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9 사순 제5주간 수요일...독서,복음(주해)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 |||
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3-28 | 조회수286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19 그러자 네부카드네자르는 노기로 가득 찼다. 91 그때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서서 자문관들에게 물었다. -.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복음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주해 아브라함의 참된 후손 이 대목은 예수와 유다인들 사이의 격론으로 일관된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주제로 나타나는데, 한 번은 유다인들의 입을 통해, 다른 한 번은 예수의 입을 통해 재차 언급된다. 믿음과 불신, 자유인과 종, 진리와 거짓, 아브라함의 참된 자녀들과 악마의 자식들 등의 대질적 표현들로 엮인 논쟁의 저변에는 진리를 말하는 예수에 대한 믿음의 촉구가 있다. 31절 완료분사 형태로서 이미 오래 전부터 믿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저자의 표현이다. 유다인들의 과격한 비난과 논쟁으로 인해 당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신앙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언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말 안에 머물러 예수에 대한 신뢰를 더욱 확고하게 가지도록 하고자 한다. “제자들”은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던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신앙인을 총칭한다. “예수의 말 안에 머문다”는 “예수의 말을 지킨다”는 말보다 좀더 깊은 의미가 있다. 옛의 말에 따르는 삶뿐 아니라 예수와의 깊은 인격적 결속관계도 가리킨다. 예수의 참된 제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의 말을 듣고 배워 습득하며 또한 간직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면서 예수와 인격적 친교까지 이루어야 한다. 32절 “진리”는 인간의 추구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 구원을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가르침, 곧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가 말과 행동으로 이 세상에 드러낸 종말론적 구원 계시를 가리킨다. “진리를 안다”란 예수가 말한 근원진리를 내적으로 받아들여 간직하고 실현함을 뜻한다. “알게 될 것입니다”란 미래적 표현은 약속을 시사한다. 즉, 예수의 구원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은 그 가르침이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어 구원으로 이끌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예수와 아버지는 일치되어 있으며 그 일치된 친교 안에 자기 자신이 받아들여봐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약속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33절 이 구절도 앞 구절처럼 구원 약속을 달리 표현한 것뿐이다, “자유롭게 한다”란 죄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킴을 가리킨다. 따라서 “자유”는 인간이 추구하여 얻는 그런 자유가 아니고, 믿는 자에게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자유, 곧 인간적 실존의 굴레에서 벗어나 신적 삶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유를 뜻한다. 즉, 죄와 자유로서 실존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란 의래적 표현은 미래 종말론적 약속으로만 볼 수 없다. 이 약속은 근본적으로 현재 이루어지는 구원도 가리킨다. 예수의 말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낸 이의제기다. 유다인들은 예수의 말을 듣고 자기네의 종교적, 민족적 긍지와 명예가 훼손된 것으로만 여겼다. 34절 인간은 자기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죄악의 굴레에 빠져들어가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뜻이다. “죄를 짓는다”는 말은 윤리적. 도덕적 의미보다 먼져 근본적, 총체적 의미가 있다. 즉, 하느님을 거스르고 하느님의 구원 선물을 거부하는 것과 인간의 이기적 고집 속에 머물고 자신을 폐쇄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죄”는 하느님을 등진 인간의 완고한 태도를 가리킨다. 즉,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를 증오하고 믿지 않는 일체의 행위가 내포된 개념이다. 일부 사본에는 “죄의 종” 대신 “종”으로 되어 있다. 35절 아들만이 인간을 영원히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하나의 비유다. 여기서 “아들”은 종말론적 구원자로서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 예수만이 종말론적 자유를 줄 수가 있다는 것이다. 36절 아들만이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여 자유롭고 아버지의 생명에 참여하므로 사람들을 참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고 또 자유롭게 하고자 한다는 뜻이다. 