 피동적으로 끌려만 가야 하냐는 것이죠. '선악과 먹어 먹으면 이렇게 돼'라고 하는 거예요.

'너의 떡으로 너의 생존을 너의 행복을 사수하라'라는 것입니다. 너의 떡으로. 멋지죠? 그래서 인간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인간들이 그 마귀에게 떡을 바치며 살아요. 모든 인간이 나라는 왕의 나라는 존재 이 왕의 안위와 구원을 위해서 편안함을 위해서 그리고 그 위대한 왕의 자존심을 위해 마귀가 제시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려고 혈안이 되어서 살아요.

눈에 보이는 나의 행위와 나의 소유가 마치 나를 구원할 수 있을 것처럼 마귀가 요구하는 떡을 생산하고 축적하여 세상 신의 제단에 올려놓는 거예요.

 

세상 신의 본체는 원래 예요. ! 결국은 나를 위해서 그 세상의 떡을 나에게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게 인류의 역사에요. 여러분 인간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에요. 아니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는데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고요? 네 하느님의 형상이라는건 인간이 하느님과 같은 능력을 소유한 자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건 인간이라는 존재는 완전히 비워져서 하느님이라는 존재에 의해 채워져야 완전히 하느님 것만 나와야 그게 하느님의 형상인 거예요. '비로소 그때 존재일 수 있다' 이게 바로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란 뜻이에요.

바오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하느님의 형상이라 그러잖아요.

고린도후서 44절에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워서. 필립보서 27절 이하의 자기를 비워서 하느님의 뜻으로 자기를 채워서 살아버리셨잖아요. 그래서 나는 내가 원하는 말 내가 원하는 행위 하나도 안 했고 내 안에 있는 성령이 다 하신거라 그러시잖아요. 하느님이 시키시는 말만 했다 그러죠. 그게 하느님의 형상이에요. 내가 비워지고 하느님이 나에게 채워져서 하느님 것만 나오는 거!

그러니까 하느님의 형상이라는건 자기부인의 그 완전함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 하느님의 형상인 거예요. 내가 완전히 부인이 돼야 하느님이 채워지고 그때 하느님 것만 나오는걸 하느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느님과 같은 능력을 사유한 자로 지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이다 이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인간은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서 하느님의 뜻 안에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30절과 31절에 하느님 말씀의 영원성! 그 영원성 불변함이 선포되고 있는 거예요.

본문 30절 보세요. 30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31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때에 관해서 묻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대답해 주신 말씀이에요. 모든 것이 다 사라져도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의 언약, 하느님의 말씀만이 끝까지 남아서 다 이룬다 성취가 된다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 '테텔레스타이' 다 이룬다 라는 것이 십자가 위에서 선포가 되어 버렸죠. 다 이루었다. 그렇죠? 하느님의 언약 말씀 묵시가 다 이루어졌어요.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러니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현상이나 현실 행위로 판단할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속에 담긴 완료된 미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 거예요.

천지는 다 없어질지도 모르나... 우리의 행위같은 건 다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사건, 정황, 현상, 현실 다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끝까지 남는 영원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밖에 없다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진다 그랬어요. 그 하느님의 말씀이 다 이루어진다라는 것은 이 묵시의 완료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말씀의 완료성. 이거는 반드시 완료될 것이고 이미 완료되어졌다라는 거예요.

그렇게 다 이뤄졌으니까 그 완료된 묵시의 영원속에서 이 현실을 바라봐야지, 없어져 버릴 이 행위와 사건과 현실에 묶여서 자기의 그 미래를 불안해하면 안 되는 거예요. '내 행위와 이 사건 때문에 나의 미래가 이렇게 저렇게 바뀌지 않을까?' 이게 아니란 말입니다.

말씀이 완료되어 있는 거고, 이 행위와 사건과 현실이 흔들리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 흔들리는 현실을 갖고 미래를 추측하거나 판단하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떡을 준비하여 미래를 준비하는게 아니라니깐요.

내가 호랑이에게 떡을 내놓아서 미래를 준비하는게 아니라, 미래는 확정돼 있고 내가 떡을 내놓고 안 내놓고는 그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가 없는 거예요.

 

모든 현상과 현실이라는건 다 사라질 거예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성취될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그 현상과, 사건과, 현실과, 행위가 차곡차곡 쌓여서 미래가 결정되는게 아니라, 결정된 미래가 있고 그 미래가 현재와 과거로 이렇게 쏟아져 내려오는 거예요. 이게 시간이에요.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게 아니라니깐요!

완성된 미래가 우리에겐 이미 주어져 있고, 그 미래가 여기에서 꽃피우는 거예요. 묵시라는건 완료되어 있는 것인데 하느님의 계획이고 뜻이고 말씀이니까 그 묵시는 씨앗인 거예요. 그 씨앗이 활짝 피어서 이 씨앗의 내용을 보여주는거 이게 바로 역사라 말입니다.

그러니까 역사는 완료된 묵시의 가현적 현상인 것이지, 이 역사에 의해 묵시가 흔들리지 않는다 말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언약이 흔들리는게 아니란 말이에요. 여러분.

 

오늘 내용이 조금 힘들 수도 있지만 여러분들이 잘 들어서 여러 번 들어서 완전하게 숙지를 해 놓으셔야 돼요. 그래야지 여러분이 어디 다른데 가서라도 이 말씀이 과연 성경에 근거하여 옳은가 틀린가를 분별할 수 있어요. 늘 유아적 수준에서 여러분을 위로하고 달래 달라고 하면 안 돼요.

정말 중요한건 인간과 인간이 겪는 이 현실이 아니라 하느님의 언약이며 말씀인 거예요. 그 언약의 성취의 과정에서 인간의 구원이 재료로 쓰이는 것이지, 인간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니깐요. 이 인본주의에 빠져있는 인간들은 항상 이걸 목적으로 두기 때문에 나머지가 전부 주변머리가 돼버리는 거예요.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중요한건 하느님이에요. 하느님의 언약이고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 필요했던게 인간의 구원이었던 것이지,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영광이 사용된게 아니란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에덴동산에서 가장 소중한게 인간이었나요? 아닙니다. 동산 중앙에 뭐가 있었어요.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있었다고요. 그 두 나무가 가장 중요한 겁니다. 인간이 그 두 나무보다 더 중요했다면 그까짓 선악과 하나 따먹었다고 인간을 쫓아내면 안 돼요.

인간이 선악과의 훼손으로 말미암아 쫓겨났다는건 정말 중요한건 동산 중앙에 심어져 있었던 선악과와 생명나무라는 뜻이에요. 인간이 소중한게 아닙니다. 여러분.

인간은 하느님의 언약 아래에 있는 자이지 언약을 타고 넘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는 하느님의 언약 즉 복음을 담고 있는 모형이라 말입니다. 그게 중요한 거예요. 이걸 드러내기 위해 그 안에는 하느님의 속성과 영광과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이걸 드러내기 위해 인간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요걸 훼손하는 바람에 쫓겨나는 거라 말입니다. 인간은 그러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원리를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한 거예요.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담고 있었던 하느님의 속성과 하느님 나라의 그 원리를 모형으로 보여준 거예요. 그게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에요. 그냥 어떤 나무가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잘 들어보란 말이에요.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선악과 시험을 통과할 수가 없는 존재에요. 선악과는 하느님이 출제하신 하느님 나라 입학시험 문제에요. 그거 풀면 영원히 살아요. 그런데 하느님의 시험은 피조물이 풀 수가 없어요. 하느님의 시험은 하느님만 풀 수 있어요.

그런데 하느님은 한분입니다. 그 한분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만들어서 그 시험문제를 통과시켜 당신의 나라에 들여보내시고 싶어 하세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하느님은 한분인데, 그리고 하느님이 출제한 문제는 하느님 밖에 못 풀어요. 하느님이 풀어야 된다 말입니다. 그 선악과 시험문제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풀게 하세요.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 율법의 완성 이게 선악과 시험이잖아요. 율법의 마침, 율법의 완성이 되셔서 선악과 시험을 통과해 버리세요. 그리고는 그 합격자의 신분을 하느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 거저 먹여주세요. 이게 생명나무에요.

