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15) 방주(方舟)에 있던 자만 남았다. (창세7,1-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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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4-12 | 조회수296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15) 2023. 4. 12. 수 방주(方舟)에 있던 자만 남았다. (창세7,1-24) 1 주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가족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거라. 내가 보니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2 정결한 짐승은 모두 수놈과 암놈으로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수놈과 암놈으로 한 쌍씩 데려가거라. 3 하늘의 새들도 수컷과 암컷으로 일곱 쌍씩 데리고 가서, 그 씨가 온 땅 위에 살아남게 하여라. 4 이제 이레가 지나면, 내가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에 비를 내려, 내가 만든 생물을 땅에서 모두 쓸어버리겠다.” 5 노아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 6 땅에 홍수가 난 것은 노아가 육백 살 되던 때였다. 7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로 들어갔다. 8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새와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모든 것이 9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수컷과 암컷 둘씩 노아에게 와서 방주로 들어갔다. 10 이레가 지나자 땅에 홍수가 났다. 11 노아가 육백 살 되던 해 둘째 달 열이렛날, 바로 그날에 큰 심연의 모든 샘구멍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들이 열렸다. 12 그리하여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에 비가 내렸다. 13 바로 그날, 노아는 자기 아들 셈과 함과 야펫, 자기 아내, 그리고 세 며느리와 함께 방주로 들어갔다. 14 그들과 함께 모든 들짐승이 제 종류대로, 모든 집짐승이 제 종류대로, 땅을 기어 다니는 모든 것이 제 종류대로, 그리고 모든 새가 제 종류대로, 곧 온갖 날짐승과 날개 달린 것들이 들어갔다. 15 살아 숨쉬는 모든 살덩어리들이 둘씩 노아에게 와서 방주로 들어갔다. 16 이렇게,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모든 살덩어리들의 수컷과 암컷이 들어갔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 노아 뒤로 문을 닫아 주셨다. 17 땅에 사십 일 동안 홍수가 계속되었다. 물이 차올라 방주를 밀어 올리자 그것이 땅에서 떠올랐다. 18 물이 불어나면서 땅 위로 가득 차 오르자 방주는 물 위를 떠다니게 되었다. 19 땅에 물이 점점 더 불어나, 온 하늘 아래 높은 산들을 모두 뒤덮었다. 20 물은 산들을 덮고도 열다섯 암마나 더 불어났다. 21 그러자 땅에서 움직이는 모든 살덩어리들, 새와 집짐승과 들짐승과 땅에서 우글거리는 모든 것,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숨지고 말았다. 22 마른 땅 위에 살면서 코에 생명의 숨이 붙어 있는 것들은 모두 죽었다. 23 그분께서는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땅에 사는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셨다. 이렇게 그것들은 땅에서 쓸려 가 버렸다.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사람과 짐승만 남았다. 24 물은 땅 위에 백오십 일 동안 계속 불어났다. 이 세상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은 동물들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들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잃어버리고 육신의 정욕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부패함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우리는 육신의 욕정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노아시대는 성령이 떠나서 육신의 정욕대로 산 결과로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이 다 부패했습니다. 그 부패의 결과로 모든 땅이 부패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께서 세상을 심판하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인간이 부패하면 나중에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부패 그 자체가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이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부패가 곧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내가 성령을 쫓지 않고 육신의 욕망대로 살아간다면 나는 이미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내가 성령을 쫓아서 성령의 열매를 거두며 살아간다면 나는 이미 영생을 얻은 자입니다. 하느님은 홍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노아의 가족들에게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방주는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품어주시고 지켜주시는 하느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또 방주는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겨야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그 어떤 심판이 있어도 하느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 노아와 그의 식구들과 동물들이 방주 안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창세7,1) 1 주님(야훼)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가족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거라. 가 보니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야훼란 우리에게 언약을 하시는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앞 장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기 전에 “내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너와 함께 하겠다”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심판 가운데서도 너희를 지키고 보호하겠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에게 “너는 네 가족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내 앞에서’ 라는 말은 하느님의 얼굴 앞에서라는 말입니다. “세상은 하느님 앞에 타락해 있었다.