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16) 회복(回復)시키시는 하느님 (창세8,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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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4-13 | 조회수487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16) 2023. 4. 13. 목 회복(回復)시키시는 하느님 (창세8,1-14) 1 그때에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집짐승을 기억하셨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땅 위에 바람을 일으키시니 물이 내려갔다. 2 심연의 샘구멍들과 하늘의 창문들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멎으니, 3 물이 땅에서 계속 빠져나가, 백오십 일이 지나자 물이 줄어들었다. 4 그리하여 일곱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 위에 내려앉았다. 5 물은 열째 달이 될 때까지 계속 줄어, 열째 달 초하룻날에는 산봉우리들이 드러났다. 6 사십 일이 지난 뒤에 노아는 자기가 만든 방주의 창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밖으로 나가 땅에 물이 마를 때까지 왔다 갔다 하였다. 8 그는 또 물이 땅에서 빠졌는지 보려고 비둘기를 내보냈다. 9 그러나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노아에게 돌아왔다. 온 땅에 아직도 물이 있었던 것이다. 노아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아 방주 안으로 들여놓았다. 10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 11 저녁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땅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12 노아는 이레를 더 기다려 그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자 비둘기는 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3 노아가 육백한 살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땅의 물이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14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다 말랐다. 오늘 본문은 홍수(洪水)심판의 물로 잠긴 세상이 어떻게 회복되느냐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판보다 회복이 어렵습니다. (창세8,1) 1 그때에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집짐승을 기억하셨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땅 위에 바람을 일으키시니 물이 내려갔다. 여기 보면 ‘하느님께서’라고 합니다. 창세기 6장과 7장에서는 하느님을 ‘야훼하느님’이라고 합니다. 야훼 하느님은 언약의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야훼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심판가운데서 너희들과 함께 하겠다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전능(全能)하심과 능력(能力)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더라도 반드시 회복(回復)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심판보다 회복보다 더 어렵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천지를 무(無)에서 유(有)로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은 그 어떤 것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심판의 물로 가득 찬 세상을 회복시켜 주십니까? (창세8,1) 1 그때에 (전능하신)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집짐승을 기억하셨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방주에 있는 노아와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짐승들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기억하다(자카르)고 하는 것은 잊어버리고 있다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기억하고 있다고 하는 “자카르”라는 말은 “마음에 새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들이 집을 나갔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집 나간 자녀는 그 어머니를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절대 그 아들을 잊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그 아들을 마음에 새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430년 동안 이집트에서 종으로 있으면서 하느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느님 이토록 오랜 시간동안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데 하느님은 왜 우리를 기억하지 않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탈출2,24-25) 24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 25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살펴보시고 그 처지를 알게 되셨다. 여기서 기억하다는 것도 자카르입니다. 이것도 하느님께서 잊고 계시다가 기억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430년 동안 한 순간도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새기고 계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께서 마음에 새기시고 기억하신 대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요셉의 생애가운데서 제일 힘든 시기는 28살부터 30살까지 모든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지 않고 잊었을 때였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믿었던 헌작 시종장도 요셉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창세40,23) 23 그렇지만 헌작(獻爵) 시종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를 잊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한순간도 요셉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요셉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2년 동안 하느님은 요셉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래서 파라오에게 꿈을 꾸게 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그 꿈을 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2년 뒤에 다시 요셉을 기억하게 하셔서 이집트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하느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시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노아의 순종을 기억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노아의 의로움을 기억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노아도 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도 실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기억하셨다”라고 하는 것은 노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은혜(恩惠)로 노아를 기억하신 것입니다. 