그러니까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는 하느님의 은혜,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구조 하느님의 속성을 담고 있는 거예요.

그 두나무 자체가. 그걸 드러내는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고, 그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내가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이제요. 그걸 드러내가 위해 인간의 구원이 필요했던 것이지 인간의 구원이 중심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선악과 따먹고 하느님처럼 된 인간들은 이걸 인정하지 않아요. 내가 하느님거든요. 내가 신이거든요.

자 바로 그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안에 담겨 있는 그 내용이 복음이고, 그걸 은혜의 원리라고 하는 거고 그걸 사랑이라고도 부르는 거예요. 그게 하느님 나라의 구조이며 하느님의 속성인 거죠.

성도는 바로 그것을 증거하는 자로 사는 거예요. 너희들은 내 증인이 되리라 했을 때의 그 일이 바로 그거 증거하는 거예요.

하느님은 어떤 분이고 얼마나 크신 분이며 어떤 용서와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는가를 증거하는 것이지, 하느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거 아니라니깐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아니에요. 당신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성도는 하느님으로부터 생명나무 열매(實果) 즉 하늘의 떡을 얻어먹는 자이지, 선악과 시험을 스스로의 힘으로 통과하겠다고 다른 말로 스스로 떡을 생산해 내어서 살아보겠다고 자존심을 부려서는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떡 하나 내놓아서, 떡 하나 주어서, 선악과 시험 풀어서, 생명나무 실과 먹고 살아나는게 아니라 떡이 생명나무실과가 나에게 무상으로 먹여지는 거라 말입니다. 이게 하느님 나라의 구조예요.

 

하느님 나라의 구조(構造)가 뭐예요. 이 땅에 그 하느님 나라 양식(樣式)대로 만들어진게 성막(聖幕). 성막의 중심은 지성소. 지성소 안에서도 시은좌. 그 시은좌와 법궤가 어떤 구조로 만들어져 있어요? 시은좌는 법궤 뚜껑입니다.

용서가 발해지는 곳이에요. 시은좌 (施恩座, Mercy Seat) 자비와 은혜가 부어지는 곳이에요. 그 밑에는 증거궤 속에 증거판이 들어있죠.

그런데 그 증거판은 인간의 실패를 상징하는 거예요. 25장에서 바로 그 속죄소의 양식이 주어지는데 32장에서 이놈들이 금송아지 만드는 바람에 증거판이 내려오다 깨져버리고 다시 그 실패를 근거로 하여 올라가서 내려온 그 증거판이 들어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에 구조란 하느님은 항상 용서하시는 분으로 계시고, 피조물은 항상 용서받는 자리에 있는 거예요. 그 용서를 부으시는 분과 용서를 받는 자 사이를 채우는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게 용서에요. 그게 하느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고 우리는 피조물의 자리에 납작 내려앉아서 그 용서와 생명력을 받아내는게 하느님 나라 구조란 말입니다. 이게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이고 이 현실을 드러내는게 이 땅에 심겨진 하느님 나라 성도는 그걸 증거하는 거예요.

하느님의 사랑은 얼마나 큰 것이며 그분의 용서는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를 드러내는 자이지 내가 떡을 내놓아서 하느님의 용서도 필요 없는 그런 훌륭한 자로 업그레이드 되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안된다는 거 알잖아요. 거짓말들 하지 마세요. 자꾸 변했다 하는데 성숙됐다 하는데 생각을 좀 하세요.

여러분 성경이 100개 지키다가 하나 어기면 다 어긴거라 그랬어요. 그러면 성숙이라는 거의 정의가 뭐예요? 도대체 성숙이라는건 어떤 시점과 비교를 하여 (내가 나아졌다라는걸 성숙이라고 하는데) 그 나아진 상태에서 여러분이 완벽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냐고요? 아니죠? 못 지키잖아요.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죄만 생각해요. 그렇다면 성숙이 뭐냐고요. 도대체. 100개 지킨 사람이나 1,000개 지킨 사람이나 그 사람의 삶 속에서 하나의 어김이 있을 땐 다 똑같다고 하는데, 뭐가 성숙이냐고요. 100개 지키는 사람이 200개 지키면 성숙이라 그래요? 하느님은 이것도 죽인다 그랬단 말입니다. 그러면 뭐가 발전이고 뭐가 성숙이냐고요.

나는 끝까지 죄인으로 하느님 앞에 폭로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인에게 쏟아 부어지는 하느님의 은혜만이 드러나야지, 내가 자꾸 떡을 내놓아서 다른 이들보다 괜찮은 존재가 되려고 하는건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잘 이해해야 돼요. 여러분 선악과 따먹고 선악의 판단을 내가 하고 내가 하느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우주의 중심이 나다라고 하는 자들은 절대 이거 수긍 못해요. '아니야 난 발전할 거야. 나는 항상될 수 있어.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나는 예수님 가운데 토막이야.' 그걸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성도는 죽는 날까지 "하느님 나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내 안에서 어떻게 선 한게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까. 하느님 나는 끊임없이 뭔가를 선택하면서 사는데 그 선택이 어떻게 내 선악구조의 판단에 의해서 전부 나에게 유익되는 쪽으로만 선택해요. 그런데 그걸 하느님이 죄라고 하시니 하느님 나는 죽는 날까지 죄만 짓는 거네요."

보세요. 우리의 삶은 전부 선택이잖아요. 그런데 그 선택을 전부 여러분이 유익한 쪽으로 한다 말입니다. 아니라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나에게 물질적인 손해가 오는 행위를 택했는데요? 네 그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얻을 다른 형이상학적 유익을 염두에 두고 그거 택한거 아니에요! 역시 내 유익 아닙니까?

인간이 이 선악구조를 갖고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선택하면서 살아가는걸 죄라고 하잖아요. 그게 선악과 따먹은 인생 아니었습니까?

그러니까 나는 늘 죄만 쏟아놓는 존재입니다. 어떤 착한 일을 해도 하느님 거기에는 전부 나의 의도가 숨어져 있어요. 하느님 저는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 자리로 내려가는게 성도란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모든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떡을 받아먹는 자여야 돼요. 그게 하느님 나라의구조예요.

 

그래서 모든 인간의 대표인 아담이 아담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람이란 뜻이거든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으로 역사가 시작되는 거예요. 인간의 시작은 여기다. 이게 죽은 흙의 모습이거든요. 우리가 죽은 흙이었단 말입니다. 하느님이 생기를 불어넣기 전에 그냥 죽은 흙이었어요.

여기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여기에서 어떻게 이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가를 보여주는게 성경이에요. 그래서 출발은 죽은 흙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선악과를 먹어야 돼요. 먹지 말라고 준게 아니라 먹으라고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먹은 자가 '무트 타무트' 반드시 죽어야 되는데 어떻게 살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 성경 전체는 은혜와 십자가 이외에 다른 이야긴 단 한마디도 적혀 있지 않은 것입니다.

단 한마디로 '너희는 떡을 못 만든다'에서 역사가 시작된다 말이에요. 그런데 떡을 만들어라 너희는 떡을 만들 수 있다라고 계속 채근질을 해대는 자가 있으니 그게 마귀인 거예요. 선악과 따먹으면 그게 반복되는 거예요. 우리의 삶 속에서 선악과 따먹으면 된다니까 해봐 성경은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고 나는 떡을 생산하여 떡을 바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라고 너스레를 떠는 그런 상태의 인간을 죽은 자라 그래요.

 

(에페 21-3) 1 여러분도 전에는 죄와 잘못을 저질러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여러분이 죄에 얽매여 있던 때에는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고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의 두목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으며 오늘날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조종하는 악령의 지시대로 살았습니다. 3 실상 우리도 다 그들과 같아서 전에는 본능적인 욕망을 따라서 육정에 끌려 살았던 사람들로서 본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 이 모습이 바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라고 유혹을 하고 있는 세상 신에게 붙들려서 그가 요구하는 떡만을 추구하며 사는 인생의 모습이에요. 그렇게 죽은 자들은 세상 신에게 속아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며 떡을 생산한다 그래요. 그게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라는 거예요.