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창세6,11) 고 하는데, 거기서도 하느님의 얼굴 앞에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온 땅이 하느님의 얼굴 앞에 있습니다. 또 우리의 모든 삶이 하느님의 얼굴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느님의 얼굴 앞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느냐에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예배(미사)를 할 때 우리가 하느님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내가 하느님의 얼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살아야합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은 그들이 하느님의 얼굴 앞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만 그 시대에 하느님의 얼굴을 인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하느님의 얼굴을 인식하며 그 하느님의 얼굴 앞에서 의로움을 보여주었습니다. (창세6,22) 22 노아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
이것이 하느님의 얼굴 앞에서 노아의 의로운 모습입니다. 사실 노아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어떤 홍수의 징조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아를 조롱했겠습니까? 그래도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또 노아가 방주만을 만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창세6,21) 21 “너는 먹을 수 있는 온갖 양식을 가져다 쌓아 두어, 너와 그들의 양식이 되게 하여라.” (창세7,5) 5 노아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 노아가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다 준행(遵行)할 수 있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노아가 어떻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다 준행(遵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창세6,14) 14 너는 전(고페르)나무로 방주 한 척을 만들어라. 그 방주에 작은 방들을 만들고, 안과 밖을 역청으로 칠하여라. 하느님께서 단순히 하느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즉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드는 것이 노아 자신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이 노아의 가족을 위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것이 나에게 손해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우리에게 여러 가지의 명령들을 하십니까? 물론 그것이 하느님을 위한 명령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느님을 위한 명령만 아니라 그것이 바로 나 자신과 우리의 가족들을 위한 명령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0장에서 우리가 하느님만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말라기3,10-11) 10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하늘의 창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 붓지 않나 보아라.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 떼를 꾸짖으리라. 그래서 그것들이 너희 땅의 소출을 망치지 않고 너희 밭의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하느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아와 같이 지금 당장 이해가지 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이라도 우리를 위해서라도 모두 순종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나를 위하고 가족을 위한 길입니다. 또 이제 하느님께서 더 구체적으로 노아 방주에 누가 들어올 것인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창세7,2-3) 2 정결한 짐승은 모두 수놈과 암놈으로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수놈과 암놈으로 한 쌍씩 데려가거라. 3 하늘의 새들도 수컷과 암컷으로 일곱 쌍씩 데리고 가서, 그 씨가 온 땅 위에 살아남게 하여라. (창세6,19-20) 19 온갖 생물 가운데에서, 온갖 살덩어리 가운데에서 한 쌍씩 방주에 데리고 들어가, 너와 함께 살아남게 하여라. 그것들은 수컷과 암컷이어야 한다. 20 새도 제 종류대로, 짐승도 제 종류대로,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들도 제 종류대로, 한 쌍씩 너에게로 와서 살아남게 하여라. (창세7,9) 9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수컷과 암컷 둘씩 노아에게 와서 방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이라고 한 것은 원래 암수 둘씩인데,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인 것을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왜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인데,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인 이유는 제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창세8,20) 20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그래서 홍수의 기간 중에서 방주에서도 정결한 짐승을 통해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데려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방주에서의 정결한 짐승의 제사를 통해서 노아에게 하시는 말씀이 “노아야 물론 너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는 의인이다. 또 내가 네게 말한 모든 것을 다 순종한 사람이다. 또 네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너는 완전한 자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너는 절대 완전한 자가 아니다. 또 완전한 의인도 아니다. 네가 이 방주에 들어오게 된 것도 절대 너의 완전한 의(義) 때문이 아니다. 네가 이 방주에 들어오게 된 것은 너를 위하여 희생당하는 저 정결한 짐승 때문이다. 