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14) 그 방주(方舟)로 들어가라 (창세6:9-22) | |||
---|---|---|---|---|
이전글 |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2| | |||
다음글 | 알아두면 쓸데없는 "세계의 부활절 풍습" / 미니다큐 가톨릭발전소 | |||
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4-11 | 조회수274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창세기(14) 2023. 4. 11. 화 그 방주(方舟)로 들어가라 (창세6:9-22) 9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 10 그리고 노아는 아들 셋, 곧 셈과 함과 야펫을 낳았다. 11 세상은 하느님 앞에 타락해 있었다.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12 하느님께서 내려다보시니, 세상은 타락해 있었다. 정녕 모든 살덩어리가 세상에서 타락한 길을 걷고 있었다. 13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살덩어리들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들로 말미암아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 나 이제 그들을 세상에서 없애 버리겠다. 14 너는 전나무로 방주 한 척을 만들어라. 그 방주에 작은 방들을 만들고, 안과 밖을 역청으로 칠하여라. 15 너는 그것을 이렇게 만들어라. 방주의 길이는 삼백 암마, 너비는 쉰 암마, 높이는 서른 암마이다. 16 그 방주에 지붕을 만들고 위로 한 암마 올려 마무리하여라. 문은 방주 옆쪽에 내어라. 그리고 그 방주를 아래층과 둘째 층과 셋째 층으로 만들어라. 17 이제 내가 세상에 홍수를 일으켜, 하늘 아래 살아 숨쉬는 모든 살덩어리들을 없애 버리겠다.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이 숨지고 말 것이다. 18 그러나 내가 너와는 내 계약을 세우겠다. 너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거라. 19 그리고 온갖 생물 가운데에서, 온갖 살덩어리 가운데에서 한 쌍씩 방주에 데리고 들어가, 너와 함께 살아남게 하여라. 그것들은 수컷과 암컷이어야 한다. 20 새도 제 종류대로, 짐승도 제 종류대로,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들도 제 종류대로, 한 쌍씩 너에게로 와서 살아남게 하여라. 21 그리고 너는 먹을 수 있는 온갖 양식을 가져다 쌓아 두어, 너와 그들의 양식이 되게 하여라.” 22 노아는 그대로 하였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 앞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왜 이 세상을 심판하려고 하셨는가를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하게 이 세상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 사람들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죄악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분노하지 않으시고 근심하셨습니다. 근심이란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심으로 완전히 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서 하느님께 은혜를 받은 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노아입니다. 노아는 500년 동안 한 자녀도 낳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완전한 실패자 같았습니다. 또 500년 동안 하느님의 복을 하나도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느님께서는 이런 자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누구는 모두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왜 이런가? 왜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그 어떤 기도의 응답도 없는가?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서 은혜를 주시기 위한 준비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 사람들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 번성하고 잘 될 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실패가 하느님의 은혜의 기회입니다. 노아가 하느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창세6,9) 9 노아의 역사(족보)는 이러하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동행). 노아의 족보는 노아의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 이것은 노아가 죄가 없는 완전한 의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서 노아가 의인이라는 말은 노아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또 노아가 당대에 완전한(흠 없는) 자라는 것도 노아가 완벽한 사람이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서 완전한 자란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완전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또 여기서 완전한 자란 인간적으로 부족해도 그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완전한 자라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노아는 에녹과 같이 하느님과 동행(同行)하는 자였습니다. 노아는 무엇보다 그 시대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노아시대 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다가 홍수가 나서 다 멸망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당연히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이런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노아시대 사람들은 단순히 일상적인 일에만 빠져서 종말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심판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노아가 당대에 완전한 자로서 그 시대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았습니다. 그 비결은 매일 매일 종말을 준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120년동안 종말을 준비하며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하늘에서 홍수가 올 징조가 있는 가운데서 방주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눈으로 볼 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 어떤 종말의 징조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반드시 내가 이 세상을 쓸어버리겠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날을 지구 최후의 날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또 오늘 밤이라도 주님이 오실 것처럼 하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매일 망치질을 했습니다. 