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7 사순 제5주간 월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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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3-26 | 조회수315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45 그리하여 사람들이 수산나를 처형하려고 끌고 갈 때, 48 다니엘은 그들 한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50 온 백성은 서둘러 돌아갔다. 그러자 다른 원로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53 주님께서 ‘죄 없는 이와 의로운 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도, 55 그러자 다니엘이 말하였다. 57 당신들은 이스라엘의 딸들을 그런 식으로 다루어 왔소. 59 그러자 다니엘이 말하였다. 62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형에 처한 것이다. -.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죽게 되었습니다. 복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6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주해 간음한 여인과 예수 이 대목은 원래 요한복음 고유전승에 속하지 않고 공관복음이다. 그와 유사한 전승에 속했던 사화로서 후에 요한복음의 현 위치에 삽입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본들에도 없다. 사본에 따라 7.36에 연결되기도 하고 21.24에 연결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후대 사곤에는 현 위치에 있다. 이 사화는 예수와 유다 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사화 또는 대담사화의 양식에 가깝지만 , 간음한 여인과 고발자들에 대하 예수의 태도가 중심을 이룬다. 즉, 하느님의 자비가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내용이 핵심을 이루며 절정에 이룬다. 1절 예수는 낮에 성전에서 가르치고 저녁에 올리브 산에서 지내다는 루카복음의 보도에 가까운 상황묘사다. 2절 예수는 전날 성전에서 가르침을 시사한다.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는 상황설명으로서 “간음한 여인”이 군중 “가운데” 있게 될 상황을 전제한다. 3절 “율법학자들”은 이 대목 외에는 요한복음에 나오지 않는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함께 언급되는 것은 공관복음. 특히 마태오복음의 전형적 표현이다. 4절 어떤 결정을 분명히 밝혀 달라는 뜻에서 부른 칭호일 따름이다. 5절 신명 22,22,24: 레위 20.10 참조. 예수를 진퇴양난에 빠뜨리려는 질문이다. 6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도를 폭로한 저자의 설명이다. 예수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라고 말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거스르게 되고 고발당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율법대로 처리하라고 말한다면, 자비와 용서를 선포한 예수 자신의 복음과 모순된다. 더욱더 로마 정부에 반기를 드는 자로 고발당할 수도 있다. 당시 로마 정부는 유다인들로부터 죄인을 재판하고 사형할 권한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직접적 대답 대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준다. 이 행동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로 시도되고 있으나, “하느님을 떠난 죄인은 땅에 기록되리라”는 에레 17,13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것이 지배적이다. 즉, 예수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 죄인임을 일깨우고 하느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으니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도록 지시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이 행동은 그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보여준 예언자적 표시라 할 수 있다. 다른 사본에는 “예수께서는 ... 그들 각 죄인의 죄(목)들을 쓰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7절 그들에게 보여준 예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시시한다. 예수는 율법규정에다 “죄없는 사람”이란 말을 덧붙인다. 하느님 앞에 죄인인 주제에 다른 죄인을 심판하려고 유쭐거려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예수 자신이 앞서 보여준 표시를 이제 말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8절 다른 사본에는 “땅에 그들 각 개인의 죄(목)들을 쓰셨다”라고 되어 있다. 예수의 이 행동은 단순한 반목이 아니다. 먼져 표시를 보여주었고, 그 표시를 말로써 설명해준 다음에 다시 표시를 보여줌으로써 좀더 분명한 의미를 드러낸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을 땅에 쓰시고, 바로 그분만이 그 죄인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재차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9절 다른 사본에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나이 많은 이들을 비롯하여 젊은이들까지 하나하나 기록되어 있다. 자신의 죄를 의식한 자는 다른 죄인에 대한 심판관으로 자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여자는 간음죄로 고발되어 끌려온 죄인으로서 예수앞에 , 예수는 그녀를 심판하는 자로서 그대로 남아 있다. 10절 다른 사본에는 ”당신을 고발했던 그들이 어디 있소?“ 모든 사람이 누구나 죄인임을 알려주려는 질문이다. 11절 예수께 대한 경외심을 드러내는 칭호다. 여느 사람들처럼 예수 자신이 죄인으로 여겨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알기에 단죄하지 않는다. 예수에게 단죄받지 않은 의미가 언급된다. 그 여자는 하느님의 자비로 인해 죄의 용서를 짓지 않는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무죄선언은 이와 같이 죄의 용서라는 선물과 더불어 새롭게 살아야 할 의무도 한께 지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세상에 태어나 사람으로 살면서 반드시 거치는 것이 남녀의 성에 대한 집착들이 있을 것이다. 젊은날에 그를 참고 산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얼마나 어려우면 수많은 정력제들이 생겨났을까? 그리고 나이가 들어도 우선은 자기들의 그것이 아직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내는 말들을 많이 한다. 또한 젊은 날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는데 홀로 자신의 성기가 발기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는 참으로 알수 없는 일이다. “난 아직도 할 수 있어”는 살아있다는 말일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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