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1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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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4-10 | 조회수412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주해 36절 이스라엘 백성을 “이스라엘 집안”이라고 한다. 베드로는 성령강림사건을 계기로 유다인들이 십자가형에 처한 예수가 주님이시오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사실ㅇ르 똑똑히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모든 인간은 자신들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위엄 앞에 응답을 요청받는다. 37절 37-40절에서 보는 바와같이 선교설교는 으레 회개의 촉구로 끝맺는다. 회개는 하느님을 등진 인간이 다시 하느님께로 “동라섬”을 뜻한다. 회개의 뜻을 드러내는 종교예식이 세례따. 회개와 세례의 결과는 죄사함과 성령강림이다. 요즈음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세례를 베풀었다. 관련구절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2.38:“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8.16: “주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9.5: “주 예쑤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0.4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명했다.” 39절 루카는 앞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 39절에서는 이를 부연하여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약속을 받으리라고 한다. 청중 편에서 보면 유다인들만을 생각하고 한 말이겠지만, 사도행전 전체를 보면 이방인들까지 포함한 말이다. 40절 “l 사악한 세대”는 신명(LXX)32.5와 시편(LXX)77.8에서 따온 표현이다. 필립 2.15에서는 “악하고 비뚤어진 세대”라고 한다. 비슷한 표현이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에 나온다(마태 12.39) 41절 오순절에 베드로가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에게 한 선교설교의 성과가 엄청나서 큰 교회가 창립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120여 명이 성령을 받았는데, 이제 추가로 3,000여 명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부활, 승천하신 예수를 받드는, 하느님의 새 백성이 탄생했다. 이 초대교회의 구성원들은 스테파노가 순교한 뒤에 사방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이 된다.
복음 <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주해 11절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다 이 대목은 앞 대목에 연결되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무덤에서 체험한 두 천사의 발현과 부활한 예수의 발현 장면을 보도한다. 일반적으로 첫 방면을 더 오래된 전승으로 여긴다. 이 내용은 특히 루카복음의 전승과 맥락이 같다. 이에 비해 둘째 장면은 마태오복음과 상통한다. 서로 다른 이 두 장면이 막달라 마리아가 “뒤로 돌아선다”는 묘사로 연결된다. 내용상 첫 장면은 빈 무덤에 대한 증인의 역할만 할 뿐 별다른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반면, 둘째 장면은 부활한 예수의 막달라 마리아의 만남과 대화가 보도되어 부활발현사화의 절정을 이룬다. 저자의 초대 관심사가 반영된 셈이다. 12절 현 문맥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다시 무덤으로 돌아왔다는 말도 없이 매끄럽지 않게 연결되어 있으나 원래는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찾아간 내용에 직결되었으리라 여겨진다. 마리아가 “울고 있었다”는 표현은 지속적으로 오래 슬픔에 잠겨 있었다는 뜻으로서 예수의 죽음보다는 시신이 없어진 데 대한 슬픔과 걱정을 가리킨다. 13절 흰옷 입은 천사들의 발현은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계시에 대한 묵시문학적 관념이나 표상으로서 많이 언급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실제적 증거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서는 부활 메시지를 전하는 공관복음과 달리 두 천사가 예수의 시신이 놓인 곳을 가리키면서 시신이 무덤 안에 없다는 것을 증거해줄 뿐이다. 따라서 천사의 입을 통한 빈무덤 사건의 설명이나 천사의 발현 자체와는 거리가 먼 묘사다. 두 천사를 보고 막달라 마리아가 전혀 놀라니 않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천사 발현에서 볼 수 없는 이색적 장면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천사에 대한 두려움이나 놀라움도 없이 보통 사람 대하듯이 대화를 나눈다. 천사의 물음은 상황에 알맞은 내용으로서 또한 부활한 예수의 입에서도 반복된다. 막달라 마리아의 대답도 시몬 베드로와 “애제자”에게 알린 내용의 반복이다. 이것은 부활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상봉 장면을 전제로 한 서술로 볼 수 있다. 즉, 부활한 예수 자신이 부활의 신비를 계시한다는 그리스도론적 관점에 역점을 둔 것이다. 14절 막달라 마리아와 천사의 상면에서 부활한 예수와의 상봉으로 장면이 바뀌는 일종의 서술적 기교다. 이것은 천사와의상면 장면이 이야기 전개과정에서 인위적으로 삽입되었음도 시사한다. 자기계시적 발현에 부활한 예수의 주도권이 시사된 듯하다. 15절 원문에 따르면 여자에 대한 자연스런 일반적 호칭이다. 없어진 예수 시신에 대한 슬픔과 걱정, 그리고 그 시신을 찾기에만 여념없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을 시시한다. 원문에 따르면 남자에 대한 정중한 호칭이다(퀴리에). 문맥에 따라 “아저씨”로 의역했다. 예수의 시신을 혹시 다른 무덤에라도 옮겼는지 묻는다. 16절 원문에는 마리아 대신 마리암으로 되어 있다. 마리아로 표기된 일부 고대 사본도 있지만, 마리암이란 셈족 계통의 표현이 더 원전에 가깝고, 랍부니라는 존칭에도 상응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예수의 이 부름은 평상시 마리아가 듣던 바로 그 음성이었을 것이다. 