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제2주간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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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4-20 | 조회수484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요한 3,31-36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에 ‘장 폴 사르트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자 뛰어난 문필가였던 그는 신(神)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제창했는데, 이런 말을 자주 했지요.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나는 내가 자유롭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그는 신(神)이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귀찮은 존재라고 여겼고, 자연스럽게 그런 신은 필요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많은 젊은이들이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노년에 몸이 아파서 병원을 찾았다가 자신이 ‘폐부종’(肺浮腫)이라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선고했지요. 사르트르는 그 이후로 죽기 전까지 의사와 병원 관계자들에게 고래고래 욕을 하고, 손에 잡히는대로 물건을 내던지는 등 온갖 행패를 다 부렸고,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신(神)의 존재까지 부정해가며 자유를 부르짖던 ‘대철학자’였기에 죽음 앞에서도 담담하고 품위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더 크게 느끼고, 마음의 평화를 잃은 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니 그가 평생동안 간직해온 철학도 다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토록 기세 등등했던, 자신에게는 하느님마저 필요없다고 할 정도로 자신만만했던 사르트르는 왜 죽음 앞에서 그토록 괴로워하며 무기력해졌을까요?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해버린 그에게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자 파멸이었기에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 속했던, 즉 인간의 이성과 논리라는 사고 안에 갇혀있었던 사르트르에게는 물질적인 세계가 자신이 사는 세상의 ‘전부’였습니다. ‘물질’과 ‘현상’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기에, 그에게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았고 필요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아예 없다고 여겼지요. 그렇게 하느님을 멀리 밀어냄으로써 자신이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습니다. 하느님과 그분이 다스리시는 저 넓은 세상을 부정하고 등을 돌림으로써 스스로를 새장 속의 새처럼 좁디 좁은 세상 안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그의 말년은 그렇게 비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참된 행복에 대한 희망으로 기뻐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하느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그분의 존재를 부정하는 죄를 저지름으로써 두려움과 절망의 나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사르트르처럼 이 세상의 삶에만 얽매인 나머지 하느님의 존재를 잊고 살지는 않습니까? 물질적인 것들에만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고 집착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돌아갈 고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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