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2 사순제3주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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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3-11 | 조회수337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우리가 마실 물을 내놓으시오(탈출 17,2).> 5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 우리가 마실 물을 내놓으시오. 제2독서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졌습니다.> 주해 1절 신앙에 의한 의화는 하느님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가져다준다. 평화는 죄인이 하느님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그분과의 화해를 토대로 죄와 진노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은 상황을 가리킨다. 2절 모든 사람들이 범죄 때문에 상실한 하느님의 영광은 세말의 축복으로서 그리스도의 중개로 다시 얻게 되었다. 유다인들은 자랑할 근거가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세말에 하느님과의 영광스러운 현존 속에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자랑한다. 5절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이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이유는 그분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데 있다. 성령이 그들의 마음속에 현존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함하게 하고 그분의 영광에 참여할 것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6절 본문에서는 “아직”이 “정해진 때에” 앞에 다시 나온다. 이러한 반복은 우리의 지속적 연약성을 강조한다. “불경한 자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을 흠숭하지 않고 의화하지 않은 자들을 가리킨다. 7절 의인을 위해 죽을 사람이 거의 없다면 그리스도가 심지어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바쳐왔다는 것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강조한다. 8절 은혜나 사랑을 베푸는 은인과 같은 착한 사람을 위해 생명을 바칠 사람의 수는 의인의 경우보다는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착한 사람뿐 아니라 하느님을 거절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당신 생명을 바치셨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무상의 선물임을 강조한다. 복음 <솟아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샘물> 9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12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22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25 그 여자가 예수님께, 28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33 제자들은 서로 “누가 스승님께 잡수실 것을 37 과연 ‘씨 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41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주해 5절 “시카르”는 에벨 산 기슭에 자리한 곳으로서 오늘날 “이스카르”라고 불린다. 이곳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야곱의 셈”이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이 셈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창세 33.19; 48.22; 24.32 참조. 6절 직역은 “제6시경” 9절 예수의 요청에 놀란 사마리아 여인의 반응이다. 유배시기 후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 피가 섞인 민족이라 하여 상종하지 않았다. 기원전 128년전 요한 이르카노스의 영광에 따라 유다인들이 사마리아의 수도 시켐을 점령하고 그리짐 산 성전을 파괴하고부터는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예수시대에는 마찰이나 불화가 잦았고 혈투까지 벌어지곤 했다. 당신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인처럼 여겼다. 따라서 사마리아 여인이 깜짝 놀란 것은 당연하다. 저자가 독자를 위해 보충설명했다. 많은 필사본이 전하지 않는 사실로 미루어, 후대의 삽입구로 추정된다. 10절 예수의 신비에 찬 계시 말씀이다. 이로써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더욱 깊어진다. 이제 여인은 자신을 계시하는 예수를 내적으로 만난다. 여인이 청하고 받는 자로 바뀐다. 예수는 “하느님의 선물”인 “생수”를 주는 분이 된다. 특히 “생수”는 지상적, 자연적 선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천상적 선물이다. 따라서 목마른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 여인이며, 인간의 내적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 분이 이제 여인 앞에 서 계시다. 이 “생수”는 “생명의 빵”,“세상의 빛”, “양들의 문”,“길”,“포도나무” 등처럼 예수가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형상어로 이해할 수 있다. 12절 그리스도론적 칭호가 아니라 낯선 사람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일종의 존칭으로서 “선생님”이란 의미에 가깝다. 사마리아 여인은 아직 예수의 계시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생수”를 자연적 의미로 오해한다. 위대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질문 형태다. 14절 예수는 자기가 이미 계시한 말을 좀더 분명하게 설명한다. 