시편 25편 6-7절에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시편25,6-7) 6 기억하소서(자카르), 주님, 먼 옛날부터 베풀어 오신 당신의 자비와 당신의 자애를. 7 제 젊은 시절의 죄악과 저의 잘못은 기억하지 마소서. 주님, 당신의 자애에 따라, 당신의 선하심을 생각하시어 저를 기억하여 주소서.(자카르) 시편 기자(記者)는 오직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따라서 나를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어떻게 하느님께서 기억해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과거의 모습이 아닙니다. 또 우리의 의로움도 아닙니다. 오직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따라서 우리를 기억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사49,15)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우리가 그 어떤 절망가운데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따라 하느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하느님은 나를 잊지 않고 마음에 기억하고 계십니다. 또 더 놀라운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여기서 기억하심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생각만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기억하심이라는 말에 대해서 구체적인 행동이 수반되는 하느님의 전인격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고 기억하심으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1절을 다시 보면 “하느님께서 땅 위에 바람을 일으키시니 물이 내려갔다.” 여기서 바람은 자연세계의 바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람이란 “루아흐”로 성령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또 이것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는 말씀은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태초(太初)에 이 세상의 물이 혼돈가운데 있었습니다. 혼돈가운데서 있는 물위에 하느님의 성령이 운행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심판의 물로 온 세상이 혼돈가운데 있을 때 하느님의 성령이 불어서 물을 마르게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혼돈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심으로 혼돈의 세상 가운데서 성령으로 함께 하셨듯이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바람을 지금도 불어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바람이 불 때 우리가운데 있는 모든 혼돈의 물을 마르게 하심을 믿는 모든 성도가 됩시다. 성령의 바람이 불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창세8,1ㄴ-2) 1ㄴ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땅 위에 바람을 일으키시니 물이 내려갔다. 2 심연의 샘구멍들과 하늘의 창문들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멎으니(사가크), 3 물이 땅에서 계속 빠져나가, 백오십 일이 지나자 물이 줄어들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멎다. 그치다.(사가크)”라는 동사가 에스텔서에는 왕의 진노가 사라지는 모습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던 단어였습니다. (에스2,1) 1 이런 일들이 있은 뒤, 크세르크세스 임금은 분노가 가라앉자(사가크), 와스티와 그의 행동과 그에게 내린 결정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성령의 바람이 불 때 하느님의 진노가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8,6-9) 6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7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8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육신의 생각은 분노(忿怒), 시기(猜忌), 질투(嫉妬)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느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느님의 진노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성령의 생각은 사랑입니다. 기쁨입니다. 평화, 인내, 자비, 양선, 온유 절제입니다. 성령의 바람만이 하느님의 모든 진노를 그치게 하고, 하느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창세8,3) 3 물이 땅에서 계속 빠져나가, 백오십 일이 지나자 물이 줄어들었다. 여기서 “빠져나가” 라는 동사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 “점점 줄어들었다”라는 말은 “계속해서 물이 있던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역사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물이 어떻게 산위에 있을 수 있습니까? 물이 어떻게 집안에 들어 올 수 있습니까? 물은 원래 있던 곳에 있어야합니다. 이렇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숨결을 지금도 느끼고 계십니까? 성령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들이 있을 자리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있을 자리는 하느님의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있을 자리는 판단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있을 자리는 모든 판단을 주님께 맡기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모든 염려와 걱정을 주님께 맡기는 자리입니다. 성령 하느님은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있을 자리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걱정과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오직 기도하는 자리로 날마다 계속해서 돌아가는 모든 성도(聖徒) 됩시다. (창세8,4-5) 4 그리하여 일곱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 위에 내려앉았다. 5 물은 열째 달이 될 때까지 계속 줄어, 열째 달 초하룻날에는 산봉우리들이 드러났다. 성경의 학자들은 이 아라랏산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합니다. 만일 배가 벼랑위에 걸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떨어져 죽을 수도 있습니다. 또 바다가운데 머물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헤엄쳐서 나오다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라랏산은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이 배는 키가 없습니다. 노도 없습니다. 