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 주님 수난 성지 주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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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4-01 | 조회수217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교회는 오늘 성지(聖枝) 축복과 행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영광스럽게 기념하는 한편, ‘주님의 수난기’를 통하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성지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것은 4세기 무렵부터 거행되어 10세기 이후에 널리 전파되었다. 복음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4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일이 일어난 것이다. 9 그리고 앞서 가는 군중과 뒤따라가는 군중이 외쳤다. 주해 예루살렘 입성 마태오는 마르 11,1-11을 베끼면서 제법 많이 고쳤다. 두드러진 개작들만 지적하면 이렇다. 마르코에 따르면 두 제자가 새끼나귀 한 마리를 몰고 오자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신다. 그런데 마태오에 따르면 두 제자가 암나귀와 새끼나귀를 함께 끌고오자 예수께선 그것들 위에 타신다. 마태오가 그렇게 개작한 까닭은 성취인용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즈가 9.9에 보면 임금이 암나귀와 새끼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호산나”(말 11.9)에 존칭을 덧붙여 “다윗의 아드님께 호산나”(9절)라고 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온 도시가 들뜨고, 예수님은 예언자라는 말이 돌았다는 결어를 마태오는 덧붙였다. 1절 마르 11.1에 지리 묘사 “그들이 예루살렘과, 올리브 산의 벳파게와 베다니아에 다가오자”는 매우 어색하다. 마태오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다가와서 올리브 산과 벳파게에 이르렀을 때에”라고 자연스럽게 고쳐썼다. 2절 예수께서는 선견지명이 있으시고 메시아의 전권으로써 나귀들을 징발하신다. 예수님의 같은 면모가 최후만찬 준비과정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매여 있는 암나귀와 그와 함께 있는 새끼나귀”는 야곱이 유다를 축복한 말 “그는 자기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어 두고 암나귀의 망아지를 고급 포도나무에 매어 두리라”를 연상시킨다. 4절 4절은 성취인용문의 도입문이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라”는 이사 62.11 인용문이고, “보라... 새끼나귀를 타시고서”는 즈가 9.9 인용문이다. 예수님은 온유한 메시아인신지라, 말을 타지 않고 창세 49.11: 즈가 9.9. 예언대로 나귀를 타고 “시온의 딸”에게로, 곧 예루살렘 시민들에게로 가신다. 9절 유다인들은 순례 축제때 만다 이른바 할렐 시편을 외었다. 호산나는 할렐 시편 중 118.25에 나오는 청도로서 직역하면 “(하느님), 구원하소서”다. 그러나 여기 예루살렘 입성사화에서는 마치 “만세”와 같은 환성이다. 순례 축제 때면 제관이 성전 입구에 서 있다가 입장한 순례객에게 “오시는 분은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받으소서”하며 환영인사를 했다. 이 환영인사가 할렐 시편 118.26에 들어 있다. 그런데 예루살렘 입성사화에서는 그저 환영인사가 아니고, 예수님은 주 하느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는 그리스도론이 엿보인다. 따라서 역문조차 바뀌게 마련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축복받으소서.” 10절 결어는 마태오가 만든 것이다. 온 예루살렘 시민이 들떠서 “이분이 누구냐” 묻는다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 예언자”라는 군중의 답변은 예수님의 정체를 충분히 밝히지는 못했다. 사실 예수님은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분이시다.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주님의 종’의 샛째 노래).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주해 6절 “모습”을 직역하면 “형태”다. “하느님의 모습”은 하느님으로서의 존재 양식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는 강생 전에 신성을 지니고 선재(先在)하셨다고 한다. 2.6은 신약성서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의 선재 사상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노획물”은 아무도 쉽게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하느님과 동등하게 되려는 욕심을 품었던 아담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마땅히 받을 수 있는 신으로서의 대우를 미련없이 포기하셨다. 7절 이 찬가의 작자는 그리스도의 강생을 소박하게 표현하여, 그분은 본래의 자신을 “비웠다”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존재 양식을 가리킨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신인神人 또는 초인간으로 나타나지 않고 평범한 인간으로 처신하셨다. 그렇다고 신성을 떠난 것이 아니라 바로 종노릇을 함으로써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드런 보이신 것이다. 요컨대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권리를 내세우지 않고 모든 영광을 성부로부터 선물로 받고자 하셨다. “사람들과 비슷하게”, “여느 사람 모양으로”는 인간의 모든 조건, 특히 그 나약함을 함께 나누었다는 뜻이다. 8절 “낮추시다”는 3절의 “겸손”과 같은 어원에 속한다. 하강의 둘째 단계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함으로써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다. 아담의 불순종과는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철저히 순종하시어 끝까지 성부의 뜻을 따르셨다. 중죄인처럼 십자가에 처형될 떼 이 순종은 극도에 이르렀다. 로마인들이 노래들에게만 집행하던 십자가형을 당했으니 그것은 가장 수치스럽고 사람들의 기대에 완전히 어긋난 종말이었다. 이 사실을 바오로는 다른 데서 “십자가의 걸림돌”이라고 표현했다. 자기 비하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 9-11절의 고양高揚이 시작된다. 9절 부활과 승천을 가리킨다. 여기서 주어가 하느님으로 바뀐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낮추셨지만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높여 주신다. 이름은 한갓 명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의 지위를 나타낸다. 예수께서 받으신 이름은 11절에 나오는 “주님”이라는 칭호다. 유다인들은 입에 올릴 수 없을 정도로 신성시한 “야훼”라는 말 대신에 하느님을 “주님”이라 불렀으니, 예수께서 이제 신으로서 모든 피조물보다 높은 지위에 계시다는 뜻이다. 10절 우주의 총괄적 표현이다, 지하는 죽은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강생과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해 이 모든 차원을 두루 거치어 만물의 주님이 되셨다. 11절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다” 대신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 핵심이다, “모두가 무릎을 꿇고 입을 모아 고백한다”는 말은 이사 45.23을 인용한 것이니, 여기 주님이라는 칭호가 하느님과 동등한 그리스도의 지위를 가리킨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리스도 사건들의 최종목표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다. 그리스도께 경배하는 이는 결국 성부를 존경하는 사람인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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