그들은 신을 이용해서라도 자신들을 살릴 바로 그 떡을 얻어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요.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그렇지 않습니까? 하느님을 이용해서라도 내가 만들 떡 내가 축적하고 생산할 그 떡을 얻어내는데에 총력을 기울여요.

여기에서 바울은 모든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 그래요. 생래적 진노의 자녀란 뜻이에요. 날 때부터 그 말은 죄의 종. 죄인 등으로 바꿔 부를 수 있죠. 진노의 자식 죄의 종. 죄인 종은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주인을 이루는 부속품 같은 거예요. 그게 종이에요. 고대시대 때 종의 개념 그러면 죄의 종인 인간이 하는 행위는 그 행위도 모두 주인의 것이 되거든요. 그러면 죄의 종이 행하는 착한 일은 누구 거예요? 주인의 것이에요. 그래서 죄예요. 죄의 종이 하는 모든 행위는 주인의 것이기 때문에 죄의 종인 상태에서 행하는 인간의 그 어떤 선한 행위도 다 죄입니다.

그래서 간디나 슈바이처의 행위가 죄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요. 그들은 하느님을 몰랐거든요. 심지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악영향을 미친 신학자가 슈바이처였으니까... 그들의 행위는 다 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바로 그 착한 일을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겠다는 거예요. 건전한 교회, 건강한 교회 웃기지 말라 그러세요. 하느님은 그 속을 들여다 보신다니깐요. 진짜 너희들이 내 영광을 위해서 그 일하는 거야? 아니지? 니네 교회 자랑하고 싶은 거지? 너 자랑하고 싶은 거잖아! 하느님이 그 속을 들여다 보신다니깐요. 그게 죄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우리는 떡을 생산하고 축적하여 생존과 행복에 이르려 하는 모든 인간에게서는 죄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돼요. 그게 마귀에게 속한 자의 상태요, 죽은 자의 상태입니다. 아니 근데 여기서는 살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산게 뭔지를 제가 가르쳐 드리려 그래요. 오늘.

그 산자들의 행위가 어떤 것인지 가르쳐 드리려 그래요. 그렇게 모두가 죽어있는 이 세상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모두가 죽어있었어요.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어요. 선한 것에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어요. 다 죽어 있었어요. 그분은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저주의 십자가를 지시므로 말미암아 어떤 선택된 무리의 죽음을 삼켜 버리시고 그들을 깨워 버리셨어요. 그리고는 그렇게 해서 산자들에게 깨어 있어라라고 명령을 하세요. '깨어 있어라' 그게 오늘 본문이에요.

깨어 있어라에서의 깨어 있음이 뭔지를 분명히 이해를 하고 가야 된다 말이에요. 주인이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각각의 사물을 맡기면서 깨어 있으라라고 명령을 하고 떠났어요. 그런데 그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몰라요. 따라서 종된 자들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항상 깨어 있어야 돼요. 눈꺼풀이 닫히면 이쑤시개를 올려서라도 깨어 있어야 돼요. 그렇죠? 항상 깨어 있으라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건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명령이죠. 가령 하루에 세 시간씩만 자고 깨어 있어라라던지, 낮에는 자고 밤에는 깨어 있어라라는 등의 구체적인 명령은 얼마든지 인간의 능력으로 수행이 가능한 명령이에요. 그런데 항상 깨어 있어라 늘 깨어 있어라라는 명령은 억지입니다. 그건 불가능이거든요.

인간이 잠을 자지 않고 깨어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어요. 인간은 반드시 자야 돼요. 그래서 고문 중에 가장 무서운 고문이 잠 안 재우는 거예요. 다 붑니다. 해봐서 알아요. 저는요. 다 불어요. 잠 안재우면... 때리는건 참을 수 있어요. 그런데 졸려 죽겠는데 지들은 계속 돌아가면서 자고 나는 안 재워, 그러면 나중에 다 불어요.

자 그렇다면 지금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깨어 있어라라고 명령을 하달하고 가는 그 주인의 명령의 진의가 무언가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육을 갖고 있는 인간의 특성상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을 보아서 그 깨어 있음의 주체가 종들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라는 추론이 가능하죠? 할 수 없는 것을 주인이 뻔히 아는데 깨어 있어라라는 억지를 부릴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 그분은 예수니까!

그러니까 항상 깨어 있어라에서의 그 깨어 있음의 주체가 그 종이 아니라 다른 분일 수도 있겠다라는 추론이 가능해 지잖아요. 너무 서둘러서 죽어 있던 자가 이제 깨어났으니까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로 살아내는게 착한 일 많이 하면서 종교행위 열심히 하면서 살아내는게 깨어 있는 것이다라고 그렇게 추측하면 안 돼요. 그게 떡을 생산해 내어서 자기에게 떡을 바치는 일이 될 수 있다니깐요. 얼마든지...

 

생각해 보세요.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서도 주님은 깨어 있으라라는 권고를 하셨어요. 그렇죠? 그 비유의 핵심은 깨어 있으라였어요. 그런데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깨어 있었어요? 자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깨어 있는 자로 여김을 받아 혼인잔치에 빨려 들어갔어요. 그리고 문이 닫혔어요.

자고 있었는데 신랑이 와서 '들어와' 그러더니 나머지 어리석은 애들 기름 사러 간 사이에 문을 확 닫아 버렸어요. 그들의 눈이 뜨여 있어서가 아니라 신랑이 끌어당겨 버린 거예요. 그래놓곤 깨어 있었다고 쳐줘요. 슬기로운 처녀라 그래요. 그러면서 너희들도 깨어 있으라 그래요. 그러면 그 처녀들처럼 하면 되는거 아니에요? 그 처녀들이 자고 있었다니까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실 거예요? 주님이 요구하시는 깨어 있음은 우리가 생산해 낼 수 있는 깨어 있음이 아니다라는 걸 우리는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서 확실하게 감지하고 있어야 돼요. 오늘 본문의 비유와 병행이 되는 비유가 루가복음에도 나와요.

 

(루가1235-40)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36 마치 혼인잔치에서 돌아 오는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라. 37 주인이 돌아 왔을 때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그 주인은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 줄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녘에 오든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39 생각해 보아라. 도둑이 언제 올지 집주인이 알고 있었다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 오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40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여기서는 집주인이 어디에 갔다 오는 것인지가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어 있어요. 혼인잔치 집.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혼인잔치가 언급이 되고 여기에서도 혼인잔치가 언급이 되고 있다는 걸 주의해서 봐야 돼요. 깨어 있으라라는 명령과 항상 혼인잔치가 같이 가고 있어요. 도대체 혼인잔치와 깨어 있음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주인은 혼인잔치를 지금 다 치르고 돌아오는 중이죠. 혼인잔치를 치르고 돌아오는 거예요. 혼인잔치를 행하러 오는게 아니라, 잔칫집으로부터 오는 거라니깐요.

그런데 이 이야기가 어디 붙어 있냐하면 마지막 때에 주님의 재림의 때를 설명하는 거라 말입니다. 그런데 혼인잔치 집에서 오고 있어요. 예수님이... '혼인잔치는 나중에 치뤄지는거 아닌가?' 자 이런 질문을 하나 여러분이 갖고 있어야 돼요. 그 주인이 혼인잔치의 주인공이었는지 아니면 하객이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비유니깐요. 여기서 중요한건 그 주인이 다녀온 혼인잔치가 이미 완료된 잔치라는게 중요해요. 그 주인은 지금 잔칫집에서 돌아오는 거니까...

 

유대인들의 혼인잔치는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 이상 이어져요. 그 혼인잔치에 갔던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주인이 혼인잔치에 가면서 종들에게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라고 명령을 해요. 어디서 봤어요? 출애굽기에서 봤잖아요. 과월절!

자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허리에 띠를 띠고 등을 들고 서있으래요. 문 앞에 교대로 깨어 있으라도 아니고... 그 명령을 듣는 모든 종들아 깨어 있으라에요.

 

본문 37절 보세요. 37 주인이 돌아 왔을 때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그 주인은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 줄 것이다.