또 항해계획도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이 이 배의 선장이십니다. 성령하느님께서 이 배를 운행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키를 하느님께 맡기고 인간의 모든 동력장치를 다 내려놓으며 성령하느님께서 이끄는 대로 살아갑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아도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손안에만 있으면 하느님께서 희망의 산봉우리를 우리에게도 분명히 보여 주실 것입니다. 홍수의 물이 줄어들어 산들의 봉우리가 보인 것이 노아 600년 10월 1일입니다. 그 후에 노아는 40일을 더 기다렸다가 방주에서 나갈 행동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노아가 방주에서 나갈 행동을 시작한 날은 노아 600년 11월 10일입니다. 홍수가 시작이 된 날은 노아 600년 2월 17일입니다. 그러니까 노아는 거의 9개월 동안 방주에서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방주에서 나가기 위한 일을 시작합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가기 위해서 첫 번째 한 행동이~ (창세8,6-7) 6 (산봉우리가 보인 후/600년 10월 1일) 사십 일이 지난 뒤에 노아는 자기가 만든 방주의 창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밖으로 나가 땅에 물이 마를 때까지 왔다 갔다 하였다. 먼저 노아는 까마귀를 먼저 내 보냈습니다. 그런데 까마귀는 물이 땅에 마르기까지 그냥 날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이제 비둘기를 내 놓습니다. 비둘기를 세 번 내 놓습니다. (창세8,8-12) 8 그는 또 물이 땅에서 빠졌는지 보려고 ①비둘기를 내보냈다. 9 그러나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노아에게 돌아왔다. 온 땅에 아직도 물이 있었던 것이다. 노아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아 방주 안으로 들여놓았다. 10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②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 11 저녁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땅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12 노아는 이레를 더 기다려 그 ③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자 비둘기는 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노아는 비둘기를 내놓아 땅에 물이 줄어들었는지 알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온 지면에 물이 있어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여 다시 방주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발 붙일’이라는 말은 안식(安息)한다. ‘쉼을 얻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비둘기를 방주를 떠나서는 안식할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쉼을 얻을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까마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까마귀는 썩은 동물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떠 돌아다녔습니다. 성경에서 까마귀는 부정적인 동물을 상징합니다(레위ll,l5 신명l4,l4). 그런데 비둘기는 선한 동물을 상징합니다(레위l,l4 l2,6).또 호세아서에서는 비둘기는 이스라엘백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호세7,11 11,11). 우리는 방주를 떠나서 썩은 고기를 먹는 까마귀 같은 자들이 되지 말아야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손을 떠나서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참된 안식이 없습니다. 비둘기는 방주 밖을 떠나서 안식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노아에게로 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노아라는 말뜻이 안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예수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지만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면 노아가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방주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손을 내 밀어 우리를 받아주시고 안아 주심을 믿으시는 모든 성도(聖徒)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두 번째 노아가 비둘기를 내 놓습니다. 여기서 여러분 “기다리다(훌)”라는 단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산모가 자녀를 낳기 위해서 고통가운데서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서 전혀 희망이 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고통가운데서도 기다리고 인내해야합니다. 억지라도 참고 기다려야합니다. 노아는 처음 비둘기를 내놓았을 때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노아는 억지로 참았습니다. 고통가운데서 7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또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 놓습니다. 이것이 성경(聖經)적인 인내, 기다림의 모습입니다. 먼저 그 어떤 고통과 고난이 있어도 도망가지 않는 것입니다.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모든 고난과 고통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냥 참는 것입니다. 노아가 그랬습니다. 노아는 고통가운데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적 인내는 고통가운데서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가운데서 내가 할 일을 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노아는 고통가운데서 기다리면서 또 다시 비둘기를 내 놓았습니다. (시편40,2-3) 2 주님께 바라고 바랐더니 나에게 몸을 굽히시고 내 외치는 소리를 들으시어 3 나를 멸망의 구덩이에서, 오물 진창에서 들어 올리셨네. 반석 위에 내 발을 세우시고 내 발걸음을 든든하게 하셨네. 여기서도 시편기자는 야훼하느님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냥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서 기다렸습니다. 하느님께 부르짖으며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느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이렇게 노아는 고통가운데 인내함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비둘기를 내 놓았습니다. (창세8,11-12) 11 저녁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땅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12 노아는 이레를 더 기다려 그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자 비둘기는 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비둘기가 노아에게 돌아와 그 입에 올리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왔습니다. 