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11.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은 부활 예수님께 대한 막달레나 마리아의 사랑이야기 2탄입니다. 사랑의 장소는 동산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처음 준비되고 이루어진 곳도 동산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산에서 사랑으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 또 다시 동산에서 사랑으로 부활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그렇게 에덴동산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소명을 주십니다.
두 제자는 이미 돌아갔건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차마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울다”의 원어의 뜻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큰소리로 통곡하여 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곧 사랑이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무덤을 들여다보고 하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두 천사를 봅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습니다.”(요한 20,12)
성 그레고리우스는 천사가 있었던 “머리맡”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는 사실을, “발치”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사실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곧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심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또한 그녀는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라는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그랬고(루카 24,13-35),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의 일곱 제자들도 그랬습니다(요한 2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무엇인가를 요청하고 무엇인가를 도와달라고 하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러기에, 부활 체험은 ‘낯선 이’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낯선 이’의 요청 안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고 ‘눈이 열리어’(루카 24,31)야 할 일입니다. 그분은 나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이집트에서 불러내듯, 동굴에서 불러내듯 나를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는 당신이 더 이상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아는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자신이 모르는 낮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손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든다.’고 말합니다.
결국, 부활은 다름 아닌 사랑의 승리이며,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결코 그 무엇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은 예수님처럼,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늘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늘 사랑하는 일에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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