 

그렇죠. 주인을 기다리는 모든 자가 깨어 있어야 돼요. 리가 논점 일탈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이 비유의 배경으로 붙들어야 할 것이 바로 혼인잔치의 완료성이라는 점이에요. 혼인잔치는 완료됐다는 거예요. 종들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신 주인이 주님이라는 것에는 별 이견이 없으시죠?

주님입니다. 이제 그 주인이 다시 돌아오신 그 가시적 귀환을 우리가 재림이라고 그래요. 그 재림의 때를 준비하라는 주님의 강화의 그 내러티브 안에 이 비유가 들어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를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신 주님이 가신 곳이 혼인잔치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 잔칫집에서 내려오신대요. 그러니 보세요. 열 처녀의 비유와 오늘 본문의 비유를 합쳐보면 주님은 이미 완료된 혼인잔치에서 혼인잔치를 종결하기 위해 오는 거죠. already not yet 입니다. 이게 바로 녜정(豫定)이라는 거예요.

이미 영원이라는 영역 속에서 완료가 된 어떤 묵시가 그래서 제가 묵시는 완료가 됐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이미 영원속에서 선택되어져 있고 완료되어 있는 분들이에요. 영원이라는 영원속에서 완료가 된 어떤 묵시가 이 세상에 역사로 펼쳐지는 것! 이걸 예정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느님의 뜻, 언약, 말씀은 변개될 수도 없고 실패될 수도 없어요. 그런데 그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합되어 있는 개념인 영원이라는 영역 속에서는 기다림과 순서라는게 없으니까, 이미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세우신 계획 말씀은 완료된 거란 말입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곳이니깐요.

그 완료돼있는 하느님의 묵시가 역사 속에서 이렇게 펼쳐지는 거예요. 묵시라는 두루마리를 쭉 펼치면 역사가 되는 거라 말입니다. 그걸 돌돌 말면 묵시가 돼요. 하느님의 언약이 되는 거라 말이죠. 그것이 미래로부터 치고 들어오는 걸 우리가 시간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역사라고 하는 거라 말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영원속에서 계획하신 건 절대 실패될 수 없다라는 그 완료성! 이게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게 맞지 라는 이 인정이 예정이에요.

영원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합된 개념을 영원이라고 그랬죠. 그 영원이라는 개념 속에서 역사를 보면 에덴동산에 아담 안에 내가 들어가게 되는 거고, 과거 현재 미래가 통합되어 있으니까. 성경을 보면 창세기의 내용이 바울로서신서에 나오고, 뭐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내용이 복음서에 막 나와요. 과거 미래 현재가 하나로 이렇게 뭉쳐저 있다 말입니다. 이게 묵시라는 거란 말이에요. 묵시.

 

그러니까 그 영원이라는 개념 속에서 역사를 보면 에덴동산의 아담 안에 내가 들어가서 내가 죄인이 되는 거예요. 리고 요한묵시록의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내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미래의 그게 영원이라고 그랬죠. 그 영원을 내가 믿음으로 살잖아요. 그 믿음으로 영원을 사는 자를 영생을 산다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지금 영생을 사는 거예요. 꽤나 무슨 행복하고 편안하고 이런걸 영생으로 착각하지 마세요. 영원을 사는게 영생인데 믿음 안에서 그 하느님의 완료된 하느님 나라를 내가 인식하고 있고 바라고 있다라는거 자체가 영생을 사는 거란 말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내가 가 있으니깐요. 믿음으로 역사는 순서를 가지고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처럼 보이고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것들에 의해서 마치 럭비공처럼 스스로 생명력을 발휘하면서 이리저리 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늘의 언약 안에 이미 완료되어 있는 것이 가시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일 뿐이에요. 그게 역사에요.

따라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는 이미 완료된 잔치인 거예요.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따라서 여러분이 지금 떡을 좀 못 내놓다고 해서 호랑이가 잡아먹어요? 못 잡아먹어요. 완료됐기 때문에...

그런데 이 인간들이 무서워서 자꾸 떡을 내놔요. 두려워요. 착한 일 안 하면 벌벌 떨려, 교회 하루 안 가면 주일미사 하루 빼먹었으니까 하느님이 나에게 무슨 해코지 하겠지? 벌벌 떨어 떡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려고 하는 거예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을 테니까... 그런데 떡 안 주면 잡아먹힌다고 착각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유가 없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여전히 짊어지고 있는 거예요. 방종하라는 말 아닙니다. 여러분 어떻게 성도라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혜의 깊이도 모르면서 자기의 잘남과 착함과 선함을 먼저 챙기려 그래요. 어떻게 자기의 열심을 먼저 챙기려 그래요. 어떻게 자기의 종교 행위를 먼저 챙기려 그래요. 칭찬받고 싶다는 거죠.

사제에게 칭찬받고, 교우들에게 칭찬받고, 심지어 세상에게도 칭찬받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일간지 신문에서 막 칭찬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되어 버렸어요. 이 시대에...

 

예수님은 아니라는데, 진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데, 오늘날 건강하고 건전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요. '멋지다' 그게 인간들의 집요한 죄성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완료된 그 나라로부터 가시적 역사 속에서 무언가 교육을 받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오시는데 그들이 바로 깨어 있는 자다라는 뜻이에요.

깨어 있음이 근거가 되어서 찾아오시는게 아니라, 주님이 찾아오시는 그 자리가 바로 깨어 있음의 자리라는 거예요. 명심하세요. 주님은 여러분이 떡을 얼마만큼 생산해 내었느냐를 근거로 해서 여러분을 찾아오는게 아니에요. 그런데 왜 자꾸 깨어있으라의 그 깨어 있음을 떡을 많이 생산해 내고 있는 상태라고 이해를 하냐 말이에요.

생각을 하지 않는 거예요. 생각을... 마귀가 그걸 노리는 거예요. '이 사회의 종말 생각하지 마. 뭘 생각해. 그냥 봐. 자꾸 봐. 신비한거 봐. 신비한거 체험해. 뭘 생각해.' 아니요 생각해야 돼요.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지켜내야할 명령이라기 보다 성령이 임한 자들에게서 나오는 필연적 자세인 거예요. 구원은 깨어 있음이라는 행위를 전제로 우리가 쟁취할 수 있는게 아니죠 이미 구원되기로 작정된 자들이 깨어 있음이라는 과정을 통과하는 거예요.

혼인잔치는 이미 완료된 잔치니까! 떡 하나 주어서 안 잡아 먹히는게 아니라, 이미 잡아먹힐 수 없는 자로 이 세상에 오는 거예요. 성도는. 그럼에도 인간들의 열심과 노력으로 떡을 내어 놓아야 잡아먹힘에서 풀려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고가 죽어 있는 상태에요. 알매니안 주의라고 하죠.

하느님은 지키면 살고 못 지키면 죽는다는 명령과 함께 이스라엘에게 율법과 제사라는 것을 주세요. 마치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그러는거 같죠? '지켜 살려줄게' 그러잖아요. 그 의도로 주신 것입니까? 그런데 마귀가 그 의도로 곡해 시켜버린다니깐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하느님의 의도는 그게 아니라니깐요.

하느님은 율법과 제사를 선악과와 생명나무로 주시는 거예요. 율법과 제사 율법이 뭐였어요? 선악과였잖아요. '먹지 마' 그런데 인간이 그거 안 먹을 수 있어요? 아니에요 인간은 꼭 따먹어요. 하느님의 말씀을 못 지킨다니깐요.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생명나무가 이 선악과를 밟고 선악과를 성취하고 완료하여 죽어야 할 자에게 먹혀야 되잖아요. 이게 제사란 말입니다. 완벽한 제물이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 하느님에게 대신 드려지는 제사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자가 거저 살아나는 거잖아요. 이게 생명나무와 선악과 이야기란 말입니다. 고 하느님의 말씀이 지금 복음이 주어지고 있는 거예요. 율법과 제사는... 그런데 마귀는 고걸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로 곡해시켜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했어요? 그래 떡 만들어야 돼. 오병이어의 기적이 여기에 이어져야 되는 거예요. 이 이야기에 그러면 명쾌하게 이어지죠.