여기서 올리브나무 새 잎사귀는 홍수에서 떠내려가든 올리브나무에 있던 잎사귀에서 따 온 것이 아닙니다. 올리브나무 씨가 땅에 싹을 내어서 나온 새 잎사귀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노아는 땅이 물이 줄어들어 땅이 거의 말라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12절에 올리브나무 새 잎사귀를 보고 난 다음에 노아는 또 칠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다려는 10절에서 “기다림”과 단어가 다릅니다. 10절에서 기다려는 “훌”이라는 단어라도 고통가운데 기다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다림”은 “야할”로 희망가운데 기다림입니다. 또 기쁨 가운데 기다립니다. 이것도 또한 성경적인 기다림입니다. 성경적인 기다림이란 고통가운데 기다림도 필요합니다. 그 고통가운데서 내가 할 일을 하면서 기다려야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작은 희망의 올리브나무 잎을 보여주십니다. 이때 우리는 이제 희망가운데 기다려야합니다. 이제는 심판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치유되고 회복되는 희망입니다. 더 이상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느님께 충만한 복을 받게 되는 희망입니다. 이제 더 이상 미움과 다툼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가 있는 희망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도 두 가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어떨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그냥 고통가운데서도 참고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럴 때에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도해야합니다. 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작은 올리브나무 새 잎을 보여주실 때가 있습니다. “뭐 겨우 올리브나무 잎 하나야, 이것이 언제 커서 나무가 될 수 있나?” 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내게 올리브나무 잎 하나만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하느님 이 작은 올리브 잎이 큰 나무를 이루고 숲을 이루게 될 것을 믿고 희망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그 어떤 인간적인 희망이 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인간적인 아무 희망이 없다하더라도 예수그리스도 한 분으로 고통가운데서도 희망으로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8,13-14) 13 노아가 육백한 살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땅의 물이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14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다 말랐다. 노아 홍수가 시작된 것이 노아 600년 2월 17일입니다(창세7,11) 홍수시작에서 물이 걷힌 기간은 10개월 13일 정도고, 땅이 완전히 말라서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게 된 기간은 1년 11일입니다. 학자들은 음력으로 1년이 354일인데, 여기서 11일을 더하면 365일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양력으로 대략 1년 정도가 된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홍수가 시작하여 땅이 마르기까지 기간이 1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가 온 것은 40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있은 기간을 40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방주에 있는 것은 1년입니다. 1년 동안 한 가족이 방주라는 공간에서 있을 때 어떠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들과 같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먹이까지 제공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심각한 우울증에 걸리거나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그 어떤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주에서 나온 후에 노아가 실수를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에서 1년 동안 있을 수 있었던 비결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1년 동안 방주에서 오직 하늘의 열린 창을 통해서 하느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일 가축들의 소리를 들어도 피곤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또 매일 같은 사람들끼리 만나도 고단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서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40,28-31) 28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29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30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31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야훼하느님을 앙망(仰望)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에게만 향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열린 창을 통해서 하느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야훼하느님을 앙망(仰望)하는 자는 그 어떤 피곤한 가운데서도 새 힘을 얻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 시간, 정성, 힘, 지혜,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서 하느님에게로만 집중해야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피곤하지 않고 날마다 새 힘을 얻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나이가 젊어도 피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자는 절대 피곤하지 않습니다. 삶의 의욕이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환경이란 절대 우리의 삶의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하느님만을 앙망하는 자는 날마다 새롭고 행복하고 신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의 문제는 그들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렵고 힘들다는 데만 있지 않고, 그들이 온전히 하느님을 앙망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지쳐있고, 피곤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피곤한 이유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느님께만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영육 간에 피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늘의 열린 창으로 오직 하느님을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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