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9주일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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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4-08 | 조회수205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39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42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주해 34ㄱ절 “입을 연다”라는 표현은 장중한 선언에 앞서 나온다. 37ㄴ절 루카는 예수사건이 요한의 세례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사건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시작하여 유다 전체를 거쳐 예루살렘에서 끝나게 된다. 38절 하느님이 예수를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으셨다는 표현은 루카 4.18을 반영한다. 공생활 사작과 시작과 더불어 소개된 예수의 나자렛 첫 설교는 이사 58.6과 61.1을 바탕으로 예수의 선교활동 전체를 조명하는 청사진을 제시한다. 성령과 능력의 연결에 대해 루카 1.17;4,14; 24.49; 사도 1.8 참조. 복음에서 예수의 능력은 치유행위에서 드러난다. “선을 베푸는”이라는 표현은 루카가 헬라 통치자들을 가리키는 칭호, “은혜를 베푸는 자”에서 영감을 받아 사용한 것 같다. 하느님의 인도와 보호를 가리키는 칠십인역의 표현, 이 표현은 소위 “양자 그리스도론”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루카가 이야기의 주인공들에게 부여하는 일반적 인물묘사에 해당한다. 양자 그리스도론이란 하느님이 인간 예수를 당신의 양아들로 채택하셨다는 학설이다. 하느님이 예수와 함께 계시다는 생각은 2.22에도 반영된다. 39절 베드로는 세례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삶을 목격한 열두 사도의 한 사람을로서 증언한다. 유다인들의 지방 안에는 갈릴애아도 포함된다. 십자가 처형 묘사는 5.30(신명 21. 23)과 유사하다. 40절 죽음과 부활에 대한 케뤼그마적 발언은 2.22-24; 3.13-15; 4.10과 비슷하다. 41절 사도들은 예수께서 하신 일과 그분에게 닥친 일의 증인이다. 그들의 증인 자격은 하느님이 미리 선정하여 부여하신 것이다. 곧, 하느님은 예수 사건에서처럼 제자들의 증인 자격에서도 주도권을 행사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식사를 했다는 진술: 루카 24.3—31; 36-42; 사도 1.2-6. 42절 예수를 심판자로 보는 생각은 루카복음 여러 대목에 암시된다.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자”는 만민의 주님이라는 묘사와 연결되면서 루카의 보편적 구원관을 시사한다. 이 표현은 초대 그리스도교 안에 일반화해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를 심판자로 세우신 분도 하느님이다. 인간의 보편적 구원을 주도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여기서도 강조된다. 43절 성서 말씀. 특히 예언자들의 말씀이 성취된다는 생각은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의 중심주제 가운데 하나다. 이 대목은 루카 24.44-47과 매우 흡사하다. “죄의 용서”는 루카가 즐겨 쓰는 용어다.
제 2독서 주해 7절 누룩은 빵을 부풀리는 데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부패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누룩 없는 빵은 “쑨결과 진실”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바오로는 여기서 축제에 앞서 남아 있던 묵은 누룩을 집 안에서 말끔히 치워 버리는 것 같은 파스카 세칙과 관련시킨다. 이스라엘 백성이 평소에 먹던 부드러운 빵을 없애고 딱딱하고 거친 빵을 먹으면서 조상들이 겪었던 고초를 기념하고 거기서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파스카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게 의해 죄를 묵은 누룩이 결정적으로 파괴되고 누룩 없는 빵으로 상징되는 거룩하고 순결한 파스카적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므로 그 동안의 잘못된 삶을 청산하고 굳은 각오로 이러한 삶을 실현해 나가야 한다고 권면한다. 많은 학자들은 역시서 파스카와 관련되는 누룩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근거로 이 편지의 집필시기를 파스카 축제와 가까운 때로 추정한다. 8절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삶”은 죄와 율법과 죽음의 지배 아래 종살이하던 옛 삶과 달리 축제적이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이 선사하신 자유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주해 1절 예수가 부활하던 날, 곧 “주님의 날”을 가리키는 그리스도인들의 표현으로서 일요일에 해당한다. 예수의 부활을 아직 믿지 못한 것을 가리키는 상징적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예수의 십자가사형 선고가 이루어진 빌라도의 심문이 “이른 아침”에 이루어졌듯이, 예수의 부활 증언도 “이른 아침”에 시작되었음을 시사하고자 한 듯하다. 갈릴래아 호수 남서편 지명으로서 마리아의 출생지를 가리킨다. 