목자가 양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것을 연상시킨다. 부활한 예수는 믿고 잧는 자에게 자기 자신을 알아보도록 계시한다는 신학적 의미도 시사된 듯하다. 마리아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예수에게 향한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 일부 사본에는 “그분을 알고서”. 여기서 히브리어는 다른 대목에서처럼 아람어를 가리킨다. 랍부니는 아람어로서 “나의 선생님”이란 뜻이다. 랍비와 병용되지만, 좀더 정중하고 엄숙한 의미가 있다. 평상시 듣곤 했던 예수의 음성을 통해 부활한 예수를 알게 된 마리아도 이제 평상시 사용했던 존칭으로 응답한다 양들이 자기네 목장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가는 것을 연상시킨다. 부활한 예수는 마리아에게 바로 지상 예수와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새로운 방식으로 부활한 예수와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뿐이다. 마리아는 전인적으로 신뢰와 믿음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을 부르는 부활한 예수를 알아볼 수 있는 그런 믿음의 만남도 체험할 수 있었다는 신학적 의미가 시사된 셈이다 17절 붙잡지 말고 놔두라는 이유는 우선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의 부활을 알리도록 하는 데 있다. 지체하지 마고 어서 제자들에게 가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반면에 부활 실재는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다는 것을 뜻한다. 만짐은 인간 실존 확인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부활한 예수는 현세에 맞는 인간적 방법으로 감지될 수 있는 그런 실재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신앙 안에서 만나고 체험하는 실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께로 올라가야 하다는 예수의 말에서도 반증된다.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붙잡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말로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구절이다. 마치 부활한 예수가 지상과 하늘 사이에 떠 있는 듯 오해할 수도 있고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예전처럼 지상에 머물도록 하고자 했다는 오해도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예수가 부활하는 것,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것,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서로 분리된 별개의 일로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요한복음에만 특유한 표현과 함께 저자의 설명이기 때문에 저자의 신학적 의도에 따라 그 의미를 살펴야 한다,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말은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알려야 하는 예수의 말 가운데 설명되어 있고, 저자의 의도도 그 내용에 함축되어 있다. 한마디로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즉, 아버지께 올라가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와의 일치된 공동체를 중재해야 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 공동체는 예수가 아버지 하느님께로 떠나감으로써 형성된다. 마리아는 부활한 예수로부터 부활 메시지를 “형제들”에게 알리도록 위임받았음을 뜻한다. 여기서 “형제들”은 예수가 제자들과 맺은 새로운 관계를 시사한다. 즉,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 예수와 하느님과의 관계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예수가 고별 때 사용된 바를 제자들에게 상기시키는 메시지다, 이 메시지는 한마디로 예수가 아버지께로 올라감으로 인해 제자들에게 이루어진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된 공동체를 뜻한다. 예수의 아버지 하느님이 곧 제자들의 아버지 하느님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제자들은 이제 예수의 “형제들”로 칭해지게된다. 그러므로 부활한 예수는 “아버지의 집에” 제자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이제 아버지와의 일치된 공동체를 중재함으로써 지키게 된 셈이다. 또한 요한복음에 따르면 부활한 예수는 이미 아버지께로 올라갔음을 뜻한다, 즉, 예수의 죽음, 부활, 들어올려짐, 아버지께로 올라감, 영광스럽게 됨은 모두 동시사건으로서 예수의 “시간”이란 말안에 함축된다. 저자는 예수의 길의 시작과 마지막만을 염두에 시작과 마지막만을 표현된 시간적 구분은 다만 신학적 내용의 관점에 따른 표현에 불과하다. 즉, 제자들에게 발현한 예수는 이제 약속을 성취한 예수, 곧 아버지께로 올라간 예수라는 뜻이다. 18절 예수 부활발현을 체험했다는 의미다. 예수의 부활 체험에 바탕을 둔 부활 메시지의 선포를 뜻한다. 특히 한 여자가 남자들에게 예수 부활 소식을 알렸다는 점에 유의할 만하다. 아마도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의를 지킨 대가와 관련된 듯하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는 또 다른 전체 맥락에서 볼 때.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체험은 제자들에게 예수 부활 소식을 알리는데 의미가 있을 뿐이다.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발현하여 성령을 주고 죄를 사한 권한과 함께 사명을 부여할 것이므로 부활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만남은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발현한 내용을 말하기 위한 일종의 서막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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