이 “생수”는 갈증을 영원히 풀어줄 수 있고, 사람 안에서 “셈”이 되며, 그 “샘물”은 “영원한 생명”에로 솟아나온다는 것이다. 형상어로 표현된 예수의 이 계시 말씀은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예수는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분으로 계시된다. “갈증”은 생명에 대한 열망으로서 인간 구원과 관련된 형상어다, 예수의 선물은 사람 안에 내재한 “생명”,“말씀”,“진리의 영”이 된다. 사람 안에 내재한 “샘”은 지속적으로 “영원히” 활력소 역할을 한다. “물이 솟아나온다”는 사람 안에 내재한 신적 생명력에 대한 초자연적 생명력, 곧 신선함이나 감도가 결코 감소되지 않는 생명력을 표현한다. “영원한 생명”은 문맥상 “영원히”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가 주는 선물은 “영원히” 머무는 생명에 활력소가 된다는 것이다. 15절 사마리아 여인은 아짂도 예수의 계시 말씀을 깨닫지 못한 채, 모세나 몰이해 상태에 있는 것으로 시사된다. 예수의 계시 말씀을 오해한 나머지 아직 예수가 마술적인 물을 가진 듯 그것을 달라고 한다. 16절 예수는 자기가 의도한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고자 한다. 남편을 불러오라는 예수의 말은 예수가 그녀의 삶의 근황을 알고 있음을 시사하고, 그런 예수는 또한 자기 자신을 계시자로서 드러낸다. 18절 예수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깊은 내면의 삶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 즉,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을 알도록 알리고자 한다. 19절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활동한 자란 뜻으로서의 예언자를 가리킨다. 즉, 메시아적 의미로서의 예언자는 아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제 예수가 여느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20절 그리짐 산에 세워졌던 성전을 가리킨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 장소를 두고서 사마리아인과 유다인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예언자”로 존칭한 예수에게 상기시킨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짐 산에서 야훼께 예배드렸다. 그들의 전통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제단을 세운 곳은 에발 산이 아니라 그리짐 산이다, 이곳에 느헤미야 시대 성전이 세워졌고, 그 성전은 기원전 128년경 요한 호르카노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이후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곳을 참된 예배장소로 확고하게 굳혔고,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지 않았다. 22절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배가 민족적, 정치적 명예심의 발로였다는 점이 지적된 셈이다. 유다인들의 합법적인 하느님 예배를 인정하는 말이다. 구세사에 있어 유다인들의 합법적 위치를 재확인한다. 메시아가 유다인 가운데서 나온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유다인들”이 부정적 의미로 언급되지 않은 점이 특기할 만하다. 요한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의 적수들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23절 예수는 하느님께 대한 참된 예배가 “지금”, 즉 자기 자신과 함께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새로운 관계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그녀에게 약속된 것이 더욱 확실시된다. 사마리아 여인더러 그런 “진실한 예배자”가 되라는 예수의 권고도 내포되어 있다. 24절 하느님은 지상적, 인간적 본질과는 다르심을 상기시키는 말로서 하느님의 고귀함과 거룩함을 표현한다. “영”은 하느님과 천상세계에,“육”은 인간과 지상세계에 속한 것으로 분리되어 있다. 사람은 하느님을 “영의 진리 안에서”예배하기 위해 성령의 사람으로 태어나야 한다. 예배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예배 방식과 태도가 더 중요한다. 25절 사마리아 여인은 아직도 예수의 계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모든 것을 알려주실”메시아를 대망하고는 있다. 즉, 종교적 갈망이나 진지함 또는 예수에 대한 신비로운 느낌 등은 가지고 있다. 바로 이것이 메시아로서 예수의 자기계시에 연결점이 된다,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란 표현에 유의할 만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네 나름대로 타에브(재림하는 자)라는 메시아, 즉 종말에 모세의 모습대로 나타날 메시아적 예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1.41에서처럼 저자의 설명일 개연성이 더 크다고 보는 경향이 우세하다. “메시아”란 칭호 대신 “그리스도”란 칭호가 언급된 것은 그리스도론적 의미가 반영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26절 예수는 자신이 곧 메시아라고 밝힌다. “내가 그 (사람)입니다”는 예수가 신적 본질을 드러내는 일종의 계시적 문구다.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메시아로 알고 믿도록 하고자 이 자기계시적 표현을 사용한다, 이로써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절정에 이른다. 27절 8절과 연결된다. 즉, 제자들은 양식을 사러 갔다가 이제 들어온 것이다. 제자들이 놀란 것은 예수가 “여자”와 이야기한 점이다. 사마리아 출신이라는 점이 관건은 아니다. 유다 남자 특히 랍비들은 여자와 이야기하기를 삼가는데, 예수는 그러지 않아서 제자들이 놀란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행동에 대해 아무 비판도 못한다. 예수의 의도와 대화 주제에 관심을 가질 따름이다. 