또 오늘 밤 주님이 오실 것처럼 하고 살아도 자녀를 낳았습니다. 오늘 밤 주님 오실 것처럼 하고 자녀를 믿음으로 잘 길렀습니다. 이렇게 노아가 하느님과 동행하며 살게 된 비결은 매일을 종말의 날로 여기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루가17,26-27) 26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예수님은 종말의 때에도 사람들은 노아시대와 같이 단순히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어떻게 노아처럼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도 이 매일을 종말의 날로 여기며 살아야합니다. (1고린7,29-31) 29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을 종말의 날로 여기며 살아간다는 것은 있지만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며 살아가는 가야합니다. 그래서 기쁜 일도 너무 기뻐하지 말고, 슬픈 일도 너무 슬퍼하지 말기 바라니다. 권세를 가진 자도 천년만년 가지지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끝입니다. 그래서 오늘 밤에 오실 주님을 생각하며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내가 당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절대화시키지 말고 상대화시키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우리가 절대화 시킬 것은 오직 주님과 그분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노아처럼 매일을 종말의 날로 여기시며 하느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됩시다. 노아시대는 어떠했습니까? (창세6,11-12) 11 세상은 하느님 앞에 타락해 있었다.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12 하느님께서 내려다보시니, 세상은 타락해 있었다. 정녕 모든 살덩어리(육신)가 세상에서 타락한(부패) 길을 걷고 있었다. 여기서 ‘하느님 앞에’란 하느님의 얼굴 앞에서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온 세상이 하느님의 얼굴 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12절에서 하느님이 보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매 순간이 하느님의 얼굴 앞에 있습니다. 또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 하느님이 보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노아시대 때 이 땅을 하느님의 얼굴로 보시니까 땅에서 모든 혈육(살덩어리)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살덩어리’란 하느님의 성령이 떠나 육체의 정욕(情慾)만 남은 인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땅에 부패한 것은 절대 이 땅에 있는 동물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성령이 떠나 고깃덩어리만 남은 인간 때문입니다. (창세6,13) 13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살덩어리들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들로 말미암아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 나 이제 그들을 세상에서 없애 버리겠다.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하느님의 성령이 떠나고 육신의 정욕만 남은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함으로 그 끝 날이 내게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땅과 함께 멸(滅)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멸하리라는 말인 ‘샤하트’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땅이 부패하였다는 말도 ‘쌰햐트’입니다. 또 혈육(血肉) 있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부패하였다는 것도 ‘샤하트’입니다. 그러니까 부패했다는 말과 멸(滅)할 것이라는 말이 같은 말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미래에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현재의 부패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현재의 부패가 곧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마태3,7-10) 7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9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10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우리의 미래는 현재 나의 모습을 보면 됩니다. 현재 나의 모습이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고 육신의 열매를 맺고 있다면 그것은 곧 심판입니다. 그러나 현재 나의 모습이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다면 나는 이미 영생(永生)을 얻은 자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없는 육신의 정욕대로 살지 마시고 오직 성령을 쫓아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들이 됩시다. 이 땅의 심판을 말씀하시고 하느님께서 이제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6,14) 14 너는 전(고페르)나무로 방주 한 척을 만들어라. 그 방주에 작은 방들을 만들고, 안과 밖을 역청으로 칠하여라.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너는 전(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고페르 나무는 옛날 번역에서는 잣나무라고 되어 있는데,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어 그대로 고페르 나무라고 했습니다. 고대에 삼나무의 일종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심판을 대비해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방주라는 말은 테베라는 말입니다. 이 테베라는 말은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만들었는데, 그 갈대 상자가 바로 테베라는 말입니다. 노아 방주는 큰 테베이고, 갈대 상자는 작은 테베입니다. 이 창세기를 모세가 기록을 했는데, 모세는 자신이 어릴 때 물에서 건짐을 받은 갈대 상자와 노아의 가족들이 물에서 건짐을 받을 방주를 같은 테베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갈대 상자와 노아 방주의 공통점은 모두가 인간적인 동력장치가 없습니다.