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10) 카인의 예배(禮拜)와 아벨의 예배(禮拜) (창세4,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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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4-07 | 조회수354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10) 2023. 4. 7. 카인의 예배(禮拜)와 아벨의 예배(禮拜) (창세4,1-9) 1 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 아이를 얻었다.” 2 그 여자는 다시 카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다. 3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4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6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7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8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9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이 땅에 에덴동산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은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聖殿)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출애굽하신 목적은 에덴성전을 회복하기 위함이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에덴성전을 회복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에덴성전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하고 또 우리가 날마다 하느님의 사랑을 호흡하면서 살아야하고 우리의 삶의 중심이 하느님이 중심이 되어야합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에덴성전을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에덴성전을 회복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예배(禮拜)입니다. 인간이 범죄 하기 전 에덴동산에서의 예배는 특별한 형식이 없었습니다. 삶 자체가 예배였고, 일자체가 예배였습니다. 또 모든 날이 다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한 후에는 이제 특별한 형식을 가진 예배가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카인과 아벨의 예배입니다. (창세4,1) 1 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니,(동침) 그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 아이를 얻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동침(同寢)하여 임신하여 카인을 낳았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카인이 아담과 하와가 낳은 첫 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창세기4장14절을 보면 “14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고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카인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범죄 한 카인이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들도 다 아담의 자손들입니다. 그러면 왜 여기서 아담이 하와가 여러 아이들을 낳았는데, 왜 오늘 본문에서는 카인과 아벨만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창세3,15)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최초의 약속입니다. 먼저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셔서 그를 부수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도 되지만 성경전체를 보면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여기서 나오는 뱀의 후손은 하느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사탄의 무리들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과연 사탄의 머리를 부술 여자의 후손이 누구인가를 기대했습니다. (창세4,1) “1 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니,(동침) 그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 아이를 얻었다.” 카인의 뜻이 야훼하느님 도움으로 득남(得男)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담과 하와는 카인이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씀하는 여자의 후손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카인이 아니라 아벨이 여자의 후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아들은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인류의 두 계열인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을 통해서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인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의 자손 중에서 카인과 아벨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자손 중에서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들 즉 여자의 후손이란 어떤 사람들이며, 하느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사람들 즉 뱀의 후손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의 예배와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이 아닌 자들의 예배가 어떤가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의 예배는 하느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고,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이 아닌 자들의 예배는 하느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예배를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대신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예배만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왜 아벨의 예배만 받으시고 카인의 예배를 받지 아니하신 이유를 우리는 보통 카인의 제사는 짐승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더 자세히 보기 바랍니다. (창세4,2) 2 그 여자는 다시 카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다. 여기 보면 아벨은 양치기였고, 카인은 농부라고 합니다. (창세4,3-5) 3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4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3절에 세월이 지난 뒤란 시간이 지나서 추수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추수 때가 되어서 카인은 감사의 제사로 땅의 소산(所産)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카인이 땅의 소산을 하느님께 드린 이유는 그는 농부였기 때문입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린 것은 아벨이 양치기 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만 아니라 곡물로도 제사를 드립니다. 소제의 경우가 곡물로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카인이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다고 할 때 그 제물이란 말이 “민하”인데, 이것은 소제의 제물을 말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카인이 짐승을 제물로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곡물의 제물도 받으십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왜 카인의 예배는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예배만을 받으셨습니까? (창세4,4-5) 4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여기 보면 하느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또 여기서 받으셨다는 말은 우리말로는 ‘기쁘게 받으시다’는 뜻인데, 원어로는 “응시하다. 둘러보다”는 뜻입니다(2사무22,42).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보신 것은 제물만이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린 사람입니다. 카인이 땅의 소산을 드린 것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제물만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카인을 하느님께서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가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물과 함께 아벨의 삶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아벨이 드린 제물과 아벨의 삶을 보시고 그의 예배를 받아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보는 것은 단순히 제물만 아니라 너희 삶도 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하기 전에 애굽에서도 제사가 있었습니다. 모든 이방나라에도 제사가 있습니다. 이 세상 나라의 제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떤 제물을 바치느냐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어떻게 되더라도 제물만 잘 바치면 신이 그들의 제사를 받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이사야를 통해서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사1,13) 13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왜 예배에 있어서 제물과 함께 삶을 보시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태초에 원하셨던 예배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단순히 예배의 형식만을 보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우리들의 삶을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벨과 같이 우리삶이 하느님께 기쁘시게 받으(悅納)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카인은 어떤 삶이었기에 하느님께서 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까? (창세4,5)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여기 보면 카인은 하느님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아니하셔서 몹시 화(禍)를내며 안색이 변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몹시 화를 내다.”는 “크게 진노하다”는 말입니다. 만일 카인이 하느님 앞에서 바른 사람이었다면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아야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했습니다. 그런데 카인은 하느님께 분노(忿怒)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크게 진노하고 있습니다. 이런 카인의 모습은 우리에게 바로 앞에 3장에서 나오는 선악과를 따먹은 죄악 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탄은 네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죄(罪)란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되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면 죄란 인간이 하느님보다 더 위에 있어서 하느님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것입니다.(누굴까?) 