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1 연중 제6주일...독서,복음(주해) | |||
---|---|---|---|---|
이전글 |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1| | |||
다음글 | ■ 하찮은 일은 없습니다 / 따뜻한 하루[28] |1| | |||
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2-11 | 조회수459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주님의 계명은 우리가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계명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법조문의 준수와는 다릅니다. 주님에 대한 감사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기꺼이 실천하는 사랑의 계명은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끕니다.
제1독서 <주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불경하게 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다.> -. 주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불경하게 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다. 제2독서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지혜를 미리 정하셨습니다.> 9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주해 6절 이 “완전한 사람들”이 “모든 그리스도 신앙인”을 의미하느냐 아니면 그 가운데 “성숙한 신앙인”을 의미하느냐에 대해 의견이 갈라진다. “성숙한 그리스도 신앙인”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으나,“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현세의 통치자들”에 애해 말하는가 하면 “세기들 이전에 감춰져 있던 하느님의 지혜를... 영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셨다”라고 말하는 가까운 문맥을 보면 비그리스도 신앙인에 대비하여 “모든 그리스도 신앙인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현세의 통치자들”은 이 세상 통치자들을 의미할 수 없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세력들을 의미할 수도 있다. 7절 로마 16.25-;에페 1.4- 참조. 로마 8.29-; 2고린 3.18; 4.6 참조. 8절 “영광의 주님”; 구약성서에는 “야훼의 영광”이라는 표현이 많다. 야훼의 속성을 엄위하신 빛남이라는 관점에서 표현한 것인데, 바오로는 바로 예수를 “영광의 주님”이라 부른다. 9절 이사 64.3; 65.16; 집회 1.10 참조. 10절 10-16절에서는 영을 통한 하느님 지혜의 깨달음에 대해 논한다. “영”또는 “영적”이라는 말이 매우 자주 나온다. “그리스도”는 단락 끝에 비로소 나온다. 그러나 내용의 흐름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향한다. 복음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과 달리,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1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주해 예수와 율법 유다계 그리스도인 가운데 수구파는, 율법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유효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지론을 폈는데, 그런 지론이 어록에도 기록되었다. 마태오는 한편 수구파의 율법유효론을 수용했지만, 또 한편 비판적 입장을 취하여 결코 유다교 율사들이 풀이한 율법이 유효한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께서 풀이하신 율법만이 유효하다고 보았다.“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넘치는” 그리스도인들의 의로움은 다름이아니라,예수께서 율법을 풀이하면서 밝혀주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 21절 21-22절에서 예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 금령을 한결 심화하여 동족 형제 또는 신안 형제에게 분노하는 것조차 금하셨다. 이어서, 분노하면 쉽게들 내뱉는 두 가지 욕설도 금하셨다. 우선, 형제보고 바보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음 사례로 형제더러 “어리석은 놈”이라 해서도 안된다고 하셨다. “어리석은 놈”은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사람을 가리킬 것이다. “분노- 바보- 어리석은 놈”에 점층법이 들어 있다면 “재판-최고의회- 지옥”에서도 처벌이 점점 무거워진다. 23절 23-24절은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나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단절어로서, 마태오가 특수사료에서 따와 21-22절의 대당명제를 덧붙였다. 먼저 형제를 용서해야만 하느님에게서 용서받을 수 있다는 단절어와 내용상 매우 비슷하다. 25절 25-26절은 서둘러 적수와 화해해야 투옥을 면할 수 있다는 상징어로서, 마태오가 어록에서 따온 것이다. 상징어의 뜻인즉 자명하다. 하느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으니 서둘러 회개하라는 것이다. 26절 과드란스는 로마 화폐 중 최소단위 동전으로, 로마 은전 데나리온의 64분의 값어치. 병행문 루카 12.59에서는 과드란스 대신 렙톤이라 한다. 