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갈대 상자에 태울 때 옆에서 노를 저어서 바로의 공주에 간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모두가 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갈대 상자는 하느님의 품어주는 손이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모세를 하느님의 품어주시는 손에 그냥 맡겼습니다. 그 상자가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합니다. 그 상자가 나일강의 급류에 휘말려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어머니는 그 상자를 하느님의 품어주시는 손으로 생각하고 그냥 맡겼습니다. 그랬을 때 정확하게 파라오 공주의 딸에게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노아방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방주에도 인위적인 노가 없습니다. 키도 없습니다. 노아방주는 그냥 물위에 떠 있는 것입니다.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노아방주도 하느님의 품어주시는 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품어주시는 그 손에 노아와 그의 식구들과 동물들이 들어갔을 때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홍수가운데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인간의 동력장치가 전혀 없는 하느님의 품어주시는 손안에 네 인생을 모두 맡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창우박사의 ‘바디바이블’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잠이란 “하느님께 맡기라고 하는 부르심이다” 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자는 사람은 아기입니다. 아기는 하루에 18시간 이상 잡니다. 그 자는 시간을 통해서 몸이 자랍니다. 아기가 잠을 잘 수 있는 이유는 엄마의 품에 안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잠은 하느님께 나를 완전한 맡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동물 중에서 물에 빠져 죽는 유일한 종은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평생 우리 밖을 나온 적이 없는 돼지를 물에 빠뜨리면 물에 둥둥 잘 뜹니다. 물에 대한 경험도 없는데 수영을 합니다. 소도,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에 빠지면 가라앉습니다. 허우적거리다가 가라앉아 죽습니다. 하지만 죽으면 물에 뜹니다. 왜냐하면 본래 인간도 물에 뜨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폐에 사람 주먹만한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만큼 물보다 가벼워 뜨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왜 인간만 가라앉는 것일까요? 자신을 맡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걱정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온 몸이 굳어 혈관이 막히는 것일까요? 왜 암에 걸리고 화가 나고 병이 들어 삶의 해수면 위로 둥둥 뜨지 못하는 것일까요? 맡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잠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안으시겠다는 신호입니다. 잠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라는 고요한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돈에 있습니까? 명성에 있습니까? 우리를 믿어주는 사람들에게 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은 오직 하느님의 품어주시는 손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품어주시는 그 손에 나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노아방주는 우리를 안아주시고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손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안아주시고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손에 모든 걱정, 근심, 그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살아가는 모든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직접 설계하신 구조물은 노아 방주와 성막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노아방주를 성막의 모형으로 보기도 합니다. (창세6,14) 14 너는 전(고페르)나무로 방주 한 척을 만들어라. 그 방주에 작은 방들을 만들고, 안과 밖을 역청으로 칠하여라. 방주를 만들되 먼저 방주 안에 “작은방(칸)들을 만들고”라고 합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너는 둥지들을 만들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노아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방주 안에 칸막이들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모든 동물들이 쉬고 안식할 수 있는 둥지를 만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동물들이 방주에서 쉼과 안식을 얻도록 각기 그 동물들에 맞게 둥지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새 둥지에는 새에 맞게 둥지를 만들었을 것이고, 또 동물들에게는 그 모든 동물들에게 맞게 둥지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요한14,1-2)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居處)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그러니까 노아 방주에 모든 동물들도 각자 맞게 안식(安息)할 수 있는 둥지가 있듯이 하느님의 아버지의 집에는 우리 모두가 각기 맞게 안식할 수 있는 거처(居處)가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집을 하느님의 품으로 보았을 때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는 우리 각자에 맞게 품을 수 있는 가장 알맞은 거처가 있음 입니다. 또 14절에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안과 밖을 역청으로 칠하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청은 지금으로 말하면 아스팔트와 같은 것이나 나무 송진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역청을 칠하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카파르”입니다. 이 ‘카파르’는 어린 양의 피로 우리의 죄를 덮는다고 했을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성경(聖經)에서는 카파르가 우리의 죄를 속(贖)한다. 