그리고 저 정결한 짐승은 너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을 내 아들을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너는 제사를 드릴 때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은혜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노아 방주는 우리를 품으시는 하느님의 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우리를 품으시는 하느님의 손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느님의 품어주시는 손에 안기어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들이 됩시다. (창세7,4) 4 이제 이레가 지나면, 내가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에 비를 내려, 내가 만든 생물을 땅에서 모두 쓸어버리겠다.” 하느님께서 이레(7)가 지나면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서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행하시는 모습이 6절에서 12절까지 나옵니다. 특히 9절에 노아 방주에 노아의 가족들과 동물들이 방주에 다 들어가고 난 다음에 10절에 “이레가 지나자 땅에 홍수가 났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6절에 하느님께서 방주의 문을 받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아의 식구들과 모든 동물들을 방주에 다 들어가게 하신 후에 7일 동안을 기다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노아의 식구들과 모든 동물들이 방주에 다 들어간 후에 바로 홍수를 내려주지 않은 이유는 먼저 노아 방주에 있는 사람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만일 노아방주에 들어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런데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주일 후에 홍수가 올 것이라고 하지만 그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예리고성을 돌 때와 같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일주일 동안 예리고성을 돌라’고 합니다. 그런데 6일 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일 6일째 되는 날에 방주에서 나갔다고 해보기 바랍니다. 또는 6일 동안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기에 더 이상 예리고성을 돌지 않았다고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방주 안에 들어 간 사람들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일주일 후에 홍수를 내리셨습니다. (다니10,2.14) 2 그때에 나 다니엘은 세 주(이레) 동안 고행을 하고 있었다. 14 그리고 나는 뒷날(21일) 네 백성에게 일어날 일을 네가 깨닫게 해 주려고 왔다. 이 환시는 그때와 관련된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 그러면 기도의 응답이 세 이레 즉 21일 후에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다니엘 10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10,12-14) 12 그가 다시 나에게 말하였다.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깨달음을 얻고 너의 하느님 앞에서 극기하기로 결심한 첫날부터, 하느님께서는 너의 말을 들으셨다. 너의 그 말 때문에 내가 이렇게 온 것이다. 13그런데 페르시아 나라의 제후 천사(사탄)가 스무하루 동안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일품 제후 천사들 가운데 하나인 미카엘(선한천사)이 나를 도우러 오자, 나는 그를 그곳 페르시아 임금들 곁에 남겨 두었다. 14 그리고 나는 뒷날(21일) 네 백성에게 일어날 일을 네가 깨닫게 해 주려고 왔다. 이 환시는 그때와 관련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 기도를 하기로 결심했던 첫날부터 응답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세이레(3주) 째에 기도의 응답이 왔습니까? 그 이유가 다니엘서 10장 13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했을 때 하느님께 바로 응답해주십니다. 그런데 그 응답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사탄이 21일 동안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21일 동안 끝까지 믿음으로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왜 방주에서 7일 동안 있게 하시고 7일 후에 홍수를 내리신 이유는 방주에 있는 사람들이 끝까지 믿음으로 기다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도 분명한 기도의 응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당장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주일 일수 있습니다. 21일 일수 있습니다. 아니면 더 오랜 시간일 수 있습니다. (마르11,24)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한 것은 이미 받을 줄로 믿고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7일 후에 홍수를 내리신 그 이유는 방주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7일이 지나면 하느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십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의 힘으로는 그 방주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방주의 문이 닫히기 전에 회개(悔改)하고 방주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7일이 지난 후에 홍수를 일으키셨습니다. 지금도 왜 예수님께서 속히 재림하시지 않습니까? 왜 당장 하느님의 심판을 베풀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여 돌이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2베드3,9) 9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 하느님께로 다 돌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들이 됩시다. (창세7,10-12) 10 이레가 지나자 땅에 홍수가 났다. 11 노아가 육백 살 되던 해 둘째 달 열이렛날, 바로 그날에 큰 심연의 모든 샘구멍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들이 열렸다. 12 그리하여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에 비가 내렸다. 11절에 보면 그 날에 땅 속에 큰 깊음(深淵)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늘의 창문들이 열렸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가르시자, 그대로 되었다.”(창세1,7) 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이 있었습니다. 지구가 마치 온실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홍수 전에는 인간에게 유해한 광선이 지구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지구 전체가 온실과 같기 때문에 극지방에도 춥지 않았습니다. 