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24) 올라가는 신앙(信仰) (창세13,1-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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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4-21 | 조회수379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24) 2023. 4. 21. 금 올라가는 신앙(信仰) (창세13,1-18) 1 아브람은 아내와 자기의 모든 소유를 거두어 롯과 함께 이집트를 떠나 네겝으로 올라갔다. 2 아브람은 가축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였다. 3 그는 네겝을 떠나 차츰차츰 베텔까지, 곧 그가 처음에 베텔과 아이 사이에 천막을 쳤던 곳까지 옮겨 갔다. 4 그곳은 그가 애초에 제단을 만들었던 곳이다. 거기에서 아브람은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5 아브람과 함께 다니는 롯도 양과 소와 천막들을 가지고 있었다. 6 그래서 그 땅은 그들이 함께 살기에는 너무 좁았다. 그들의 재산이 너무 많아 함께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7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과 프리즈족이 살고 있었다. 8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내 목자들과 너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9 온 땅이 네 앞에 펼쳐져 있지 않느냐? 내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10 롯이 눈을 들어 요르단의 온 들판을 바라보니, 초아르에 이르기까지 어디나 물이 넉넉하여 마치 주님의 동산과 같고 이집트 땅과 같았다. 그때는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11 롯은 요르단의 온 들판을 제 몫으로 선택하고 동쪽으로 옮겨 갔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고, 롯은 요르단 들판의 여러 성읍에서 살았다. 롯은 소돔까지 가서 천막을 쳤는데, 13 소돔 사람들은 악인들이었고, 주님께 큰 죄인들이었다. 14 롯이 아브람에게서 갈라져 나간 다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을, 또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아라. 15 네가 보는 땅을 모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16 내가 너의 후손을 땅의 먼지처럼 많게 할 것이니,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자라야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 17 자, 일어나서 이 땅을 세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고 가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여라.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겠다.” 18 아브람은 천막을 거두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으로 가서 자리 잡고 살았다. 그는 거기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먼저 1절입니다. (창세13,1) 1 아브람은 아내와 자기의 모든 소유를 거두어 롯과 함께 이집트를 떠나 네겝으로 올라갔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가나안땅 남쪽에 있는 네겝으로 올라갑니다. 앞에서 아브람은 가나안 땅 네겝에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이 애굽 땅 보다 더 놓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아브라함의 신앙도 내려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파라오의 손에서 아브라함을 구출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가나안 땅 네겝으로 가는 것은 지리적으로 올라가는 것도 있지만 아브라함의 신앙이 다시 올라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이란 올라갈 때가 있고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신앙이 올라갈 때만 아니라 내려갈 때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더욱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이 내려갈 때 그냥 지켜만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내려갈 때 함께 내려가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신앙의 밑바닥에서 다시 끌어올려주십니다. 우리가 코로나로 인해서 신앙이 내려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이제 다시 올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내려가는 신앙이 아니라 올라가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까? 첫째는 우리의 신앙이 올라가는 신앙이 되기 위해서 하느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해야합니다. (창세13,2) 2 아브람은 가축과 은과 금이 많은(카베드) 큰 부자였다.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더 많은 가축과 은, 금(銀 金)을 가지고 온 것이 진정한 축복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 재물들은 아브라함이 사라이를 누이로 속여서 얻은 재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다라는 단순히 많다는 것도 있지만 무겁고 부담스럽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열왕12,11)11 내 아버지께서 그대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우셨는데, 나는 그대들의 멍에를 더 무겁게 하겠소.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카베드) 멍에를 메게 하였으니” 할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아브라함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매우 많아 무겁고 부담스러웠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가져온 은과 금과 가축을 볼 때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죄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가 단순히 살기 위해서만 아니라 아내 덕에 더 잘살아보려고 거짓말했던 죄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하느님을 믿지 않던 파라오에게 책망을 들었던 일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애굽에서 얻는 가축과 은과 금은 그에게 무겁고 부담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창세13,3-4) 3 그는 네겝을 떠나 차츰차츰 베텔까지, 곧 그가 처음에 베텔과 아이 사이에 천막을 쳤던 곳까지 옮겨 갔다. 4 그곳은 그가 애초에 제단을 만들었던 곳이다. 거기에서 아브람은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창세12,8) 8 그는 그곳을 떠나 베텔 동쪽의 산악 지방으로 가서, 서쪽으로는 베텔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쳤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아브라함이 처음 가나안땅에 갔을 때 베텔과 아이 사이 산으로 옮겨서 천막을 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에 갔을 때 평지에 천막을 칠 곳이 없어서 베텔과 아이 사이 산에서 천막을 칩니다. 그곳에서 야훼께 제단을 쌓고 야훼 이름을 부릅니다. “하느님 가나안에 왔어도 나를 도와주실 분은 야훼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야훼 하느님이시여 나를 도와주소서!” 라고 하면서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 다시 가나안땅으로 돌아와서 그가 왜 베텔과 아이 사이 처음 천막을 치고, 처음 제단을 쌓은 곳에 찾아갑니다. 그가 다시 거기서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철저히 회개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 이곳에서 야훼 하느님만이 나의 도움이 되신다는 의미에서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이곳으로 찾아와서 하느님이여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의미에서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보다 하느님이 주시는 복을 더 사랑했던 죄를 회개했습니다. (창세12,10)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 그래서 아브람은 나그네살이하려고 이집트로 내려갔다. 