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2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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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4-11 | 조회수325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9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주해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치다 루카는 예루살렘 신도들의 생활을 집약하면서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기적들과 표징들이 일어났다”고 했다. 이제 루카는 베드로가 앉은뱅이르 고친 기적을 소개한다. 이 기적은 당대의 기적 이야기 서술양식에 따라 상황묘사, 기적적 치유, 치유 실증 목격자들의 반응 순으로 짜여 있다. 이 치유사화의 전승과정에서는 베드로 사도만 등장했는데, 루카가 요한 사도를 덧붙였다는 설이 득세하고 있다. 그 근거로, 루카가 베드로와 요한을 짝지은 사례, 최고의회에서 이 두 사람이 함께 예수를 증거함으로써 증인의 신빙성을 높일 필요성 등을 꼽는다. 이밖에도 루카의 가필이 더 있다는 설에는 학설이 일치하나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이 가필이냐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1절 유다인 시간 계산법에 따르면 낮을 열둘로 나누고 때뜬 뒤 한 시간이 지난 때를 첫째 시라고 불렀다. 원문의 “아홉 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세 시”다. 성전에서는 매일 아침과 오후에 정기적인 제사를 드렸는데 오후 제사는 세 시경에 드렸다. 2절 “아름다운 문”의 위치는 정확히 밝힐 수 없다. 그런 문이름이 여기말고는 전해오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아름다운 문”은 나카노르 문과 같다고 본다. 그런데 니카노르 문의 위치 또한 불분명하다. 이 문은 여자들의 뜰과 남자들의 뜰 사이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나 솔로몬은 행각에서 여자들의 뜰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자선”은 마태 6.2.3.4말고는 신약성서를 통틀어 오직 루카복음에 열 번 사용하는 낱말이다.루카는 자선을 매우 강조했다. 6절 “은과 금”은 은화와 금화, 곧 돈을 가리킨다. 사도들은 앉은뱅이에게 돈을 주는 대신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부활하여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치유의 은혜를 베풀었다. 부활하신 예수께 대한 믿음이야말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사유재산 대신 공유하고 있던 절대적 가치였다. 괄호 안에 든 (일어나)는 알렉산드리아 사본에는 있으나 시나이. 바티칸, 베자 사본에는 없다. 원전 평가위원회는 이 낱말의 원전 삽입 여부를 결정하지 않은 채 괄호에 묶어 남겨 두었다. 질좋은 사본들이 각각 없는 쪽과 있는 쪽을 다같이 지지하고 있기때문이다. 복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주해 13절 두 사람은 열두 제자단에 속하지 않으나 예수께 동조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엠마오 마을에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 날”은 현재의 문맥상 빈 무덤을 발견하고 확인한 일요일,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에 만찬례를 지냇기 때문에 엠마오 발현 날짜를 일요일로 잡았을 것이다. 한 스타디온는 약 185미터, 파피루스 75로. 바티칸. 알렉산드리라, 베자 사본에서는 “육십 스타디온”이라 하는데, 환산하면 약 11키로미터. 그러나 시나이 사본에서는 “백육십 스타디온”이라 하는데, 환산하면 약 29.5킬로미터, ‘엠마오’가 어딘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다. 여러 후보지가 있다. 그냥 나열만 하면 예루살렘에서 6.5킬로미터 떨어진 암마우스 일명 쿨론예. 12킬로미터 떨어진 엠 꾸베이베 13킬로미터 떨어진 아부 고셔. 32.5킬로미터 떨어진 암와스 일명 니코폴리스. 18절 요한 19.25에 의하면 “글로파의(아내?) 마리아”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지켜보았는데 이 “글로파”와 여기 18절의 “글레오파”가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24절 루카복음에는 “속량” 명사가 1,68에 한 번, “속량하다” 동사가 24,21에 한 번 나온다. 24절 12절에서는 베드로 홀로 무덤에 가서 그것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 20,3-10에서는 베드로의 애제가가 함께 가서 확인했다고 한다. 27절 유다인들은 구약성서 전체를 가리켜 “율법과 예언자들”,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 또는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들과 시편들”이라고 일컬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구약성서를 이해했다. 그리스도야말로 구약성서의 목표를 핵심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신약성서 필자들은 한결같이 예언과 성취의 도식을 사용했다. 30절 이스라엘에서는 식사 때 가장이 30절과 같은 행동을 한다. 예수께서도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최후만찬때 그렇게 하셨다.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이 만찬례를 거행할 때도 역시 그렇게 했다. 30-31절은 분명히 교회의 만찬례를 암시한다. 34절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 우선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이 신조(1고린 15,3-7)에도 들어 있다. 베드로는 제자 가운데 맨 먼져 부활하신 예수를 뵌 다음 열한 제자의 동료들을 집결시키고 그들의 믿음을 굳세게 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스무살 초반에 부산에 있는 제철회사에 근무할때입니다. 저는 대학도 안나왔고 기술 또한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회사에 들어갈때에 일반노동자 신분이였습니다. 철사들이 빨갛게 달아올라 감겨져 생산이 될때는 긴장이 감돕니다. 철사들이 제 자리에 있지 않고 한올이라고 감겨져 나올때면 우리가 갈구리로 감겨지게 하여도 되지만 그것은 기술자들의 몫입니다. 우리는 철사들이 감겨져 커다른 뭉치로 나온 것을 단단히 묶어야하는 일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하는 우리들은 전부가 아버지뻘 되는 사람과 젊은 나였습니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뜨거운 것이 아니라 따뜻한 철사들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한 다발씩 묶고 나서 쉴때는 둥그렇게 감겨져 있는 철사구멍안으로 들어가 쉬곤합니다. 따뜻합니다. 아직은 젊어서 그런지 힘이드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들 이렇게 하여 일을 마치고는 샤워를 하고 집으로 퇴근을 합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무엇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그저 나이드신 분들이 착착착 해나가는 것을 따라 할 뿐입니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퇴근을 할때인데 어르신들이 나를 부릅니다, 나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데려간 것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허름한 막걸리집이 있는데 그곳으로 나를 데리고 간 것입니다, 술한잔을 마시면서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를 않고 막걸리 한잔의 동료가 됩니다. 그럴때면 나는 ‘야 이렇게 사시는 분들이 있구나.’ 하며 정말 감사의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분들게 감사를 드립니다. 막걸리 한잔이 모든 고달픔을 해결해줍니다. 요즘은 산불이 많이나서 고달프다고들 합니다. 수많은 헥타르의 숲이 탈 때 진화하느라 얼마나 힙이 듭니까? 그런데 저는 자연발생적으로 커나가는 나무들과 풀은 아니지만 우리들이 줄을 맞추기도하고 어느 나무를 심을까 고심하여 종류를 맞추어 심어서 자라게 하면 전화위복이 되지 않을까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시간이 얼마나 흘려야 될가요. 우리들의 자손들은 우리들이 만든 숲에서 자라날 것입니다. 슬픔에 빠지지 말고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습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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