그 예수님이 하늘의 떡으로 오신 분이란 말입니다. 그건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이 지금 생산해내고 축적하려 했던 그 떡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생명의 전제가 되고 근거가 되고 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너희는 절대 떡을 내어 놓아서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는 자가 아니니까 제사의 제물로 내려갈 내 아들을 의지하여 내게로 와라' 그런 은혜의 필연성을 설명하기 위해 그런 장치로 율법과 제사를 주신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율법과 제사로 떡을 생산해 내겠다고 수선을 피웠던 거예요. 그 떡을 부정했더니 이거 못 먹는 떡이야라고 예수님이 그랬더니, '니가 내 떡을 무시해'라고 예수님을 죽여 버렸다니깐요. '니가 뭔데 내 떡을 무시해. 니가 갖고 온 떡 그거 보다 내 떡이 나은거야' 이게 인간이란 말입니다. 이게 죄인이에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절대 자신의 무용함과 무력함을 폭로당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걸 이용하여 마귀가 율법과 제사를 오해시키고 악용하는거죠.

 

성도는 떡을 내놓아서 위기를 모면하는 자들이 아니라, 내 놓을 떡이 없는데도 호랑이가 잡아먹지 못하는 그 은혜의 현실을 경험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야 하느님이 사랑스러워져요. 내가 떡을 계속 내 놓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살려주는 그런 호랭이 같은 하느님은 내 사랑의 대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화목한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느님과...

예를 들어 어느날 하느님이 늙어서 나보다 힘이 없어지게 되면 그 떡 만들던 힘으로 뭘 하겠어요? 그 할아버지 때려 죽인다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억지로 하고 있어요. 하기 싫은데...

 

자 어떻게 우리가 내놓을 떡이 없는데도 어떻게 호랑이가 우리를 잡아먹지 못하는 그 현실이 우리에게 닥쳤죠. 십자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호랑이에게 통채로 먹혀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호랑이의 아가리가 찢어진 거예요. 그 십자가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아들과 그의 신부인 그 교회의 성혼이 이루어진거죠.

그러니까 성도는 이미 혼인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영원 속에 그 완료된 나라에 들어가 있는 사람인 거예요. 여러분은... 그들이 이 세상에 도대체 왜 우리와 예수님의 혼인에 예수님의 피가 필요하지? 왜 그런 신나는 혼인잔치에 왜 꼭 피가 필요하지? 이걸 확실하게 배우고 부활의 몸을 입고 다시 그 혼인잔치의 장으로 복귀하게 되는 거라 말입니다. 그게 인생의 목적이에요. 신앙생활의 목적.

왜 주인이 혼인잔치에서 오시는지, 그리고 혼인잔치를 위해 오신다고도 하는지 인제 아시겠죠? 그런 의미에서 already not yet(이미와 아직) 이라면 옳아요. 그러나 already not yet 사이의 그 갭을 인간의 떡만들기의 행위로 채워야 한다라는 의미의 already not yet 이건 틀린 거예요. already(이미)는 변개되거나 실패될 수 없어요. 그런데 not yet(아직)은 우리가 지금 역사 속에서 배워가는 그 과정. 완료의 지점을 향해가는 그 과정에서의 not ye(아직)이지 그걸 우리의 힘으로 채워 채우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자기의 혼인잔치에 왜 신랑의 피가 필요했는지를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유학을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의 죄악상을 나 자신과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폭로를 당해야 되고요. 수시로 넘어지는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처절하게 긍정해야 돼요.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그 용서의 크기를 알아요. 그리고 그 용서의 크기를 알아야 날 용서해 주신 분께 감사가 나와요.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마치 금방 성자가 되는 것처럼 '당신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술끊고 담배 끊고 착한 일 해야되고 그동안 집착하고 중독되어 있었던거 다 끊어야 되고...' 이 따우로 시작을 한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억지로 자기를 선한 자로 위장을 하기 시작해요. 사람들이... 그러다 보니까 '내가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이렇게 기특하게 여러가지를 행하는 구나' 해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굉장히 괜찮은 사람으로 스스로 인식을 해버려요. 그러니까 나를 용서하는 분에 대한 사랑이 싹트는게 아니라, 억지로 이걸 하게 하는 그분이 미워 죽겠는거예요. 속으로는... 그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그 마귀의 속삭임이 계속해서 들려오는데 하느님은 우리의 삶에 개입해 수시로 내놓을 떡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리세요. 그게 죄인됨의 폭로에요. 착한 일을 안한다는게 아니라 해 놓고도 옛날에는 그게 굉장히 자랑스럽고 그 일을 한 내가 기특했는데 이것도 사실은 다 내 만족과 나의 자랑과, 가치챙기기, 영광챙기기에서 나온 것이구나. 이걸 어떻게 하느님께 드려... 이리로 내려가게 된다니깐요. 그때 내가 내 놓을 떡이 자꾸 없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면 떡 하나 안 주면 잡아 먹혀야 되는데 떡 하나 안줬는데 안 잡아먹어. 안 잡아먹는데요. 하느님이... 그때 무릎을 치는거죠. '이게 복음이구나' 나는 그런 자인데 하느님이 그냥 거저 덮는 거구나. 이게 성도의 신앙생활이어야지 뭔 대단한 열심과 노력과 공로와 업적을 바리바리 싸들고 하느님 앞으로 가는 그런 개선행진이 아니라니깐요.

그냥 너무들 잘났어요. 오늘날 교회는... 그리고 너무 다 착해. 심지어 자기도 자기에게 속아요. 나중에는요... 하느님은 그 뽀샵을 엑스레이로 확 드러내버린다니깐요. 안 보려고 그러면 욜로 거울갖고 오고. 안보려 그러면 욜로 거울갖고 오고. ''이게 너야!'

 

성령받지 못한 사람은 결국 그 유리를 깨버리죠. 그게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성령받은자는 죄에 대하에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거기서 깨닫고 통곡하는 거죠. '하느님 어떻게 이런 인간을 위해 아들을 죽이셨습니까'로 내려가는거예요. 여러분 마귀에게 우리가 계속해서 떡을 내놓다 보면 마귀는 결국 그 떡을 내어 놓은 자까지 삼켜버리는 거예요. 떡을 내어 놓아야 살 수 있다라는 것은 정확하게 선악과를 먹어야 하느님처럼 되어야 된다라는 마귀나라의 원리인 거예요. 그게 힘의 원리인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은 마귀를 당황케 만들어 버리시는 거예요. 내 놓을 떡이 없는 자들을 당신의 죽음으로 바쳐서 무상으로 건져버리는 거예요. 마귀가 당황하죠. '어 저러면 죽여야 되는건데 그런데 하느님이 왜 살리지?' 마귀가 당황하죠. 그 당황이 은혜라는 거예요.

 

마귀나라의 원리가 사필귀정 권선징악의 기특한 원리로 돌아가는 거라면 하느님 나라의 원리는 어부지리 무위도식의 원리로 운영되는 것이에요. 힘의 원리 속에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내가 '왜 그래야 돼' 그러나 그래야 피조물이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앉게 되고 왕이신 하느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세요. 하느님 나라의 구조는 하느님은 늘 용서하시는 자리에 앉아 계셔야 되고, 그분의 백성들은 늘 그분의 생명력 그게 뭐라 그랬어요? 바라크 복. 그분의 복과 은혜의 용서를 받는 자리에 내려가 있는게 이게 바로 하느님 나라의 구조예요.

그리고 그 상태가 뭐라 그랬어요? 하느님이 하느님 자리에 앉고 피조물이 피조물 자리에 앉는 상태를 사바쓰 안식이라고 한다 그랬잖아요. 그게 그게 안식이라니까요. 성경은 바로 그 상태를 하나됨, 연합, 혼인 등의 여러 단어로 표현하는 거예요.

하나됨은 우리가 굉장히 괜찮은 존재가 되어서 동질성을 발휘하는게 하나됨이 아니라, 우리는 완전히 부인되고 자기부인 자기 절망속에서 하느님 것이 완전히 부어져서 하느님이 누리는 것을 함께 누리게 되는 그 면목없는 상태가 하나됨 이에요. 그게 혼인이에요. 그래서 바로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혼인잔치가 기록돼 있는 거예요.