예수만이 구원 계시를 통해 자유와 생명에의 길을 사람들에게 열어주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친교를 나눔으로써 자유와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해방하는 분 곧 생명을 주는 분으로서 자기 자신을 계시한다. 37절 유다인들이 내세우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예수는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 인정은 다만 혈통에 의한 “육적인” 후손임을 뜻한다. 구원의 확실성을 “아브라함의 후손”에 두는 유다인들이 아브라함의 희망을 체워주는 구세주, 곧 이 세상에 파견된 예수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참된 자녀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가 오히려 드러낸다는 뜻이다. 즉, 생각과 행동에서 드러나야 할 “아브라함의 참된 자녀들”이라는 점에서 예수는 그들을 부인하고 나선다. 유다인들이 구세사의 의미와 아브라함의 의도를 깨닫지 못하게 때문에 예수의 말이 그들 안에 자리잡지 못한다는 뜻이다. “자리잡다”란 예수의 말이 사람들 안에 들어가 머물면서 생동력을 발휘함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계시를 말하는 예수 자신과 그 계시자를 죽이려는 유다인들이 서로 달리 보여주는 태도는 예수의 “아버지”와 유다인들의 “아비”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아비”는 문맥상 비칭으로 의역한 것이다. 원문에는 “아버지”로 되어 있다. 39절 유다인들은 예수가 자기네 “아버지”를 아브라함이 아닌 다른 이를 가리켜 말한 것으로 이해하고서 재확인한다. “우리의 아버지”란 말에는 아브라함에 대한 유다인들의 긍지와 자부심이 함축되어 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일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모범과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일들을 한다”란 아브라함의 모범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의 후손” 대신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란 표현도 이런 의미를 더욱 강화한다. 40절 하느님의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죽이려는 행위는 아브라함이 보여준 모범에 모순된다는 것이다. 41절 “아브라함의 일들”에 모순된 유다인들의 행위는 그들이 아브라함이 아닌 다른 “아비”, 곧 악마(44절)에게서 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음행”은 하느님을 떠나 배반하는 것, 곧 우상이나 잡신 숭배를 가리키는 구약성서 표현이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신의를 지켜온 이스라엘 후손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계약의 백성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내용은 구약성서에서 종종 언급된다. 하느님은 “한 분의 아버지”라고 내세운다. 유다인들은 자기네 유일한 사상에 자부와 긍지를 가졌다. 42절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논리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고 내세우는 유다인들에게 반박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예수의 기원이 “아버지” 대신 “하느님”으로 언급되고 또한 동일한 사건이 반복됨으로써(“하느님에게서 나오다”와 “세상에 오다”란 말은 동일한 사건을 달리 표현한 것뿐이다) 신성을 지닌 구세주로서 예수의 출현 또는 예수의 구원적 의미가 강조된 듯하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로서 예수의 정체가 강조된다. 예수는 앞서 출현한 예언자들 또는 거짓 예언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시사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결혼해서는 나이가 들수록 여자의 힘은 남자보다 강해집니다. 결혼하고 나서 남자와 여자는 경제생활을 하느라 밖에서 보내던가 아니면 남자만 일하러 갔다가 오면 여자는 남자가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도 듣기를 좋아하고 어떤 코치도 주고 남편에게 잘해주다가 아이를 낳으면 점점 아내의 권한이 커지기 시작합니다. 어느 집에서는 밥상머리에서 아내가 방귀를 뀌어 남편이 뭐라고 하면 "나도 남자 낳았으니 뀐란다"라며 지내는 가정도 있습니다. 힘주어 크게만 뀌지마소서! 이렇게 새상살이가 다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커서 결혼을 하게되면 그때부터는 완전히 아내가 모든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은 경제적 이유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여하튼 남편은 “어험”하는 권한들은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아내도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나이든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서로들 웃으면서 “야. 밥한술갈이라도 잘 얻어 먹으려면 집사람 눈치를 보아야해”하면서 아내한테 모든 것이 있음을 말하는데 말 그대로 가정의 평화를 이루고 살려면 아내의 말을 잘들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팔불출은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남편분들! 퇴직이나 일을 그만 끝낸 남편분들! 오직 아내의 눈치만 보면서 지내시는가요? 아내는 말합니다. " 남자는 집안에 있지말고 밖에서 지내야 합니다."라며 밖으로 쫓아냅니다(?) 그러면 아내는 남편에게 용돈을 줍니다. 여성분들은 이제 더 무엇을 원합니까? 남녀평등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상위시대이지 않습니까? 공평합니다. 걱정하지마십시오. 맞지요? 남녀평등이 아니라 여성상위시대라는 것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