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3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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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4-12 | 조회수448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13 여러분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고, 16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19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22 모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25 여러분은 그 예언자들의 자손이고, 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해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백성에게 설교하다 베드로는 성령강림절 설교에 이어 이제 성전 동편 뜰에 있는 솔로몬 행각에서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설교한다. 성령강림절 설교는 삼천 명 가량이나 세례를 받을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솔로몬 행각에서의 설교 때도 반응이 매우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는데 장정 수효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유다교 지도자들의 미움을 사서 베드로와 요한은 최고의회에 끌려가 심문을 받게 된다. 그래서 루카는 솔로몬 설교에서 선포문을 소개하면서 유다인들의 잘못을 꾸짖는다. 이어 17-26절에서 구약성서를 길게 인용하면서 경청과 회개를 간절히 촉구한다. 이 설교에도 루카의 기본 편집요소가 모두 나온다. 한편 루카가 이용한 전승요소는 예수의 존칭, 곧 “하느님의 종”,“거룩하고 의로운 분”, “생명의 창시자”, “그리스도”, “모세와 같은 예언자” 등과 종말 구원의 도래에 앞서 이스라엘의 회개를 선결조건으로 제시하는 견해, 아브라함의 후손을 그리스도와 연결시킴 등이다. 11절 “솔로몬 행각”은 성전 마당 동쪽에 있는 회랑이다. 사도들이 성전을 참배할 때면 솔로몬 행각에 모여 있었다고 루카는 말한다. 요한 10.22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성전 봉헌축제 때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셨다. 이 축제는 기원전 164년 12월 유다 마카베오가 시리아군으로부터 성전을 탈환하여 정화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다. 13절 베드로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태생 앉은뱅이가 걷게 된 것은 자신들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베드로는 이 예수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리고 그분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 13절 이하에서 밝힌다. 13-15절은 선교설교들의 공통된 요소 가운데 하나로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둘러싸고 드러나는 인간의 행위와 하느님 행위의 대비다. 빌라도는 예수를 무죄한 줄 알고 석방하고자 애썼다고 루카는 여러 번 말한다. 루카는 이스라엘 백성, 다윗, 마침내 예수를 일컬어 “하느님의 종”이라고 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하느님의 종이라고 한 까닭은 예수의 일생이 이사야에 나오는 신비스런 인물 “야훼의 종”의 일생과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이 서로 닮았던가? 루카는 예수 수난 또는 부활과 관련하여 “하느님의 종 그리스도론”을 전개했다. 루카는 야훼의 종과 예수의 대속죄 죽음에는 별관심이 없었던 같다, 마르코는 야훼의 종과 예수의 대속의 죽음에 관심을 가졌다. 마태오는 야훼의 종의 조용하고 수려한 면모, 선하고 자비로운 변모, 이방인들의 빛 구실을 하는 면모를 예수께 적용했다. 사도교부들까지도 예수를 일컬어 “하느님의 종”이라고 했다. 그러나 2세기 후반부터는 이 존칭이 소멸되었다. 13절 끝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는 하느님이 그분에게 치유의 능력을 주셨다는 뜻이다. 부활을 통한 영광은 15절에 가서야 언급된다. 14절 본래 하느님 홀로 거룩하시다. 그런데 하느님과 밀착된 예수도 거룩하다는 말이 종종 나온다. 7.52에서는 예수 메시아를 의인이라 한다. 거룩하고 의로운 예수께 반대되는 인물은 “살인자인 사내”바라빠다. 15절 “생명의 창시자”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있어 첫째 분이 되시어” 다른 이들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분이란 뜻이다. 창시자라는 존칭은 신약에 세 번 더 나온다. “창시자와 구원자”,“구원의 창시자”,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 16절 치유이적사화를 보면 병자가 병을 고쳐주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치유이적이 일어난다고 으레 말한다. “그 이름에 대한 믿음”은 앉은뱅이가 예수께 의지하는 믿음이다. 그런데 앉은뱅이의 믿음이 예수 “그분으로 말미암은 믿음”이라는 사실에도 유의해야 한다. 그리스도 신앙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17절 17-26절에서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돌아서라고 촉구한다. 이를 뒷받침하려고 구약성서를 길게 인용한다. “무죄한 탓으로” 예수께서는 한편 유다인들이 무지한 탓으로 죽임을 당하셧고 다른 하편 하느님의 구원 계획으로 돌아가셨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신록과 인간론의 양면 고찰은 베드로의 성령강림 설교에도 나온다. 19절 우리말 번역 “회개하다”는 그리스어 메타노메오(직역하면 “생각을 바꾸다”)의 의역이다, “회개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슈브(직역하면 “돌아서다”)는 하느님을 등진 인간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방향전환을 뜻한다. 