그 땅에 든 기근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도 문제이지만 애굽으로 내려가는 목적도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은 기근 때문에 잠시 애굽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기근 때문에 애굽에 거류(居留)하려고 갔다는 것은 잠시 거주하려고 간 것이 아니라 이주민으로 영구히 정착하려고 간 것을 말합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애굽으로 이민을 간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단순히 이 땅의 복만 받고 잘 사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땅에 가서 기근이 드니까 당장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것도 영구히 정착하여 살기 위해서 애굽으로 갑니다. 그리고 아내를 누이로 속여서라도 그곳에서 육신적으로 잘 사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무엇 때문에 믿었습니까? 우리 집안도 계속해서 딸을 일곱을 낳으니까 아들을 낳기 위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우리가운데 어떤 분들은 육신의 질병 때문에 예수를 믿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도 모두 이 땅에서 육신적으로 복을 받고 잘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하느님은 절대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에는 육신의 질병을 먼저 고쳐주십니다.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먼저 육신의 먹을 것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그 어떤 사람도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나는 육신(肉身)의 복은 필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한분만으로 만족합니다. 저는 육신의 복은 필요 없고 영적인 복만 있으면 됩니다. 저는 저 영원한 천국만을 바라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는 분들은 한분도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육신의 복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 절대 책망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복 때문에 예수를 믿어도 하느님은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이 인생에 극심한 기근이 닥쳤을 때 깨어집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실 때입니다(오 주여 그렇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보다 육신의 복을 먼저 따라갔던 신앙을 회개해야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다시 베텔과 아이 사이에서 야훼 하느님께 제단을 쌓고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육신의 복만 따라갔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내가 하느님보다 하느님이 주시는 복을 더 사랑했던 죄를 먼저 회개해야합니다. 아브라함과 동시대 인물로서 욥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욥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질문은 하느님을 사랑하느냐 아니면 하느님이 주신 복을 더 사랑하느냐 입니다. 욥처럼 하느님이 주신 그 무엇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의 신앙이 아브라함처럼 올라가는 신앙이 되기 위해서 과거에서 완전히 떠나야합니다. 아브라함은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입으로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그의 삶으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13,5-6) 5 아브람과 함께 다니는 롯도 양과 소와 천막들을 가지고 있었다. 6 그래서 그 땅은 그들이 함께 살기에는 너무 좁았다. 그들의 재산이 너무 많아 함께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브라함과 롯은 목축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양과 소가 자라면서 번성하는데, 그들에게 목초지가 한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툼이 일어납니다. (창세13,7) 7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과 프리즈족이 살고 있었다. 야훼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데, 믿지 않는 가나안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창세13,8-9) 8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내 목자들과 너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9 온 땅이 네 앞에 펼쳐져 있지 않느냐? 내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네가 좌(左)하면 나는 우(右)하고 네가 우하면 좌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방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좋은 땅을 선택하는데, 우선권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세기12장과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바뀌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면 그 동안 살아왔던 경험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평생 육신의 복만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하느님께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육신의 복만 추구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75년 동안 살아왔던 방식을 완전히 바꿉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悔改)입니다. 그래서 롯에게 가나안땅에서 더 좋은 땅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창세13,10) 10 롯이 눈을 들어 요르단의 온 들판을 바라보니, 초아르에 이르기까지 어디나 물이 넉넉하여 마치 주님의 동산과 같고 이집트 땅과 같았다. 그때는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롯은 아브라함의 말을 듣자 눈을 들어 요르단 지역을 봅니다. 요르단지역의 초아르 지역은 낮은 지역이라 물이 넉넉합니다. 이 초아르 지역이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지역입니다. 그래서 가축을 키우기가 너무 좋습니다. 여기서 롯이 단순히 가축을 키우기 좋은 곳으로 소돔 땅을 선택한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돔지역에 대해서 13절에 보면~ (창세13,13) 13 소돔 사람들은 악인들이었고, 주님께 큰 죄인들이었다. 그러니까 롯은 아무리 죄악 된 도시라도 무조건 육신적으로 잘 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아브라함이 아내를 속여서라도 잘 되기를 바랐던 것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창세13,11) 11 롯은 요르단의 온 들판을 제 몫으로 선택하고 동쪽으로 옮겨 갔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제 롯이 소돔 땅이 있는 요르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쪽으로 옮깁니다. 성경에서 동쪽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지역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에덴의 동쪽으로 갑니다. (창세4,14) 16 카인은 주님 앞에서 물러 나와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살았다. 고 합니다. 출애굽기에 성전의 문이 동쪽에 있습니다. 