노아 홍수 전에는 나이가 팔구백 살이었는데, 홍수 후인 창세기11장에 보면 나이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늘의 창문이 열렸다고 하는 것은 궁창 위에 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12절에서 비가 땅에 쏟아 졌다고 하는 것도 우리가 보는 그런 비가 아니라 마치 폭포수와 같은 물이 땅에 쏟아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올 불 심판의 예표(豫表)로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2베드3,12-13) 12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초(太初)의 세상도 추위와 더위가 없는 세상인데 새 하늘과 새 땅은 더욱 그러합니다. 날마다 태초의 세상보다 더 좋고 지금의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방주에 모두 들어간 7일 후 홍수가 땅에 사십 동안 계속됩니다. (창세7,17-20) 17 땅에 사십 일 동안 홍수가 계속되었다. 물이 차올라 방주를 밀어 올리자 그것이 땅에서 떠올랐다. 18 물이 불어나면서 땅 위로 가득 차 오르자 방주는 물 위를 떠다니게 되었다. 19 땅에 물이 점점 더 불어나, 온 하늘 아래 높은 산들을 모두 뒤덮었다. 20 물은 산들을 덮고도 열다섯 암마(규빗)나 더 불어났다. 물이 많아져서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다고 합니다. 또 물이 더 많아져 방주가 물위에 떠다녔다고 합니다. 그리고 물이 더 불어나 천하의 높은 산들이 다 잠기니 방주는 그 모든 산들 위에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이 들어가라고 하신 방주에 들어가면 세상의 물이 더 많아지면 질수록 우리는 세상 위로 더 높이 떠다닐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서 들어가라고 하신 방주 안에 있기만 하면 세상의 파도가 1이면 우리는 2의 높이로 하느님을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파도가 2면 우리는 4의 높이로 하느님을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들어가라고 하신 방주에 있기만 하면 우리에게 고난의 파도가 1이면 하느님은 우리를 2의 높이로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해 주십니다. 또 우리가 하느님께서 들어가라고 하신 방주에 들어가기면 하면 우리에게 고난의 파도가 2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10의 높이로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방주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창세7,21-23) 21 그러자 땅에서 움직이는 모든 살덩어리들, 새와 집짐승과 들짐승과 땅에서 우글거리는 모든 것,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숨지고 말았다. 22 마른 땅 위에 살면서 코에 생명의 숨이 붙어 있는 것들은 모두 죽었다. 23 그분께서는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땅에 사는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셨다. 이렇게 그것들은 땅에서 쓸려 가 버렸다.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사람과 짐승만 남았다. 오늘날의 방주는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에는 교회가 방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무조건 교회(성당)에 오기만 하면 세상의 심판 가운데서 무조건 구원을 받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묵시11,1-2) 1 그리고 나에게 지팡이 같은 잣대가 주어지면서 이런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일어나 하느님의 성전과 제단을 재고 성전 안에서 예배하는 이들을 세어라. 2 성전 바깥뜰은 재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그것은 이민족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들이 거룩한 도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 여기서 측량한다는 것은 심판 가운데서 구원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성전에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경배하는 자들을 심판가운데서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성전 바깥뜰(마당)은 측량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전마당만 밟는 자는 심판 가운데서 구원하지 않습니다. 성당에는 나옵니다. 단순히 미사예배는 참석합니다. 그런데 예배 가운데 과연 하느님을 만나고 가십니까?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가십니까? 그 하느님 앞에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경배하십니까? 그래서 성당이 무조건 방주가 아니라 교회(敎會, 믿음의 무리)가 방주가 되어야합니다. 교회가 방주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키를 하느님께 맡겨야합니다. 우리의 모든 주권을 주님께 맡겨야합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동력장치를 다 없애야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힘이 되기를 바라며 또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조건 순종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열린 창을 통해서 하느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회가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 속에 빠져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덮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운데 진정한 예배(禮拜)가 있어야 합니다. 형식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정결하신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하느님께 나올 수 없는 죄인임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예배를 통해서 나를 번제의 제물로 드려야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죽음을 경험해야합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우리 창4동교회가 진정한 노아의 방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코로나의 물결이 더 세면 셀수록 하느님께 더 높이 올라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물결이 우리에게 더 거세게 몰아치면 칠수록 하느님께 더 높이 올라가는 우리 창4동교회가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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