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제2주일 가해, 하느님의 자비 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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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4-16 | 조회수502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부활 제2주일 가해, 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20,19-31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믿음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공, 재물, 권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풍요로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것들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면, 그 능력에 힘 입어 내가 원하는 것들을 넉넉하게 가지게 될 거라고 믿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참된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환한 빛이 주는 화려함에 이끌려 불 속으로 날아든 나방들이 결국엔 허무한 죽음을 맞는 것처럼, 성공 재물 권력에 의지하고 집착하는 마음은 결국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어갈 뿐입니다. 둘째는 과학, 기술, 숫자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편리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라가면 복잡하고 머리 아프게 고민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삶을, 즉 쉽고 편한 삶을 살게 될거라 믿는 겁니다. 하지만 높이 쌓은 바벨탑이 결코 하늘나라에 다다를 수 없듯, 쉽고 편한 그 길은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나태함과 안일함이라는 모래로 쌓은 탑은 심판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 무너져 내릴 것이고, 그 때 우리는 까마득한 멸망의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게 되겠지요. 셋째는 영원히 변치 않는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존재와 가치를 믿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믿는 겁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참된 행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에는 하느님 나라에서 그분과 살아가는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는 이 세번째 차원의 믿음을 지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않고 그가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만 들으면 마치 그가 물질적인 증거를 자기 눈으로 확인해야만 믿는 ‘의심의 아이콘’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그분을 따르던 많은 제자들이 깊은 실의와 절망에 빠져 참담한 현실에서 도망치듯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지만, 토마스는 끝까지 제자 공동체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아직 주님께 대한 믿음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살아계실 때 몇 번이나 강조해서 예고하신 것처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실 날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고대하던 주님의 발현이 하필 자기가 자리를 비웠던 그 때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하는 아쉬움이, ‘나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싶다’라는 간절함이, 하필 자기가 없을 때에 나타나신 예수님에 대한 서운함이 너무나 컸기에 ‘불신’의 의미로 들릴 수 있는 과격한 표현까지 써가며 주님의 발현사건 자체를 부정하려고 든 것이지요. ‘내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라 못믿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그 자리에 자기만 없었다는 것을 사실로 믿어버리면,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게 아닐까?’라는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질까봐, 그게 너무 싫어서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겁니다.
토마스의 그런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셨던 예수님은 오직 토마스 한 사람을 위해 다시 한번 제자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당신 몸에 남아있는 고통의 흔적들을 토마스에게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이미 부활을 통해 완전한 존재가 되셨기에 그 상처를 지니고 계실 필요가 없었지만, 그 상처를 보고 있노라면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십자가 여정이 다시 떠올라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지만, 토마스를 향한 당신의 큰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 일부러 그 상처들을 당신 몸에 남겨두셨던 것이지요. 그 상처를 토마스에게 보여주시면서 이렇게 간절히 호소하십니다. 내가 너를 너무나 사랑해서, 너를 죽음과 멸망으로부터 구하고 싶어서 이 상처들을 기꺼이 참아받고 죽음까지 받아들였는데, 왜 단 한 번의 실망으로 그런 내 사랑을 의심하느냐고, 나는 언제나 너를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있으니, 혹여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나는 늘 너와 함께 있으니, 더 이상은 내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믿어달라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는 구절을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뜻입니다. 증거가 없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고, 증거가 없어도 믿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눈에 보이는 증거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늘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주님께서 언제나 나를 사랑하신다는 분명한 확신 속에서 그분의 사랑이 주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의 진심이 토마스의 마음에 가 닿았고 그의 마음에 큰 사랑의 울림을 일으켰습니다. 나는 주님께 특별히 잘 해드린 것도 없는데, 내가 뭐 대단하고 잘난 사람도 아닌데, 그런 내가 뭐가 예쁘다고 그렇게까지 마음을 다해 사랑해주시는지…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토마스의 마음 속에 안개처럼 짙게 껴있던 두려움과 불안함이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주님 사랑의 온기가 의심과 불신으로 차갑게 얼어붙어있던 그의 마음을 녹여 부드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음 속에서 마치 울분을 토해내듯,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절절한 사랑이 담긴 진실한 신앙고백을 쏟아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믿음을 고백한 이들은 많았지만, 그분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으로 믿고 마음 안에 받아들인 건 토마스 사도가 처음입니다. 그런 점에서 토마스 사도의 불신은 참된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토마스 사도가 다다르게 된 참된 믿음의 자세는 본받되, 그가 밟은 ‘전철’은 굳이 따라 밟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증거들을 통해서, 수많은 성인들의 절절한 고백과 증언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분을 믿고 따르는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무조건 믿으라고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 하시려는게 아니라, 오늘의 우리가 처한 상황을 미리 내다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믿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 후 신앙을 지니게 된 우리 모두는 오직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 즉 “보지 않고도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믿음이 직접 목격증인이 지닌 믿음보다 결코 가볍거나 약하지 않다고 인정해주시는 한편,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들과 같은 수준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거라고 약속하시며 격려하시는 겁니다. 주님께 이토록 사랑받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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