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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19) 덮어줌의 은혜(恩惠) (창세9,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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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4-16 조회수389 추천수1 반대(0) 신고

 

 성경(聖經)에 등장하는 노아(Noah) 및 셈(Shem) • 함(Ham) • 야벳(Japheth)의 3명의 아들들의 가계도(家系圖, genealogy)-(2부)

창세기(19) 2023. 4. 16.

 

덮어줌의 은혜(恩惠)

 

(창세9,18-29)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은 셈과 함과 야펫이다.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다. 19 이 셋이 노아의 아들인데, 이들에게서 온 땅으로 사람들이 퍼져 나갔다. 20 농부인 노아는 포도밭을 가꾸는 첫 사람이 되었다. 21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 자기 천막 안에 누워 있었다. 22 그때 가나안의 조상 함이 자기 아버지의 알몸을 보고, 밖에 있는 두 형제에게 알렸다. 23 셈과 야펫은 겉옷을 집어 둘이서 그것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알몸을 덮어 드렸다. 그들은 얼굴을 돌린 채 아버지의 알몸을 보지 않았다.

24 노아는 술에서 깨어나 작은아들이 한 일을 알고서, 25 이렇게 말하였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으리라. 그는 제 형제들의 가장 천한 종이 되리라.” 26 그는 또 말하였다. “셈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러나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어라. 27 하느님께서는 야펫에게 자리를 넓게 마련해 주시고 셈의 천막들 안에서 살게 해 주소서. 그러나 가나안은 야펫의 종이 되어라.” 28 노아는 홍수가 있은 뒤에 삼백오십 년을 살았다. 29 노아는 모두 구백오십 년을 살고 죽었다.

 

오늘 본문은 노아 홍수 이후에 노아의 세 아들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홍수 이후에 노아의 세 아들들로부터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9,18-19)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은 셈과 함과 야펫이다.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다. 19 이 셋이 노아의 아들인데, 이들에게서 온 땅으로 사람들이 퍼져 나갔다.

 

그러니까 지금의 인류는 모두 노아의 후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노아의 세 아들이 모두 하느님의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셈과 야벳의 자손들은 하느님의 복을 받는 가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의 자손들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가문이 되었습니다. 같은 노아의 후손인데, 두 가문은 복의 가문이 되고, 한 가문은 저주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덮어줌의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였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면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후에 농사를 지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나무에서 포도주를 만들어서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막에 벌거벗은 채로 있었습니다.

이 노아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가운데 유일하게 하느님의 심판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른하늘에서 심판을 준비하여 방주를 지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방주에서 하늘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노아를 당대의 의인(義人)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노아가 술에 취하여 하체를 드러내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런 노아의 실수에 대해서 함의 반응은~

 

(창세9,22) 22 가나안의 조상 함이 자기 아버지의 알몸을 보고, 밖에 있는 두 형제에게 알렸다.

 

여기서 보고라는 말은 그냥 실수로 본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보고라는 말은 자세히 관찰하여 보고라는 말입니다. 심지어 어떤 주석가는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즐겼다고 합니다. 또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알렸다고 하는데, 여기서 알렸다는 말은 단순히 알리는 정도가 아니라 해설하듯이 자세히 설명했다는 뜻입니다.

그 말을 들었던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해서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돌이켜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았습니다.

 

(창세9,23) 23 셈과 야펫은 겉옷을 집어 둘이서 그것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알몸을 덮어 드렸다. 그들은 얼굴을 돌린 채 아버지의 알몸을 보지 않았다.

 

노아는 술이 깬 후에 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실수를 드러내었던 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9,25) 25 “가나안은 저주를 받으리라. 그는 제 형제들의 가장 천한 종이 되리라.”

 

반대로 아버지의 실수를 덮었던 셈과 야벳에 대해서는 축복을 합니다.

(창세9,26-27) 26 “셈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러나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어라. 27 하느님께서는 야펫에게 자리를 넓게 마련해 주시고 셈의 천막들 안에서 살게 해 주소서. 그러나 가나안은 야펫의 종이 되어라.”

 

이 노아의 축복과 저주가 역사가운데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함의 가문을 보기 바랍니다.

