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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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3-04-12 | 조회수663 | 추천수8 | 반대(0) |
넷플렉스에서 “나는 신이다.”라는 다큐를 방영하였습니다. 내용이 다소 충격적인 영상이었지만 시간을 내서 보았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운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사람이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4가지의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창시자입니다. 불교는 석가모니, 유교는 공자, 이슬람교는 마호메트, 기독교는 예수님입니다. 창시자는 인간이 가지는 고통의 문제를 깊이 성찰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창시자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기고 종교가 됩니다. 둘째는 경전입니다. 불교는 불경, 유교는 사서삼경, 이슬람교는 쿠란, 기독교는 성경입니다. 경전은 대부분 창시자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경전은 내비게이션과 같아서 삶의 길에 이정표가 됩니다. 셋째는 사회성입니다. 단군신화는 ‘홍익인간’을 이야기합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합니다. 불교는 자비를 이야기합니다. 극락왕생을 이야기합니다. 유교는 인의예지를 이야기합니다. 충과 효를 이야기합니다. 이슬람교는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넷째는 죽음 이후의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불교는 윤회를 이야기합니다. 해탈을 이야기합니다. 유교는 현재의 삶에 충실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슬람교는 천국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는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신이다’라고 말하는 사이비 종교는 기존 종교의 ‘틀’을 가져와서 나름의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의 고통을 풀어주고, 갈증을 채워주었습니다. 초대교회처럼 사람들은 가진 것을 가져와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예배와 행사는 화려했습니다. 이적을 체험하기도 하였고, 기쁨을 느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선민의식도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율법과 계명에 충실했던 것처럼 교리에 충실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체험을 기꺼이 나누었고, 사람들은 모였습니다. 그렇게 이 땅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시작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사이비 종교에는 기존의 종교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자리에 교주가 있었습니다. 그런 교주에게는 겸손과 헌신이 없었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그 갈증을 성과 재물로 채우려 했습니다. 둘째는 자비와 사랑이 아닌 엄격한 규율과 폭력이 있었습니다. 이탈한 신자들에게 대한 폭력이 있었습니다. 교주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신자들에 대한 폭력이 있었습니다. 노동력의 착취도 있었습니다. 방송국에 난입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셋째는 익명성에 숨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략선교라는 말을 하면서 거짓을 일삼기도 합니다. 교주의 말이라면 사회의 공동선에 위배되는 일도 하는 맹목적인 모습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하려고 한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채우려고 하면 세례를 받은 신앙인이라고 해도 사탄의 세력에 지는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서품을 받은 사목자라고 해도 사탄의 세력에 지는 것입니다. 나의 잘못을 합리화 하고, 뉘우침이 없다면 서원을 한 수도자라고 해도 사탄의 세력에 지는 것입니다. 타산지석이라고 했습니다. 이단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모습에 허물이 없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왜 이 일을 이상히 여깁니까? 또 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들기나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바라봅니까?” 이적과 표징은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영광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는 다릅니다. 고난과 역경이 있을지라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는 평화입니다. 욕망을 채우면서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비우면서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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