일찍이 유다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랍비들에 관한 이야기에서 “돌아섬”의 참뜻을 감명깊게 밝힌 바 있다. “회개하다”와 “돌아서다”가 함께 나오는 단락은 루카 17,3-4; 사도 3.19; 26,18,20이다. “회개하다”(메타노에오)와 “용서받다”라는 뜻의 동사가 함께 나오는 단락은 마르 1,4(=루카3,3); 루카 24.47; 사도 2.38; 3.19; 5.31; 8.22‘ 26.18이다. 20절 회개의 결과로 사람들이 지금 사죄를 받게 되며, 장차 종말에는 시원한 시절이 올 것이요 예수께서 구원하러 오실 것이다. “시원한 안식의 시대”(직역하면 “시원한 시절”)는 묵시문학에서 따온 소재로서, 비슷한 소재가 에즈라 4서 11,46; 시리아어 바룩서 73.1-74.1에 나온다 20ㄴ21ㄱ절은 말라 3,23-24의 영향을 받았다. 곧, 엘리야 예언자가 승천서 하늘에 살고 있다가 역사의 종말인 야훼의 날을 앞두고 재림하여 민족 화해를 이루리라는 기대가 유다교에 잇었던 것처럼, 예수께서도 승천하여 하늘에 계시다가 재림하여 만물을 복원하리라는 기대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었다. 루카는 이런 종말 신앙. 예수 재림 신앙을 수용했다. 그러나 종말 재림은 임박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종말이 도래하기 전에 예수 증인들이 “모든 민족에게”“땅 끝에 이르기까지”(사도 1.8)예수 사건을 증언해야 하기 때문이다. 1.6에는 만물 복원 대신 이스라엘 국가 복원에 대한 기대가 있다. 22절 22절은 신명(LXX)18,15-16인용문으로서, 장차 하느님이 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보낼 터이니, 이스라엘 백성은 그 예언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문맥상 회개하는 일이 그 예언자의 말을 듣는 일이다. 23절 23절은 신명(LXX)18.19와 레위(LXX)23.29를 합한 혼합 인용문이다. 현재의 문맥상 그 뜻은 모세와 같은 예언자이신 예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하느님의 백성에 속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24절 예언자들이 모두 예고한 “이 날들”은 모세와 같은 예언자의 말을 들어야만 하는 현재다(22-23절). 25절 “네 후손으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축복받으리라”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곧, 하느님은 당신 종 예수를 부활시키고 세상에 파견하셨으며,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축복을 내리신다. 그 구원의 축복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중에는 세계 만민에게 내릴 것이다. 복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주해 36절 36ㄴ절은 파피루스 75호. 시나이. 바티칸. 알렉산드리아 사본에는 있으나 서방 사본군에는 없다. 같은 말씀이 인지 발현사화에도 있다(20.19.26). 39절 예수 발현을 유령이 나타난 것으로, 곧 원혼이 출현한 것으로 곡해할세라, 예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뜻에서, 루카는 인지 발현사화에서 부활하신 예수의 육체성을 강조했다. 요한의 인지 발현사화에서도 육체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부활하신 분의 육체는 이승의 속박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사도 바오로는 이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육체를 “영광스러운 몸”이라 했고 장차 부활할 신도들의 육체를 “영적 몸”이라 했다. 40절 40절 역시 파피루스 75호. 시나이. 바티칸. 알렉산드리아 사본에는 있으나 서방 사본군에는 없다. 매우 비슷한 말이 요한의 인지 발현사화에도 있다(20.20). 41절 루카는 제자들의 못난 짓을 변명하는 습성이 있다. 제자들이 게쎄마니에서는 “근심한 나머지” 잠들었다고 하더니 이제 여기서는 “기쁜 나머지” 믿지 못했다고 한다. 42절 예수께서 생선을 잡수셨다는 것도 그분이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뜻으로 그 육체성을 또 하번 강조한 것이다. 루카는 베드로가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설교할 때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한다. “우리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그분이 다시 살아나신 다음에 그분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사도 10.41; 참조: 요한 21.1-14). 43절 44-46절은 1고린 15.3-4의ㅣ 선포문을 옮기다시피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나타나셨습니다”, 루카는 앞에서도 예언과 성취 도식에 따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했거니, 앞으로 사도들의 설교를 창작할 때도 그렇게 할 것이다. 44절의 “기록된 모든 것들”은 신약성서 중 갈라 3.10 인용문을 제외하면 18.31;ㅡ 21.22; 24.44; 사도 13.29; 24.14에만 나온다. 47절 전에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으나, 이제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 끝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구원사건을 선포할 것이다. 사도들은 “모든 민족”에게, 곧 이방인들에곧 선포할 것이다. 일찍이 요한 세례자도 “죄사함을 위한 회개”를 선포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사도들도 “죄사함을 위한 회개”를 선포하겠는데 “그분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요소다. 48절 사도들은 예수사건, 특히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 될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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