지성소는 서쪽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동쪽이란 하느님과 교제하는 장소에서 멀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롯이 소돔 땅을 선택하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창세13,12-14)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고, 롯은 요르단 들판의 여러 성읍에서 살았다. 롯은 소돔까지 가서 천막을 쳤는데, 13 소돔 사람들은 악인들이었고, 주님께 큰 죄인들이었다. 14 롯이 아브람에게서 갈라져 나간 다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을, 또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아라. 여기서 롯이 아브라함을 떠났다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롯을 떠나보낸 것입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롯을 떠나보낸 후에 나타나셔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십니까? 롯은 아브라함의 과거입니다. 롯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느님보다 육신의 복을 더 사랑하였던 아브라함의 과거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롯을 떠나보낸 것은 아브라함의 과거를 떠나보낸 것입니다. 하느님보다 육신의 복을 더 사랑하였던 아브라함의 과거를 떠나보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하신다. 그래서 눈에 보는 대로 이 땅을 주겠다. 네가 밟는 대로 이 땅을 다 주겠다”는 말씀만 봅니다. 그래서 올 한해 우리도 더 큰 꿈을 가지자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가 꿈꾸는 대로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과거인 롯을 떠나보낸 후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이제 우리의 신앙이 내려가는 신앙이 아니라 올라가는 신앙이기를 바라십니까? 내가 인간적으로 만드는 미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미래를 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과거에서 완전히 떠나기 바랍니다. 하느님보다 육신의 복을 더 사랑했던 과거에서 완전히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사43,18) 18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과거에 메인다는 것은 내 인생에 오직 나 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 자신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과거만 생각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손주들을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내가 사랑하는 다음세대를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과거에서 떠나야합니다. (창세13,15-16) 15 네가 보는 땅을 모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16 내가 너의 후손을 땅의 먼지처럼 많게 할 것이니,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자라야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과거인 롯을 떠나보낸 후에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땅은 그의 자손들이 차지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과거를 떠나보냈기 때문입니다. 정말 나보다 나의 자녀들이 잘 되기를 원하신다면 이제 과거에서 떠납시다. 사도바오로가 말하는 것처럼 내가 과거에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목표를 향하여 앞으로 향해서 달려가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나와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더 아름답게 열어주실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신앙이 더 올라가는 신앙이 되기 위해서 하느님과 더 뜨거운 교제를 나누어야합니다. 아브라함의 과거인 롯을 떠나보낸 후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어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창세13,17) 17 자, 일어나서 이 땅을 세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고 가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여라.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겠다.” 그렇다면 내가 걸어가는 모든 땅을 다 네게 주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모두 차지하기 위해서 열심히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창세13,18) 18 아브람은 천막을 거두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으로 가서 자리 잡고 살았다. 그는 거기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여기서 헤브론은 하느님과 교제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마므레는 뜨겁다 열렬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네가 다니는 모든 땅을 다 주겠다는 말씀을 듣고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땅 밟기를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거주하여 하느님과 뜨거운 교제를 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꿈은 그 사람의 지갑에 돈이 가득한 꿈이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당장 주식부터 사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부동산부터 알아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시세와는 반대로 교회가까이로 이사를 갑니다. 그리고 매일 새벽재단을 쌓습니다. 모든 예배를 열심히 참석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일상의 모든 삶 가운데서 하느님과 동행하며 교제하는 삶을 삽니다. 바로 지금 아브라함이 이와 같은 경우입니다. 그러면 내가 밟는 모든 땅을 네게 주겠다는 말씀을 듣고 왜 아브라함이 땅 밟기를 하지 않고 제단을 쌓습니까? 왜 하느님과 뜨거운 교제를 합니까? 그 이유는 아브라함은 진짜 무엇이 복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그 무엇이 진정한 복이 아니라 하느님이 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사과나무가 있습니다. 그 사과나무에 많은 열매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열매를 하나씩 따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무를 붙잡습니다. 그러면 나무와 함께 그 모든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가장 많이 복을 받은 사람이 다윗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다윗은 왕이 되는 큰 꿈을 꾸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많은 재물을 얻는 꿈을 꾸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윗은 위대한 나라를 세우겠다는 꿈을 꾸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시편131,1-2) 1 주님, 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고 제 눈은 높지 않습니다. 저는 거창한 것을 따라나서지도 주제넘게 놀라운 것을 찾아 나서지도 않습니다. 2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가다듬고 가라앉혔습니다.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 같습니다. 저에게 제 영혼은 젖 뗀 아기 같습니다. 다윗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을 구했습니다.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합니다. 하느님과 가까이 함이 복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이 복입니다. 하느님과 뜨겁게 교제하는 것이 복입니다. 이 한해 동안 하느님과 더 뜨겁게 교제함으로 진정한 복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더 올라갈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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