무덤 입구를 막은 큰 돌을 가리킨다. 2절 “다른 제자”란 베드로와 함께 언급된 익명의 “따른 제자”와 관련된 듯하다.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서 빼돌렸다는 당시 유다인들의 소문과는 달리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서 가져가 버렸다는 뜻이다. 이 말은 다른 대목에서도 막달라 마리아의 입을 통해 반복된다. 물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부활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예수의 시신이 무덤에 없다는 사실을 두 제자에게 알림으로써 급히 부덤에가서 확인토록 했을 따름이다. “우리”라는 표현은 무덤에 찾아간 이가 막달라 마리아 혼자가 아님을 시사한다. 일부 사본에는 “우리” 대신 “나는”으로 되어 있으나 본몬비판의 원칙에 따라 전자가 더 신빙성을 둔다,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과 달리 무덤에 찾아간 동기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공관복음에서처럼 예수의 시신에 도유하러 간 것은 아닐 것이다. 장례 때 이미 도유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슬픔 때문에 곡하러 갔을 것이다(11.31 참조). 3절 원문에는 동사가 단수형태로 베드로에게만 적용되어 있다. 즉, 막달라 마리아의 말에 베드로만이 즉각 반응을 보였다. 이 반응는 숨어 있던 베드로가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시사한 듯하다. 그리고 “애제자”에 관한 언급은 추가되었음도 밝히는 듯하다. 5절 예수의 “애제자”의 관계가 시사된 듯하고, 베드로의 권위있는 위치와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서 역할, 곧 위계질서가 반영된 듯하다. 아무튼 경주로 표현되듯이 베드로와 “애제자”의 어떤 경쟁임은 분명하다. 아마도 저자는 “애제자”가 베드로에게 말하고자 “애제자”를 전면에 내세운 듯한다, 7절 이 빈무덤사화의 전개과정에서 돋보이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눈으로 본 대상들이 점점 극적으로 고조되며 묘사된 점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입구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고, “애제자”는 무덤 안에 놓인 “염포들”을 보았으며, 베드로는 “염포들”과 “수건”을 보았다. 이런 묘사는 저자의 의도가 담긴 문학적 기교로 여겨졌다. 즉,베드로의 권위와 역할이 반영되며 그들이 눈으로 본 대상들은 예수의 부활을 알리는 임종의 표징으로 여길 수 있다. 부활한 예수는 새로운 천상적 실존을 취했기 때문에 “염포들”이나 “수건”이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었다”는 묘사는 “애제자”가 믿음을 가지게 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묘사와 비교할 때, 예수는 소생한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부활했다는 표징적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8절 빈무덤사화의 절정이다. “애제자”는 무덤 안에 들어가 정황을 보자 즉시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덤 안의 정황은 예수 부활이 표징이요 동시에 증언의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9절 빈 무덤 또는 예수 부활에 대한 두 제자의 불신이나 놀라움을 전제한 이 설명은 현 문맥에서 “에제자”의 믿음에 상충되지만, 내용상 그 믿음을 역으로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는 빈 무덤을 보고도 아직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으로 언급된 맥락에서 볼 때, 이 구절은 오히려 저자의 전승자료로 볼 수도 있다. 이 경우 “애제자”에 관한 언급은 추가된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성경”은 여기서 성경 말씀 전체를 가리키고 인용된 말은 공관복음의 선포적 수난예고와 관련된 말로서 특히 루카복음의 빈무덤사화와 맥락을 같이한다. 루카복음은 예수의 수난, 죽음. 부활이 성경에 이미 기록된 대로라고 보도한다. “그들은 아직도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란 말은 후대 신학적 성찰과 예수 부활을 통해 어색 된 새로운 성경 이해를 시사한다. 루카복음도 흡사한 말을 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이 빈 것을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게 알리자 둘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가 먼저 도착을 했으나 무덤에 들어가지 않았고 먼저 도착한 또다른 제자들도 들어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달리기를 못한 것을 보면 육중한 신체가 아니었나를 생각하게합니다, 이는 달리기만을 보자는 것이 아니라 나이도 제자들중에 제일 많이 먹은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다른 제자들 모두가 베드로보다 먼저 도착을 했어도 무덤에 먼저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가 들어가자 다른 제자들도 들어간 것은 이미 제자들이 베드로의 수위권을 인정했다고 보여집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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