우리의 죄를 사(赦)한다고 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우리가 죄악의 물결이 넘실대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속제 제물이 되시는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안팎으로 칠해져서 더 이상 우리 안에 죄악의 물결이 들어오지 못하게 주님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마치 방주가 물위에 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의 물 위에 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서 저 산속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 우리는 이 세상의 물속에 잠겨 있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 속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살 수 있는 비결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寶血)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죄악 된 몸과 마음을 온전히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칠해서 예수님의 보혈의 권세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방주와 같이 이 세상의 물위에 떠 있을 수 있는 모든 성도(聖徒)들이 됩시다. (창세6,15) 15 너는 그것을 이렇게 만들어라. 방주의 길이는 삼백 암마(규빗), 너비는 쉰 암마, 높이는 서른 암마이다. 현대 선박전문가들은 배의 길이가 높이의 10배가 되고, 길이가 너비의 6배가 비율이 물위에서 가장 안전하게 뜰 수 있는 배라고 합니다. 바로 노아 방주가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길이가 삼백이고 높이가 삼십암마(규빗)니 길이가 높이의 10배가 되고, 또 길이가 삼백암마(규빗)이고, 너비가 오십규빗 이니까 길이와 너비의 비율이 6배가 됩니다(길이 삼백-높이 삼십(10배)/길이 삼백-너비 오십(6배). 그래서 하느님께서 설계하신 노아방주는 현대 선박구조에서도 가장 안전한 구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설계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 설계도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을 가장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인생 설계도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풍랑(風浪)이는 이 세상에 살더라도 하느님께서 우리 인생을 설계하신 대로만 살아가면 가장 안전하게 살 수 있습니다. (창세6,16) 16 그 방주에 지붕을 만들고 위로 한 암마 올려 마무리하여라. 문은 방주 옆쪽에 내어라. 그리고 그 방주를 아래층과 둘째 층과 셋째 층으로 만들어라. 방주는 오직 위에만 창이 있습니다. 노아 방주는 앞을 볼 수 없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위의 창문을 통해서 위만 바라보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이 앞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 계신 하느님만 바라보면 얼마든지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방주에 대한 설계도를 말씀하신 뒤에 이제 이 세상을 홍수로 완전히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6,17-18) 17 이제 내가 세상에 홍수를 일으켜, 하늘 아래 살아 숨쉬는 모든 살덩어리들을 없애 버리겠다.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이 숨지고 말 것이다. 18 그러나 내가 너와는 내 계약을 세우겠다. 너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거라. 하느님께서는 그 홍수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와는 내 계약을 세우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언약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언약입니다. 아무리 큰 홍수가 와도 내가 반드시 너를 지키겠다는 언약입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너를 떠나지 않으며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항상 성경에서는 언약의 증표는 피(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피가 너희를 향한 언약의 표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루가22,20) 20 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4살 된 어린아이가 급성폐렴에 걸려 숨을 몰아쉬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 엄마 아빠 절대 날 떠나지 마, 절대 날 버리지 마, 언제든지 나와 함께 할꺼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엄마 아빠가 ‘아가야 절대 널 떠나지 않는다. 언제든지 너와 함께 할 거야’ 라고 하면서 ‘딸아 사랑한다’ 고 하면서 안아주는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그 부모님들이 우리 곁에 계시는 보혜사(保惠師) 성령하느님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도 우리 곁에 계시는 성령하느님은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른 채 숨을 몰아쉬면서 과연 이런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까 혹시 하느님께서 나를 버리시면 어떻게 하나고 근심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너를 버리지 않겠다. 네가 땅 끝까지 갈지라도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닌 그런데 ‘하느님 난 도무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어요’ 라고 하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못 믿겠거든 내 아들을 피를 보아라, 나는 내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너에게 약속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버리지 않겠다” 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우리 곁에 계신 보혜사 성령하느님은 그 십자가의 피를 흘리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세상은 노아홍수 때와 같이 완전히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방주 안에 들오기만 하면 안전합니다. 이 노아의 방주는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손입니다. 또 이 방주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옆구리에 피를 흘리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아구스티노는 노아 방주에 옆으로 난 문은 옆구리에 창이 찔려 피를 흘리신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며 너를 지켜 줄 것이다. 그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오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구원의 방주(方舟)로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