렙톤은 그리스 화폐 중 최소단위 동전으로, 그리스 은전 드락마의 128의 1. 27절 27-28절에서는 십계의 “간음하지 말라”는 금령을 더욱 깊이 해석하여 이웃의 아내를 탐내는 마음조차 갖지 말라고 하신다. 남의 아내를 차지하려는 흑심을 품지 말라는 반명제 자체가 새로울 것은 없다. 십계 금령에도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못한다”고 했고 유다교 문헌에도 그 점을 경고했다. 그러나 형식상, 곧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 금령에 대해 예수께서 자신의 깊어진 견해를 당당히 내세우시는 사실에서, 이 대당명제에도 그분의 전권의식이 엿보인다. 29절 무슨 죄든 일체 죄의 충동을 단호히 물리치라는 상징어는 본디 마르 9,43-47에 수록되어 있었다. 마태오는 그것을 8,8-9에 옮겨실은 바 있거니와, 5,29-30에도 옮겨썼다, 다만 이 경우에는 죄의 충동을 국한시켜 남의 아내를 범하고 싶은 충동으로 보았다는 점이 별나다,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예수님의 반명제를 참작하여 29-30절의 듯을 새겨보자. 우선 자구적 의미를 살피면, 남의 아내를 범하기로 작심하는 죄를 범하느니 차라리 자신의 눈, 손 따위 소중한 지체 를 잃는 편이 낫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멀쩡하게 두 손, 두 발, 두 눈을 지니고 성당과 예배당에 오는 것을 볼 때 그들이 29-30절을 쓰인 글자 그대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만일 글자대로 이해했다면 성당과 예배당은 무수한 불구자들의 집합소가 된 지 오래일 것이다. 32절 한 번 맺은 부부관계는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유효하다는 예수님의 결혼관에 유의하고 32절을 읽어야 뜻이 통한다. “자기 아내를 버리는 사람은 누구나 그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의 뜻인즉 이렇다. 당신 소박맞고 쫓겨난 여자는 홀몸으로 살기 무척 거북해서 대체로 재혼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니 아내를 소박하는 것은 아내로 하여금 재혼하도록 몰아붙이는 거나 진배없다. 첫 번 결혼이 엄연히 유효한데 재혼하는 것은 간음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관점이다. 재혼은 말할 것도 없고 소박조차 절대로 안된다는 예수님의 입장은 결혼생활의 곤경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부부에 대한 하느님의 원초적인 뜻, 그 성스러운 뜻만을 밝히신 것이다. 그러니 이미 1세기 교우들부터 예수님이 소박 불가, 재혼 불가 선언을 지키기 어려워 그분의 철저한 요구를 지킬 수 있을 만큼 완화했다. 한 가지 실례로 마태오가 소속한 시리아의 유다계 교회에서는, 아내가 음행한 경우에는 소박과 재혼을 남편에게 허락했다고 여겨진다. 그러기에 “음행한 경우를 재외하고”,“음행을 하지 않았는데”라는 단서를 마태오는 삽입했던 것이다. 이런 단서를 일컬어 예외규정이라 한다. 원칙적으로 소박, 재혼은 안되지만, 아내가 간음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소박, 재혼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33절 맹세에는 두 종류가 있다. 전에 이런 일을 했다 또는 하지 않았다고 단언하면서 상대로 하여금 자기 말을 믿도록 하려고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맹세가 있으니, 곧 과거지향적, 단정적 맹세다. 이와 관련하여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한다, 이와는 달리 앞으로 하느님께 사람, 짐승, 집 또는 토지를 바치겠다고 맹세하거나 무슨 선행을 하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하는 맹세가 있으니, 곧 미래지향적. 서약적 맹세다. “네 맹세대로 주님께 해드려라”가 바로 미래지향적. 서약적 맹세다. 34절 34ㄴ-36절에서 예수께서는 자기 동족이 우회적으로 하느님을 가리키는 하늘, 땅, 예루살렘, 자기 머리를 두고 맹세하는 관행을 나무라신다. 네 가지 우회적 표현 가운데서 자기 머리를 두고 맹세하는 것은 뜻밖이다. 여기에는 이런 논지가 들어 있다. 인간은 자기 머리에 있는 머리카락 하나도 색깔을 바꿀 수 없다. 그러니 머리를 다스리는 분도 결국은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리를 두고 맹세하는 것 역시 결국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는 셈이라는 논지다. 37절 곧 올 하느님의 나라. 아니 이미 온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단순히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맹세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자기 발설을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러니까 절대진실을 요구하셨다. 예수께서 절대로 맹세하지 말라고 그처럼 강조하셨건만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유다교인들 못지않게 맹세하는 습관을 지녔다, 그런가 하면 사도 바오로도 습관적으로 과거지향적, 단정적 맹세를 반복했다. “악한 자”란 사탄이라는 뜻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면 충분한데 맹세 따위 군말을 덧붙이는 것은 사탄의 사주를 받은 짓거리라는 것이다. “악한 자”(남성) 대신 “악”(중성)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상사에게 전화를 할때나 받을 때 숨넘어가듯이 “예..예..예..예..”하는 모습을 볼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