 

꼭 알고 계셔야 돼요. 그러한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자각하고 그 수긍하는 상태. 나와 세상의 무용함과 무력함을 자각하고 있는 상태. 내가 뭔가 괜찮은 일을 하고 있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고, 열심히 종교행위하고 있고 이 상태가 아니라, '나는 떡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자가 아니네요' 고 상태가 깨어있는 자라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깨어있는 자 열 처녀의 비유에서 슬기로운 다섯처녀가 자고 있었던 거예요. 저희는 이런 존재입니다가 폭로되는 상태가 깨어 있는 거예요.

온 세상은 다 자고 있어요. 다 자고 있는데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한 무리가 있어요. 그들만이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 하느님 나라로 그냥 난짝 들려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나머지 다섯처녀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라는게 들켜지자 마자 내려오셔서 그냥 확 끌어당기고 문 닫아 버리는 거예요.

깨어 있어라, 기름을 준비해라, 열심히 수고해라, 전도해라, 선교해라, 헌금해라 그 이야기아니란 말입니다. 죄송하지만 거기에 여러분의 얼마만큼의 진실이 담겨 있어요. 역시 그 행위의 중심은 나잖아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 하는 그 행위! 그게 죄란 말입니다. 왜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을 하세요? 도대체 뭘 근거로? 그리고 나는 내 구원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냐 말이에요.

여러분에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인류 최초의 결혼장면으로 돌아가볼께요.

 

(창세221-24) 21 그래서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시고는 22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다음, 아담에게 데려 오시자 23 아담은 이렇게 외쳤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르리라!'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게 되었다. 24 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하느님께서 아담이라는 신랑을 잠들게 하시고 그 아담의 옆구리를 뚫어서 심장을 지키고 있는 갈비뼈 하나를 뽑아 내세요. 그리고는 그것으로 또 다른 사람을 만들어 내세요. 하느님은 그 사람을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어요. 아담은 그 사람을 보고 '내 살중의 살이요 뼈중의 뼈'라는 사랑고백을 합니다.

? 진짜 자기 뼈였거든요. 자기거였거든요. 사랑고백을 해요. 그리고는 그 사랑고백과 함께 그 여자에게 무언가를 주는데 그게 여자라는 이름이에요. 여자라는 이름이에요. 내 살중에 살이요 뼈중에 뼈다라는 그 위대한 사랑고백과 함께 가는게 여자라는 이름이란 말입니다. 아담이 여자에게 사랑 고백과 함께 이름을 주는 이 장면이 출애굽기에서 율법의 옷을 입고 한번 등장하는데 한번 가보세요.

 

(출애 2216-20) 16 그 처녀의 아버지가 자기 딸을 그에게 절대로 못 주겠다고 하면 그는 처녀를 맞을 때 내는 납폐금과 맞먹는 금액을 물어야 한다. 17 요술장이 여인은 살려 두지 못한다. 18 짐승과 교접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19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죽여야 한다. 제사는 야훼께만 드려야 한다. 20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에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지 않았느냐?

 

여기에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요걸 납폐금 이라 그래요. 남자가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남자가 여자 가족이나 여자에게 지불해야 하는 돈이 있었는데 그게 납폐라는 거예요. 중동지방에서는 요즘도 그래요. 이것이 요즘에는 이제 함이라는 것으로 여자 집으로 들어가는 거죠. 고게 납폐에요. 납폐금이에요. 그것이 결혼식이 끝난 후에 폐백을 하는 것도 다 이와 상통하는 거예요.

남자가 성혼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신부 집에 하는게 폐백입니다. 그렇게 남자는 여자와 하나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할 댓가가 있는데 그것이 아내의 가치에 상응하는 예물이였어요. 이게 다 성경에서 나온겁니다. 여러분 아내의 가치 내가 이 아내를 얼마만큼 가치있게 생각하는가 만큼 돈을 냈다 말입니다.

남자분들 표정이 왜이래요? 흐흐흐 미쳤냐 지금 그러고 있죠? 난 돈을 더 받아야 된다 지금 그런 표정으로 흐흐

내가 아내를 이만큼 사랑합니다. 그리고 난 아내를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왜냐면 그 납폐금이 아내에게 가서 남편이 죽었을 때의 생활비로 쓰게 되어 있었거든요. 그러니 나는 이 아내를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라는 고백으로 빙폐를 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납폐는 아내의 몸값이기 이전에 신랑의 사랑고백이라 할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이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라는 사랑고백. 집에 가서 또 부부싸움 하지 마세요. 이 왠수야 그때 너는 함에다가 오징어 하나 넣었더라? 뭐 이런거... 오늘날은 다 변질돼갖구요. 아담이 바로 그 빙폐로 여자라는 이름을 준거에요. 여자. 이와 여자 그 이름 안에는 살중의 살, 뼈중의 뼈라는 아담의 사랑고백이 담겨 있는 거예요. 그렇게 남편의 죽음을 근거로 하여 남편과 한 몸인 여자의 탄생 이게 바로 혼인인 거예요. 이게 구원이에요. 이게 하나됨이에요.

 

그러니까 혼인은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거지... 여러분끼리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어진게 아니에요. 그 제도는 천국에는 있지도 않은게 왜 잠시 이 세상에서 주어졌냐면, 그 구원의 현실이 뭔지 깨달아 알으라는 것입니다. 음보다 깊은 사랑. 이건 하나의 모형인 거예요.

하느님의 아들이신 신랑 예수와 그 아들의 신부인 교회와의 그 혼인잔치. 그 연합이 어떠한 모양으로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알기 쉬운 그림이 아담과 이브의 탄생 이야기인 거예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 크신 사랑으로 당신의 신부와 결혼을 해버리신다 말입니다. 그게 구원인 거예요.

그게 룻기인 거고, 거지에 불과했던 룻이 보아스와 결혼함으로 말미암아 신분이 격상되는 거죠. 지주가 되는 거예요. 구원이에요 그게. 그게 결혼이에요.

 

그런데 그 과정이 쉽지가 않아요. 하느님의 아들이 신부와 혼인을 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왔는데 그신부가 싸늘하게 죽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셨을 때 모든 인간이 다 죽어 있었잖아요. 신부가 싸늘하게 죽어 있는 거예요. 죄와 허물로 없음이에요. 그 없음에서 죽어있는 없음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와 그 나라에 들어가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창조가 되는가가 창세기 1장에서 모형으로 그려지는 거예요. 그게 첫 창조란 말입니다.

없음에서 혼돈과 공허, 틀도 없고 스트럭쳐도 없고 공허 엠프티니스 내용도 없는거 공허 없는거에요. 그거 예요. 거기에 어떻게 하느님 나라의 틀이 세워지고 내용물이 채워지는가! 이 구원의 이야기를 모형으로 보여준거 거든요. 그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없음이에요. 없음. 그때 신랑은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음에 빠져들죠. 죽음은 어떻게 메타포어 돼요? . 십자가 위에서 잠이 들어요 신랑이. 그리고 그의 옆구리가 뚫리고 그의 심장을 막고 있던 갈비뼈가 적출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랑의 몸의 일부로 신부가 새롭게 살아나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으로 너는 내 살중의 살이요 뼈중의 뼈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부어졌고,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여김을 받는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랑고백을 했거든요. 니가 내 살중의 살이고 뼈중의 뼈라. 하느님은 우리를 예수로 봐주셔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고백 때문에 그 고백이 사랑고백이 우리에게 부어졌고 하느님 아버지를 떠난 아들과 우리가 한몸이 되는 것이 구원이란 말이에요. 뭐예요?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산 자 라는 이름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죽어있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와 혼인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게 창세기 2장이에요.

 

십자가에서 우리와 혼인을 하셨단 말이에요.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름이 주어졌는데 그게 산자에요. 그건 창세기 315절 이후로 이제 넘어가 보면 알죠. 그러니 구약만 알고 신약을 이해할 수 없고, 신약만 알고 구약은 이해 못하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가 혼인을 하여 한몸이 됐어요. 그런데 신부가 선악과를 따먹고 그 한몸의 관계가 깨져 버렸죠. 살중의 살 뼈중의 뼈라 그랬는데 그 신부가 남편에게 핑계를 대고 남편은 신부에게 핑계를 대고 이 한몸 됌이 깨져 버린거 아닙니까? 죄로 말미암아. 그게 신부의 죽음이죠.

