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9 부활 제2주간 수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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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4-18 | 조회수748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2 경비병들이 감옥에 이르러 보니 사도들이 없으므로 되돌아가 보고하였다. 25 그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보고하였다. 주해 사도들이 최고의회에서 증언하다 17-42절의 긴 이야기는 새 부분으로 짜여 있다. - 17-26절: 사도들이 투옥되었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탈옥한다. 이는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탈옥한 이야기와 흡사하다. - 17-40절: 최고의회에서 사도들을 심문하고 석방한다. 최고의회에서는 사도들을 죽일 작정이었으나, 가므리엘 율사의 충고에 금지하면서 석방했다. 가믈리엘의 발언을 뺀 나머지 부분은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의회에서 증언한 이야기와 그 형식과 내용이 비슷하다. 17절 이 단락에서는 4,1-22에서처럼, 아니 그보다 더욱 분명하게 대제관을 비롯한 사두가이들이 사도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선다.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바리사이계 율사 가믈리엘은 사도들에게 언건한 입장을 취하고 백성도 호의적이다. 18절 “구치소”,“감옥”,“옥”을 구별해서 번역했다. 21절 “이스라엘 자손들의 원로단”은 최고의회 구성요원들인 “백성의 원로단”과 같다. 원로들은 고위 제관들과 율사들과 함께 최고의회를 구성했다. 최고의회 정원은 의장인 대제관을 포함해서 71명이다. 24절 여기 “대제관들”은 전직 또는 현직 대제관이 아니고 고급 제관들을 말한다. 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해 16절 인간 구원의 복음이 요약된 구절이다.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상 죽음을 거쳐 영광스럽게 되는 길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한마디로 “세상”에 대하 하느님의 사랑에서 연유된 것으로 선포된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하느님의 “진노”가 머문 인간세계를 가리킨다. 즉, 구원이 필요한 인간세계다. 바로 이 “세상”을 하느님은 사랑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이 사랑은 “외아들을 주심”으로써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이것은 하느님이 이 “세상”에 주실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다, “외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났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유일무이한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이 무한한 사랑의 행위는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 “외아들”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이 “생명”을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멸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생명”이나 “멸망”이나,“구원”이나 “심판”이나 현재적이듯이 놓여 있음도 아울러 시사된다. “생명”이 현재적이듯이 “멸망”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오로지 “외아들”을 믿음으로써 이 비구원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17절 세상에 “아들”을 파견하신 하느님의 목적은 세상 구원에 있다. 이 목적은 또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나타낸다. 하느님은 오로지 세상 구원만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18절 하느님은 심판을 원치 않으시나 믿지 않는 자에게는 이미 심판이 주어진다. 심판은 인간이 자초한 것으로 “지금 이곳에서”이루어진다. 종말론적 심판이 현재 이루어진다고 영원하는 이른바 “현실화한 종말론”에 속한다. 심판을 자초한 불신의 내용인즉,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파견된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음이다. 특히 “하느님의 이를”으로써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구원의지 및 인간 구원의 유이무이한 가능성이 강조된다. 19절 “빛”은 한 실체로서 세상에 파견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어둠”은 악의 세력이 인격화했을 뿐이다. 심판은 “빛”보다 “어둠”을 좋아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다. 예수는 심판하러 세상에 온 것이 아닌데, 심판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예수의 계시활동을 통해 심판도 사실상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빛”을 거절하고 “어둠”을 받아들이는 자들의 잘못이다.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 이유가 사람들의 “악한 행실”때문이라는 말도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한다. 따라서 심판은 항상 어디서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심판은 단죄나 처벌을 뜻하지 않는다. “빛”을 거절하고 믿지 않는, “어둠”의 지배를 받는 지속적 상태를 거리킨다. 20절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심리적 설명이다. 계시의 빛이 믿지 않는 자들의 행실을 폭로하고 그들 자신의 실체까지 들추어내기 때문에 그들은 심리적으로 그 빛을 미워하게 되고 더욱 거절한다. 따라서 믿지 않는 자는 자기 잘못이나 죄를 명백히 드러낸 셈이 된다. 21절 믿는 자들에 대한 심리적 설명이다. 여기서 “진리”는 하느님께 속한 것을 총체적으로 뜻하는 개념으로서 악마로부터 나오는 거짓이나 악과 정반대다, 따라서 “진리를 행하는 이”는 “빛”, 곧 진리를 말하는 분에게로 오게 마련이다. 그것은 자기 행실이 “하느님 안에서”, 즉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여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를 행하는 이”의 행실을 드러내 보이는 “빛” 앞에서 그 행실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 참된 것으로 보여질 뿐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빛” 안에서 새로운 근원을 얻게 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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