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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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3-04-06 | 조회수681 | 추천수6 | 반대(0) |
아버님은 2011년 5월 5일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영정사진은 헌팅캡을 쓰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동창신부님이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이야기하면서 아버님은 이 세상 소풍 잘 마치고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다고 강론 하였습니다. 5월 5일이라서 아버님의 기일은 기억하기 쉽습니다. 어린이 날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제서품 받을 때입니다. 아버님은 저의 서품 성구인 시편 126장을 ‘족자’에 붓으로 써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느덧 아버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간지 12년이 되었습니다. 아버님을 회상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시류에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입니다. 술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아들을 보고 그 자리에서 ‘금주’를 하셨습니다. 하느님이 품으로 갈 때까지 술은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혜안입니다. 제가 본당 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아버님은 담장 안에 있는 은행나무의 가지를 잘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부러져 지나가는 사람이 다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런 혜안이 부족했습니다. 어머님은 2020년 9월 10일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영정사진은 순교복자수녀회 제3회 회원의 옷을 입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어머니의 장례미사에 함께하지 못하였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엄중한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 장례미사에 강론을 하였던 동창신부님이 어머님의 장례미사에도 강론을 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자상함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사랑하였던 아버님의 곁으로 갔습니다. 어머님을 회상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품어주는 따뜻함입니다.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가면 늘 따뜻한 밥을 장롱 이불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오면 따뜻한 밥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어머님의 모습에서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루가 복음 15장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나.”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말을 실천하였습니다. 많은 대녀들이 있었고, 어머니는 대녀들을 자상하게 챙겼습니다. 저는 그런 자상함이 부족했습니다. 오늘은 ‘성 금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에서 돌아가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7가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유언’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일곱 가지 유언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첫 번째 유언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일곱 번만 용서하면 되는지 물었을 때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선한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 유언은 “주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 3번이나 무참하게 넘어지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배반하였습니다.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고통과 아픔을 다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고난과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유언은 “목마르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목마르셨을까요?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을 멀리하는 우리들의 나약함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고 사람의 뜻을 먼저 찾으려는 우리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는 사제들의 위선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사제의 직무를 충실하게 지키지 않는 사제들의 게으름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베로니카처럼 우리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다면, 주님 얼굴에 흐르는 땀과 눈물을 닦아 드린다면 주님께서는 “시원하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네 번째 유언은 “다 이루었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봄 누에는 죽기까지 실뽑기를 그치지 않고, 초는 재가 되어야 비로소 눈물이 마른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혼인잔치에 기름을 준비했던 처녀들이 신랑을 맞이하였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열 개로 만든 종이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고, 더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품으로 갈 때까지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다섯 번째 유언은 “아버지 제 영혼을 맡기나이다.”입니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요셉 성인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성인과 성녀들은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여섯 번째 유언은 “어머니, 이 사람이 이제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요한아, 이 분이 너의 어머니이시다.”입니다. 예수님의 유언을 따라서 교회는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모시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유언을 따라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시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은 나약한 우리들이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우리들 또한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모시고 성모님의 전구를 청해야 합니다. 일곱 번째 유언은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입니다. 하느님의 평가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평가는 절대평가입니다. 우리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어 놓은 곳에 우리가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과 희망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빛은 어둠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희망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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