? 남자에게서 나온 여자가 남자와 끊어졌을 때 그게 곧 죽음아닙니까. 그래서 여자는 죽는 거예요. 죽은 거예요. 무트 타무트. 죽음을 유보시킨게 아니라 죽은 거예요. 그런데 은혜로 살려내는 것이지 안죽인게 아닙니다. 죽은 거예요. 그건요.

출애굽기 22장이 그 상태를 행음(간음)이라고 그래요. 우상숭배라 그러죠. 그게 죽음이잖아요. 그래서 출애굽기 22장의 그 결혼에 대한 결례 밑에 갑자가 무당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행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거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핑계대면서 잘못을 전가하죠.

그때 하느님은 창세기 315절의 말씀을 주세요.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거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밟을 것이다라는 원시 복음이에요. 그 말은 하느님의 라인인 그 여자의 후손은 뱀에게 발 뒷꿈치를 물려서 피를 빨리는 자로 살게 되는데 이게 십자가잖아요. 그 피 빨림이 바로 상대의 머리를 밟는 승리의 십자가임을 보여주는 거예요.

 

상식으로 판단되어지는 이 힘의 원리와 도대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하느님 나라의 원리가 지금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뱀은 상대의 피를 빠는 방식으로 힘의 원리잖아요. 그런 방식으로 살고, 하느님의 아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기의 피와 살을 먹으라고 내어주는 방식으로...

이게 요한복음 6장 이잖아요. 먹어라 그러잖아요. 내어주는 방식으로 이기는 거라 말입니다. 이게 성령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이해가 안가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이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여겨지는 거예요. 어떻게 그게 승리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원리는 달라요. 아담이 그 말씀을 알아듣고 다시 여자에게 이름을 주죠. 아담이 그 여자에게 이름을 준 사건이 결혼식 때 빙폐라 그랬죠. 나는 너를 이렇게 사랑해. 이마만큼 너는 가치있는 자야라고 이름을 주잖아요. 그런데 뭐라고 이름을 줘요? 새로 산자의 어미. 하와라고 주잖아요. 넌 산자다란 뜻이에요. 그걸 이해하는게 바로 사는 거란 말입니다. 그 십자가의 피의복음을 이해하는게 산 거예요. 그게 깨어 있는 거라 말입니다. 새로운 혼인이 일어나는 거예요.

창세기 315절의 그 원시복음이 딱 주어지자 새로운 혼인이 일어나면서 죽어있는 여자에게 산자라는 빙폐가 주어지는 거예요. 납폐금이 주어지는 거예요. 함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새로. 십자가 위에서. 바로 그렇게 하느님과 우리의 혼인이 이루어진 거예요. 그 혼인의 실체 본질을 아는 자가 깨어 있는 자예요.

그러니까 그걸 아는 자는 혼인잔치에 갔다 오는 주인을 기다리겠죠. 그 혼인잔치가 뭔줄 아니까. 그리고 혼인을 치르러 오는 신랑을 기다리겠죠. 그 자가 깨어 있는 거라 말입니다. 뭐 대단하게 무슨 종교행위 열심히 하고, 착한 일 열심히 하고 이게 깨어 있는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들이 잠자고 있는 것일 수 있다니깐요.

이걸 함으로 내가 괜찮은 존재로 자꾸 나에게 여겨지는거 이게 죽은 거예요. 이게 잠자는 거라 말입니다.

이걸 이해하는 사람이 복음을 아는 사람인 거예요. 그들이 혼인집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쁘게 맞는 거예요. 자 그 이야기 그 복음의 이야기가 십자가 위에서 실제화 되어 버리는 거예요.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아담이 새로운 하와 즉 산자들을 위해 잠이 드는 거예요. 죽는 거예요. 그리고 그의 생명을 신부의빙폐 납폐로 지불해 버리는 거예요. 내 신부의 가치는 내 목숨과도 같다라는 신랑의 고백이란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신부에게 산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물해 주는 거예요. 그게 혼인이고 그게 한몸입니다. 그게 연합이라는 거예요. 신부는 떡을 생산해 내고 축적하여 신부의 자격을 갖추는게 아니라 신랑의 사랑에 의해서 거저 신부의 자리에 앉게 되는 거예요.

 

성도는 하느님 나라 갈 때 자기 이름 갖고 가면 안돼요. 무슨 이름 갖고 가야 돼요? 내 신랑 이름 갖고 가야 돼요. 난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라고 가야지.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닌 사람은 홀로 단독자로 못 들어가요. 그리스도의 신부에게만 산 자라는 이름이 주어져요.

그런데 이 시대는 오로지 자기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요. 하느님도 자기의 이름을 위해 이용한다니깐요. 그 이름갖고 들어가면 다 죽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만 들어가야 돼요. '난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부로만. 하나님은 그렇게 복음을 이해한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죠. 가죽옷은 부끄러움을 덮어 버렸어요. 내가 부끄러워서 숨었습니다 하면서 부끄러움을 덮잖아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남자의 옷이 여자에게 덮이는건 곧 혼인을 의미하는 거였어요. 룻기에도 나오죠. '나를 덮어 주세요' 그러죠. 룻이 보아스에게 혼인해달라는 뜻이거든요. 덮는 거예요. 그게 혼인이에요. 성경은 일점 일획의 헛점도 없어요. 오차도 없어요. 어떨땐 소름이 막 끼칠 정도에요.

하느님과 죄인의그 혼인의 모형이 창세기부터 쭉 묵시록까지. 그래서 요한묵시록이 어린 양의 혼인잔치로 끝나는 거예요. 창세기 3장의 아주 재미있는 워드 플레이가 나온다는걸 제가 알게 되었어요. 말이 나온 김에 한번 찾아보고 갈까요.

 

(창세31) 1 야훼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짐승 가운데 제일 *간교한 것이 뱀이었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이 너희더러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하나도 따 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

 

자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하는 뱀이 나오는데 그 뱀이 간교하다 그러죠. 간교라는 단어가 아룸이라는 히브리어거든요. 그런데 7절의 그 벌거벗음이라는 단어가 굳이 에룸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에요.

 

창세기 37.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리웠다. 이게 에룸이에요. 아룸과 에룸. 클라인에 의하면 성경이 이 아룸과 에룸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인간의 벌거벗음이 에룸뱀의 간교 아룸을 입은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라는 거예요. 이게 히브리 사람들의 워드 플레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벌거벗었다라는 건 뱀의 간교가 입혀 졌다라는 뜻이거든요. 성경에는 벗어라라고도 이야기하고 덧 입어라라고도 이야기하는 거예요. 벗어라라는건 뱀의 간교를 벗으라는 것이고, 입어라라는 것은 그 간교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의의 옷으로 덮으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벗는게 맞는건지 입는게 맞는건지 그런걸로 싸우지 마세요. 그렇게 부끄러움이 덮이는 상태 죄와 허물의 죽음이 은혜로 덮이는 상태가 바로 한몸되기. 혼인이니까. 한몸되기이고 연합이고 혼인잔치인 거예요.

그래서 여자가 만들어지는 그 장면에서 혼인잔치가 거행되었던 거고, 고 밑에 아내라는 이름이 바로 나오는 거고, 그 자리에서 너는 내 살중의 살, 뼈중의 뼈라는 한몸사상이 선포되는 거예요. 한몸.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라는 그 한몸사상이 계속 예수님에 의해 선포되어지는 거예요. 다 똑같은 얘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그 예수의 공로로 예수와 한몸이되어 하느님과 한몸이 된다니깐요. 그러나 우리 능력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업적과 공로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 면목없이 빈그릇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게 하느님나라 백성의 삶인 것입니다.

