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2 재의 수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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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2-21 | 조회수295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오늘 전례 ‘재의 수요일’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날이다. 교회가 이날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하는 데에서 ‘재의 수요일’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이 재의 예식에서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나 머리에 얹음으로써, ‘사람은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창세 3,19 참조)는 가르침을 깨닫게 해 준다. 오늘 재의 수요일에는 단식과 금육을 함께 지킨다. 제1독서 <너희는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 너희는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제2독서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6,1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21절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는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고,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도록 하셨습니다”의 연관문 갈라 3.13에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다”고 하는데, 그 뜻인즉 그리스도께서 저주받은 자가 되셨다는 것이다. “죄로 만드시고”를 “속죄의 제사로 만드시고”라고 풀이하는 주석가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풀이를 배척하는 주석가들도 있다. 그렇게 풀이하는 이들은 그 근거로, 칠십인역 레위기에서 속죄 제사를 그냥 죄로 약칭한 사제들을 내세운다. 하느님께서는 구원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시는 까닭에, 그분은 의로우시고 또한 인간을 이롭게 하신다, 하느님의 이같은 성품과 처사를 일컬어 바오로는 “하느님의 의로우심”이라고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의로움을 누리면 의롭게 된다. 곧 의인이 된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의롭게 될 수 있나? 율법의 행업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써만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바오로는 확신했다. 그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이 확신을 확신했다. 바오로의 구원관을 요즘 말로 옮긴다면, 자력구원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오직 타력구원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라 하겠다. 인간이 자신의 공덕으로써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천주교회에서는 의화론, 성의론이라 하고, 개신교회에서는 의인론, 인의론 또는 정의론이라 한다, 우리나라 개신교계 그들을 보면 “외롭다 함을 얻는다”.“의롭다 함을 인정받는다” 같은 표현들을 자주 대하게 된다. 그 신학적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말 어법상 도대체 이런 표현들이 성립될 수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지금은 구원의 날 6,1-2는 하느님이 지금 화해의 은총을 베푸시니 이 때를 선용하라는 훈계다. 그럼 어떻게 처신하란 말인가? 고린토 교우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일으켜지신 그분을 위하여 살 것”이요 사도 바오로의 그의 적수들을 세속적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2절 ㄱ절은 이사 (LXX) 49.8 인용문이다. 복음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주해 자선에 대한 가르침 산상설교의 가운데 토막에 해당하는 6,1-18은 대충봐서 자선(1-4절), 기도 집성문(5-15절), 단식(16-18절), 이렇게 중요한 세 가지 신심에 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자세히 보면 마태오은 자선(2-4절), 기도(5-6절), 단시(16-18절)에 관한 집성문을 특수사료에서 수집하여 옮겨실었다. 세 가지 가르침은 분향, 구조, 내용이 같다. 위선자들처럼 신행 쇼를 벌이지 말라, 그래서는 공이 없어진다. 오히려 신행을 숨겨라, 그래야만 숨은 것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신다는 그런 가르침이다. 마태오는 세 가지 신행에 관한 집성문을 옮겨싣는 기회에 1절을 만들어 덧붙이고 7-15절은 툭수사료와 어록에서 따와 삽입했다. 1절은 세 가지 시심 전부를 포괄하는 명제다. 삽입문 7-15절 가운데 수다스런 기도 금지는 특수사료에서 따온 것 같고, 주님의 기도는 어록에서 옮겨썼다. 1절 마태오가 주창한 의로움은 하느님의 뜻을 행함이다. 여기서는 문맥상 자선과 기도와 단식, 이렇게 세 가지 신행을 가리킨다. 2절 자선을 베풀면서 실제로 나팔을 불었다는 사실은 전해오지 않는다. 자선 행위를 자랑하지 말라는 것을 과장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3절에서 오른손이 무엇을 하는지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훈시 역시 자선행위를 숨기라고 간곡히 타이르신 말씀이다. 4절 하느님이 자선을 어떻게 갚아 주실까? 자비는 자비로 갚아 주실 것이다(5.7). 6절 엘리사 예언자가 홀로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여 수넵 여인의 죽은 아들을 기적적으로 소생시켰다는 일화를 연상케 한다. 어디 기도하는 장소를 한정하여 오직 골방에서만 기도하라는 말씀이겠는가. 기도한담시고 남들 앞에서 뽐내지 말라는 말씀이다. 단식에 대한 가르침 단식에 관한 단절어는 본디 자선과 기도에 관한 두 단절어와 함께 특수사료에 전해오던 것을 마태오가 수집해서 여기 배치한 것이다. 특수사료는 기록된 문헌이 아니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유다계 그리스도교의 구전일 개연성이 크다. 구약성경에서 명한 안식일은 일년에 단 한 차례 속죄의 날뿐이다. 그밖에 온 나라에 불행이 닥치면 거국적으로 단식하는 수가 더러 있었다. 그러나 여시 말하는 단식은 열심한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자주 하는 단식을 뜻한다. 바리사이들은 매주 두 차례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했고 그리스도인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했다. 그리스도인들이 단식했다는 신약 전거는 제법 많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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