카인은 이런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대하여도 자기 마음대로 해 주시지 않자 분노하고 있습니다. (창세4,6-7) 6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7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느님은 너는 죄를 통제하고 다스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카인은 죄의 종노릇하다보니까 죄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 ~ (창세4,8) 8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여기 보면 그들이 들에 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 앞에서는 아벨을 죽이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들에서 죽입니다. 그런데 카인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하느님께서 그 곳에서도 보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창세4,9) 9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하십니다. 그가 하는 말이 “모릅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라고 합니다. 카인은 예배에 있어서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카인은 아벨보다 먼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카인의 예배를 받지 아니하신 이유는 카인은 아담의 원죄를 가진 죄인으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이 되어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은 무조건 내 기도를 들어주셔야 해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도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라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자신 안에 있는 죄를 통제하지 못하고 죄의 종노릇하는 상태에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예배를 받지 아니하셨고, 동생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였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그가 죄인이기에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죄악 된 삶 때문에 카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1요한3,12) 12 악마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자기 동생을 죽인 카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무슨 까닭으로 동생을 죽였습니까? 자기가 한 일은 악하고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히브11,4) 4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믿음 덕분에 아벨은 의인으로 인정받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제물)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믿음 덕분에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벨의 믿음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벨은 어린양을 제물로 드릴 때 그 어린양과 함께 그 자신도 죽었음을 믿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제사를 드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제물을 드리는 자가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합니다. (레위1,4) 4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안수). 그러면 그 제물이 그를 위해 호의로 받아들여져, 그의 속죄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안수(按手)란 그 제물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물을 드릴 때 제물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제물과 함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물이 죽을 때 그 제물과 함께 내가 죽었음을 믿음으로 드립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그와 함께 내가 죽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아벨처럼 믿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는 아담의 원죄를 가지고 있는 나의 옛 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예배란 내가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믿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하느님은 어떤 예배는 받으시고, 어떤 예배는 받지 않으십니까? ①첫째, 십자가가 있는 것이 아벨의 예배고, 십자가가 없는 것이 카인의 예배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를 믿는다고 했을 때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의 죄가 사(赦)해졌다는 것만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만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5장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로마서는 5장으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믿음에 관한 말씀은 6장까지 이어집니다. 그래서 로마서6장에서 세례는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외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고 하면서 세례의 물속에 잠기는 것은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나의 옛 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 세례의 물에서 나올 때 내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이제는 내가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음일 믿는 것입니다. (로마6,3-6.11) 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십자가)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믿음으로)모릅니까?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5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赦)함을 받았다는 것만을 복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함께 나의 옛 자아가 죽었음을 믿는 것도 복음입니다. 또 그의 부활을 믿음으로 내가 이제 죄(罪)의 종이 아니라 의(義)의 종임을 믿는 것도 복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아벨과 같은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음을 믿어야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날마다 죽은 자로 여기고 살아가야합니다. 그래서 미사 예배시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내가 죽었음을 믿음으로 미사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②둘째, 미움은 카인의 예배이고, 사랑은 아벨의 예배입니다. (1요한3,10-12) 10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 11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 악마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자기 동생을 죽인 카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무슨 까닭으로 동생을 죽였습니까? 자기가 한 일은 악하고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카인의 행위가 악한 것은 동생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한 것입니다. (1요한3,15) 15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카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미워하는 것 때문에 아벨을 살인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미움은 카인의 예배이고, 사랑은 아벨의 예배입니다. 우리가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한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라면 반드시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합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1요한3,14) 14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로서 진정한 사랑으로 아벨의 예배를 드릴 수 있을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③셋째,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이 아벨의 예배이고, 형식으로 드리는 것이 카인의 예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느님께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셨다고 하는데,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첫 새끼는 가장 귀한 제물입니다. 또 기름도 가장 귀한 제물입니다. 그러나 카인은 땅의 소산을 드렸다는데, 첫 소산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땅의 소산을 드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카인은 형식적인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느님은 단순히 우리의 삶만 보시지 우리가 드린 제물은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말라기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이 드린 제물을 문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병든 제물로 어떻게 페르시아 총독에게 바치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런 제물을 드리는 것은 나를 공경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성전에서 헌금 궤 앞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헌금의 액수를 보신 것이 아닙니다. 과부의 두 렙돈이 가장 귀한 예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배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드리는 예물이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예물 속에 너희 자신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코린8,5) 5 그들은 우리가 그렇게까지 기대하지는 않았는데도, 먼저 주님께 자신을 바치고, 또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도 자신을 바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물의 액수를 보시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에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드렸는가를 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삶과 함께 그가 드린 가장 귀한 예물을 받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드리는 예물을 보고 계십니다. (필립4,18-19) 18 나는 모든 것을 다 받아 넉넉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에파프로디토스 편에 보낸 것을 받아 풍족합니다. 그것은 향기로운 예물이며 하느님 마음에 드는 훌륭한 제물입니다. 19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천지창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로부터 나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미사예배시간에 우리 자신과 함께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하느님께 드리시는 모든 성도(聖徒) 되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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