 

(예제166-14) 6 내가 지나가다가 피투성이로 발버둥이치는 너를 보고, 핏덩어리야 살아라. 7 들풀처럼 자라나거라 하였더니, 너는 자라고 커서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 너는 젖가슴이 부풀고 거웃도 자랐는데 알몸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8 나는 지나가다가 네가 꽃다운 한창나이가 된 것을 보고 내 겉옷 자락을 펴서 너의 맨몸을 감싸 주었다. 나는 맹세하고 너와 약혼한 사이가 되었다.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너는 내 사람이 되었다. 9 나는 너를 목욕시키고 너에게 묻은 피를 닦아 주고 기름을 발라 주었다. 10 수놓은 옷을 입혀 주고 고래가죽으로 만든 신을 신겨 주고 아마포띠를 띠어 주었으며 비단 겉옷을 입혀 주었다. 11 너를 보석으로 단장하고 팔에는 팔찌를, 목에는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12 코에는 코고리를, 두 귀에는 귀고리를 달아 주었고 머리에는 아름다운 족두리를 씌워 주었다. 13 이렇게 너는 금은패물로 단장하고 모시옷에, 비단옷에, 수놓은 옷을 입고 고운 밀가루 음식과 꿀과 기름을 먹게 되었다. 너는 점점 아름다와져 마침내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14 내가 너에게 입혀 준 영화는 한점 티없이 아름다왔으므로 네 명성은 만방에 떨쳤다.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이 죽어있는 피투성이의 여자를 왕후로 만들어 낸게, 그냥 피투성이로 죽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이 씻기고 입히고 가치있게 만들어 왕후 삼는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게 혼인이라 말입니다.

그걸 알고 '이 세상에서 내가 하느님 앞에 내 놓을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는 것이구나 그냥 하느님의 말만 잘 들으면 되는 것이구나' 이 자리로 내려가서 일상속에서 내가 어떤 떡을 만들어 내어 나를 행복하게 할려고 하는 그 세상적 사고방식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있는 상태! 뭐 수시로 다시 그리로 가기는 하지만.. 그 상태 그게 깨어 있음이에요

그걸 아는 자는 다시 세상의 힘의 원리속으로 들어가도 '이건 아닌데...' 괴로와요 고통스러워요. 그때 자꾸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부른다니깐요. 그게 깨어 있음이에요.

세상으로부턴 조롱당하죠. 비효율적이에요. 비경제적이에요. 어리석은 다섯처녀는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 신랑 때문에 일상에서 자기의 유익을 위해 쓸 수 있는 잉여의 기름을 준비 안한다 말입니다. 경제적이니까. 효율적이니까. 힘의 원리 속에서 아주 지혜로운 이들이죠.

어리석은 자들은 그걸로 자기의 일상을 얼마든지 꾸밀 수 있는데 그걸 꾸미지 않고 오로지 신랑만 바라보면서 일상에서 손해를 보고 있는 거예요. 뭘 준비했다에 초점이 있는게 아니라 이 사람은 일상속에서 조롱을 받고 손해를 보고 있구나에 초점이 있는 거라 말입니다. 그리고 자고 있어. 이건 병신들인 거예요. 이거는 신앙적으로 봐도 병신. 세상속에서 봐도 병신. 그런데 그가 깨어 있다 말입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교회에서 반드시 그 취급을 받게 되어 있어요. 절대 우리의 떡 우리의 잘난 척을 못챙기게 하신다니깐요. 하느님이요. 노아 보세요. 120년 동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세상에 이 힘의 원리 안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배만 만들다가 갔어요. 고게 깨어 있음이에요.

그런데 세상에서 볼 때는 '야 떡 좀 만들어 이놈아. 너는 아무 필요도 없는 도대체 뭘 만들고 있는거야? 떡 내놔 떡' 그게 성도입니다. 그 예수의 의 그거 의지하고 면목없이 기다리는게 깨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다 쫓겨나는 거예요.

 

그 예복은 주인이 주는 예복이에요. 자기가 아무리 멋진 옷 피에르가르뎅 이거 좋은 것도 아닌가요? 요새 쟈니 베르사체 좋은거에요? 아무튼 버버리 이런 거 입고 앉아 있어도 주인이 준 옷 안 입으면 다 쫓겨나요. 아무리 멋진 행위와 업적으로 여러분이 바리바리 싸들고 그 잔치에 가서 앉아있는다 할지라도 주인이 준 그 의 흰옷. 아마포.

어린 양의 피에 씻어 희게 된 그 옷. 그거 안입으면 다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거 입으라는 거예요. 보세요 창세기부터 복음서 서신서 요한묵시록이 하나로 다 연결이 되어 있잖아요. 이게 묵시라는 거예요.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뭉쳐있는 거예요. 십자가를 중심으로!

뭐 그렇게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싶으세요? 뭐 그렇게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싶으십니까? 어차피 하느님 앞에서 뒤집어 보면 다 똥덩어리인거...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청문회 한번 할까요? 흐흐 그 위치 돼서 한번... 아니 도지사 총리가 여관에서 안자고 호텔에서 잔게 그렇게 흠입니까? 여관에서 자면 잘난거에요? 그거 다 쑈하는 거예요. 그거. 어떤 놈이 여관에서 자고 싶어요? 근데 그런걸로 자기들을 막 위장하고 폭로시키고 개 지랄들을 떨면서 하느님 앞에서 잘난척들 하고 있어요. 세상 전체가 다! 하느님은 다 알고 계시는데...

 

그래서 우리에게 의의 옷이 필요한 거예요. 예수의 의가 아니면 다 죽습니다. 그거 붙들어야 돼요. 그런데 그걸 가르쳐 주는데가 없어요. 도대체가... 그 이야기를 해줘야 되는데 그걸 가르쳐 주는데가 없어요. 예수 이야기 십자가 피의 이야기를 해줘야 되는데 그 이야기를 해주는데가 없다 말입니다.

떡 만들으라고 니네 일상에서도 떡 만드는게 왔다라고... 여러분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사람들이 왜 잔치 초청에 응하지 않았습니까? 소도 사야하고, 장가가야 하고, 밭에 또 밭에도 나가야 하기 때문에, 떡만들어야 되거던요. 이 뜻이에요.

성도에게는 세상과 내 자신이 무가치하고 허황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 일상에 매어 잔치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는 거예요. 그게 깨어 있는 거예요. 그러나 일상에 매어 있으면 잔치에 안가고 싶다니깐요. 우리는 자나깨나 예수님의 의. 의 흰옷만 구하는 자가 되야 돼요.

다시 한번 우리는 떡을 내놓아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존재에게 떡을 내 놓아서 사는 게 아니라 입벌리고 떡 받아먹는 자란 말입니다.

 

(요한 6,33-35) 33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 34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 '선생님,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35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를 먹어라 그러잖아요. 언제 예수님이 떡 내놔라 그랬어요? 나를 먹어라 그랬지. 인간은 그 어떤 종류의 떡으로도 행복에 이를 수 없어요. 그 말은 그 어떤 노력과 시도로도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방법으로는 죽음에 속해있는 자들이 살아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일상을 통하여 자신이 내어 놓을 떡을 만드는데 분주한 자가 아니라 신랑의 공로로 완료된 그 혼인잔치의 은혜성을 알게 된 자들이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오매불망 기다리게 되는 거예요. 혼인잔치에만 관심이있으니까.

? 나는 거저 그 자리의 주인공이 되어 있거든요. 내가 신부거든요. 그러니까 혼인잔치와 관계있는 존재들이 다 기다려 지는 거예요. 그들만 기다려지는 거예요. 그걸 깨어 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들 그들이 깨어 있음인 거예요.

소유의 떡, 물질의 떡, 선행의 떡, 열심의 떡, 착함의 떡 세상은 많은 떡을 생산해 내라고 요구해요. 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통하여 그 떡을 생산해 내느라 동분서주할 때, 우리는 그 떡은 인간은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완료된 그 말씀으로 사는 거다라고 외치면서 우리 신랑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들을 성도라 그래요.

그러니까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에요. 어딜 바라보고 있느냐! 다 자고 있었지만 자고 있는 와중에도 나는 왜 육신을 입고 있으니까 자고 있는 와중에도 나는 이렇게 잠들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이니까

'신랑이여 어서 그 완료된 혼인잔치로 나를 데려가 주소서' 그게 깨어 있는 자에요. 그게 은혜속에 들어있는 자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