 

(창세10,6-20) 6 함의 아들은 에티오피아, 이집트, , 가나안이다. 7 에티오피아의 아들은 스바, 하윌라, 삽타, 라아마, 삽트카이다. 라아마의 아들은 세바와 드단이다. 8 에티오피아는 니므롯을 낳았는데, 그가 세상의 첫 장사이다. 9 그는 주님 앞에도 알려진 용맹한 사냥꾼이었다. 그래서 니므롯처럼 주님 앞에도 알려진 용맹한 사냥꾼이라는 말이 생겼다. 10 그의 왕국은 신아르 지방의 바벨과 에렉과 아카드와 칼네에서 시작되었다. 11 그는 그 지방을 떠나 아시리아로 가서 니네베와 르호봇 이르와 켈라를 세우고, 12 니네베와 큰 성읍 켈라 사이에 레센을 세웠다. 13 이집트는 루드인, 아남인, 르합인, 납투인, 14 파트로스인, 후에 필리스티아족이 나온 카슬루인, 캅토르인을 낳았다. 15 가나안은 맏아들 시돈, 히타이트, 16 여부스족, 아모리족, 기르가스족, 17 히위족, 아르케족, 신족, 18 아르왓족, 체메르족, 하맛족을 낳았다. 그 뒤에 가나안족의 씨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19 가나안족의 경계는 시돈에서 그라르 쪽으로 가자까지 이르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츠보임 쪽으로는 레사에 이르렀다. 20 이들이 씨족과 언어와 지방과 민족에 따라 본 함의 자손들이다.

 

창세기109절에 보면 함의 자손가운데 니므롯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니므롯은 야훼하느님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야훼 앞에서란 야웨를 대항하는, 대적하는 용감한 사냥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실수를 공개하고 드러내기를 좋아했던 함의 자손가운데, 하느님을 대적하고 하느님을 대항하는 자손들이 나왔습니다.

또 함의 자손가운데서 10절에 보면 바벨론이 나오고, 11절에 보면 아시리아가 나옵니다. 14절에 보면 블레셋(카술루)이 나옵니다. 바벨론과 아시리아는 모두 하느님의 백성인 유다와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멸망시킨 나라들입니다. 또 블레셋도 하느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대적했던 족속입니다.

또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을 압제하고 억압했던 요셉을 알지 못했던 이집트왕 파라오도 함의 자손입니다(탈출1,8). 또 함의 넷째 아들의 이름이 가나안입니다. 창세기1015절에서 20절에 보면 가나안에게서 가나안의 족속들이 나옵니다(10:15-20). 1516절에 보면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이 가득 차 있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함의 아들 가나안은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 사람들의 대표가 됩니다.

이와 같이 함의 자손들은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손들이 되었습니다. 또 하느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자손들이 되었습니다. 또 죄악으로 가득 세상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당하는 자손들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셈의 가문은 어떠합니까?

하느님은 셈의 하느님이 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셈의 가문은 하느님의 백성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셈의 자손가운데서 아브라함이 나왔고, 이사악이 나왔고, 이스라엘이 나왔습니다. 또 하느님은 셈의 자손인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고, 셈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복의 통로인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같은 노아의 후손이지만, 함은 저주받는 가문이 되었고, 셈은 축복받는 가문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셈의 가문에서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나오셨습니다.

이렇게 같은 노아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축복과 저주로 갈라지게 된 원인은 덮어줌의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있습니다. 함은 덮어줌의 은혜를 모르고 아버지의 실수를 드러내고 공개했습니다. 그래서 저주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셈은 덮어줌의 은혜를 알아서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창세6,8-9) 8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9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

 

노아가 어떻게 당대의 의인이 될 수 있었습니까? 노아가 어떻게 홍수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노아의 잘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주님의 눈에 들었다.(은혜를 입었다)”. 노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노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술에 취에서 하체를 드러낸 것은 잘못이지만, 셈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우리 아버지도 별수 없구나. 역시 우리 아버지나 나나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죄인이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실수를 덮어줄 수 있었습니다.

모든 성도(聖徒)가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서로의 허물과 부족을 덮어줌으로 셈과 같은 축복받는 가정, 자손대대로 축복받는 가문들이 됩시다.

 

덮어줌에는 첫째로, 덮어줌에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구약시대 법궤는 하느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였습니다. 법궤 속에는 십계명이 있습니다. 이 십계명은 우리의 죄를 공개하고 드러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십계명을 보면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는 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십계명이 있는 그 법궤위에 무엇이 있습니까? 법궤의 뚜껑인 시은좌(施恩座)가 있습니다. 시은좌란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또 시은좌(施恩座)는 하느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입니다.