즉,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존경심이 다소나마 시사한다. 29절 신비스런 사람에게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자 하는 생각에 가득 찬 표현이다. 17-19절 참조. 신중하게 생각하도록 이끄는 표현이다. 예수의 자기계시에 대한 일종의 반응으로도 볼 수 있다. 31절 당시 상황에 맞는다. 예수는 피로에 지처 있었고, 제자들은 그 사이에 양식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32절 은유다. “음식”은 34절에서처럼 성부의 “뜻”을 행하고 성부의 “일”을 완성하는 예수의 사명에 대한 형상어다, 예수의 “먹을 음식”이란 예수 스스로 성부의 뜻에 따라 성부께 자신을 아낌없이 내맡김을 가리킨다. 특히 “믿음”이란 원문의 표현에는 “먹어야 하는” 내적 충동이나 열망이 내포되어 있다. 제자들은 예수의 이런 음식을 모른다. 예수가 성부와 일치하여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는 신비스런 사실 앞에 언제나 몰이해 상태애 있게 된다는 점이 시사된다. 33절 예수의 계시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가 그들의 오해와 함께 표현되어 있다. 34절 제자들의 몰이해로 인한 예수의 설명이다. 예수의 “음식”은 한마디로 성부의 “뜻”이다. 예수는 자신이 “파견된” 사실도 아울러 계시한다.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은 예수의 지상행위 일체를 가리킨다. 그 행위는 예수를 파견한 성부의 뜻에 근원을 둔다, 따라서 예수가 성부의 일을 완성하는 것은 예수의 지상 삶 자체라 할 수 있다. 35절 추수 때까지 농부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에 역점을 둔 표현이다. 예수는 이 표현으로 자신의 경우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예수는 추수하도록 허옇게 된 들녘을 잘 관찰하도록 제자들에게 촉구한다. 아마도 들녘을 통해 자신에게로 모여들던 사마리아 사람들을 가리켜 말했으리라 여겨진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얀 옷을 즐겨 입었다. 그들이 예수에게 추수의 들녘으로 보인 것이다. 이 들녘은 선교의 상징으로도 볼 수 있다. “추수”도 선교를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이다. 36절 “추수하는 이”는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 “품삯을 받는다”와 “열매를 모아들인다”는 것은 추수의 일과 추수자의 기쁨을 표현한다. “품삯”을 추수 대가로 지불되는 임금이 아니라 모아들인 “열매”를 가리킨다. 예수에게 “품삯”은 추수의 기쁨이다. “열매”는 일종의 선교용어다. “영원한 생명을 위한 열매”는 사마리아인들 가운데 예수를 믿는 자들을 가리키고, 예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그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끈다는 것을 뜻한다. “씨뿌리는 이”는 예수를 파견한 성부를 가리킨다. 성부와 함께 씨앗을 뿌렸듯이 이제 서로 일치하여 함께 추수의 기쁨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37절 씨뿌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같지 않음을 직언으로써 설명한다. 이 설명은 36절과 38절에 대한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씨뿌리는 자와 추수하는 자가 36절에서는 단수, 38절에서는 복수 형태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38절 예수가 제자들을 선교 활동에 놓고서 언급한 내용이다. 제자들의 선교활동은 부활한 예수로부터 파견되고 성령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예수의 이 말은 미래 상황을 설정하고서 언급된 일종의 예언이다. 39절 여인의 증언이 믿음의 동기나 근거였음을 말한다. 예수의 놀라운 신적 지식이 예수와 만나게 할 수 있는 연결점으로,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고을 사람들을 예수에게로 이끄는 중개자로 언급된다, 40절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다인” 예수를 거려하지 않고 자기들과 함께 머물기를 바란다. 참으로 믿는 자는 계시자와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는다는 신학사상이 시사된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활동하는 예수의 여정 가운데 이루어진 실시적 체류임을 시사한다, 41절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으로 믿게 된 자들이 이제 더욱 분명하게 증언하고자 한다. 여기서 예수의 말씀과 여인의 말이 비교된다. 전자는 신적 출처를 가진 계시 말씀이지만 후자는 단순히 인간적인 말로서 예수의 자기계시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우리 자신이 (직접) 들었다”는 표현은 그런 특성을 가진 예수의 “말씀”을 시사하고 동시에 예수의 “말씀”을 통해 받은 감화를 강조한다. 42절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를 직접 만나 “말씀”을 들음으로써 새로운 고백을 하게 된다. 충만된 믿음은 예수를 만나고 그분 말씀을 들음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믿음의 신학이 시사된다. 그들은 예수를 “세상의 구원자” 보편적 구원자 로서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이 고백에서 절정에 이른다, “세상의 구원자”란 칭호는 현 문맥에서 몇 가지 의미를 시사한다. 유다인뿐 아니라 사마리아인의 구원희망을 체워주는 메시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예수의 구원은 온 세상에 선물로 주어지는 보편적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당신 아들을 파견하셨다고 강조하는 요한복음 신학사상에 잘 부합되는 칭호다. 이 칭호는 사실상 신약성서에서 요한 복음서와 요한 서간 두 군데만 나온다. “구원자”란 칭호도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백한 메시아적 칭호다. “세상의 구원자”란 고백에서 요한복음의 신학사상적 의도를 배제할 수 없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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