십계명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인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십계명이 있는 법궤위에 하느님께서 임재하실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법궤의 뚜껑인 시은좌위에 피가 덮여져있기 때문입니다(카파르-덮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 시은좌위에 덮여져 있는 피로 인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죄인인 우리의 죄악 된 모습으로는 도무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위에 예수님의 피가 덮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위에 덮여져 있는 그 예수님의 피를 인해서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셈은 아버지의 허물과 실수를 덮어주었습니다. 그랬을 때 하느님은 셈과 그 자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음은, 먼저 우리를 덮고 있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의 허물과 부족, 실수를 서로 덮어줄 때에 하느님께서 셈과 함께 하셨듯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만일 우리가정에서 가족들끼리 서로의 허물과 실수를 드러내고 공개하기를 즐겨한다면 하느님은 그 가정과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또 성당에서도 우리가 서로의 허물과 실수에 대해서 공개하고 드러내기를 즐겨한다면 하느님은 그 교회와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정에 서로의 허물과 부족에 대해서 서로 덮어준다면 하느님께서는 셈의 가정과 같이 우리 가정과 늘 함께 하십니다. 또한 교회에서도 서로의 허물과 부족에 대해서 서로 덮어준다면 하느님께서 영원토록 우리 창4동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는 가정과 교회가 되어 하느님께서 늘 함께 하시는 가정과 교회가 됩시다.

 

또 덮어줌에는 사랑의 은혜가 있습니다.

 

(잠언17,9) 9 잘못을 덮어 주는 이는 사랑을 키우고 그 일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구를 멀어지게 한다.

 

(1베드4,8) 8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그의 피로 덮어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허물을 공개하기를 즐겨하며, 서로의 허물을 거듭해서 말하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허다한(많은) 죄를 덮습니다. 서로의 허물과 부족을 덮어주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부끄러워 아파할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로 물든 상처를 가려주셨습니다. 덮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가 없다고 칭하여 주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가려주셨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눈썹이 없는 어떤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눈썹이 없는 것을 숨기고 결혼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눈썹 문신이라는 것도 없어서 남편 몰래 매일 눈썹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의 사업이 망해서 부부는 연탄을 배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앞에서 끌고 아내가 뒤에서 미는데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래서 연탄재가 아내의 얼굴에 묻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남편이 다가와서 아내의 얼굴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때 아내는 혹시 남편이 자신이 그린 눈썹을 닦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아내의 눈썹만 빼고 모든 것을 닦아주었습니다. 알고 보니 남편은 처음부터 아내의 눈썹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안 아내는 주루룩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남편은 아내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서로의 허물과 부족과 실수를 덮어주는데 사랑의 은혜가 있습니다.*

 

셋째로, 덮어줌에는 용서의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셈이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다고 하는데, “덮다”(갓싸)라는 단어는 죄를 덮어서 용서하다라는 의미로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시편32,1)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이 덮여진 이!

 

그래서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다는 말은 아버지의 실수를 용서했다는 말입니다. 자녀가 실수하면 부모가 그 실수를 용서해 주어야합니다. 또한 부모가 실수하면 그 자녀가 용서해 주어야합니다.

용서는 용서받는 자보다 용서하는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나 자신을 위하는 사람이면 서로의 허물을 끝까지 찾아내며 공개하는 자가 아니라 덮어주고 용서해주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서로 허물을 덮어줌으로 서로 용서해줍시다.

 

넷째로 덮어줌에는 땅을 차지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노아의 아들 함은 그냥 함이라고 하지 않고 가나안의 아버지(조상) 함이라고 합니다.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은 셈과 함과 야펫이다.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다. 22 그때 가나안의 조상 함이 자기 아버지의 알몸을 보고, 밖에 있는 두 형제에게 알렸다.

여러분 모세가 왜 함을 그냥 함이라고 하지 않고 가나안의 조상(아버지) 함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창세기는 원래 가나안땅을 들어가려는 이스라엘백성들을 위해서 쓴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땅을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창세기가 쓰여 졌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미리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9,25-26) 25 이렇게 말하였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으리라. 그는 제 형제들의 가장 천한 종이 되리라.” 26 그는 또 말하였다. “셈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러나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어라.

 

이와 같이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음은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덮어줌의 은혜를 모르는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왜 이스라엘백성들이 축복의 땅인 가나안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조상인 셈이 덮어줌의 은혜를 아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나안 땅은 축복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누가 지금도 축복의 땅인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는 자는 덮어줌의 은혜를 아는 자가 축복의 땅인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또 성경에서 가나안 땅은 천국(天國)을 상징하기고 합니다. 누가 저 영원한 가나안 땅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덮어줌의 은혜를 아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덮어줌의 상징인 법궤를 들고 나갔을 때 요르단강이 갈라졌습니다. 또 예리고성을 무너뜨릴 때도 덮어줌의 상징인 법궤를 들고 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에 인간의 힘으로는 건널 수 없는 요르단강이 열리기를 바라고 계십니까? 또 삶의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예리고성이 무너지기를 바라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덮어줌의 은혜를 알아야합니다. 덮어주는 자가 축복의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허물과 부족을 서로 덮어주며 살아갑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예비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있는 모든 성도들이 됩시다.

  

 

성경 인물 노아의 아들들 셈 함 야벳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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