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25) 전쟁(戰爭) 같은 세상에서 승리(勝利)하는 비결 (창세14,1-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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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4-21 | 조회수539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25) 2023. 4. 22. 토 전쟁(戰爭) 같은 세상에서 승리(勝利)하는 비결 (창세14,1-24) 1 신아르 임금 아므라펠과 엘라사르 임금 아르욕과 엘람 임금 크도를라오메르와 고임 임금 티드알의 시대였다. 2 그들은 소돔 임금 베라, 고모라 임금 비르사, 아드마 임금 신압, 츠보임 임금 세므에베르, 벨라 곧 초아르 임금과 전쟁을 벌였다. 3 이들 다섯 임금은 모두 동맹을 맺고 시띰 골짜기 곧 ‘소금 바다’로 모여들었다. 4 이들은 십이 년 동안 크도를라오메르를 섬기다가, 십삼 년째 되는 해에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5 십사 년째 되는 해에는 크도를라오메르가 자기와 연합한 임금들과 함께 진군해 가서, 아스타롯 카르나임에서 라파족을 치고, 함에서는 주즈족을, 사웨 키르야타임에서는 엠족을, 6 그리고 세이르 산악 지방에서는 호르족을 쳐서 광야 언저리에 있는 엘 파란까지 이르렀다. 7 그들은 발길을 돌려 엔 미스팟 곧 카데스로 진군해 가서, 아말렉족의 온 땅과 하차촌 타마르에 사는 아모리족까지 쳤다. 8 그러자 소돔 임금, 고모라 임금, 아드마 임금, 츠보임 임금, 벨라 곧 초아르 임금이 마주 나와, 시띰 골짜기에서 그들에 맞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9 엘람 임금 크도를라오메르, 고임 임금 티드알, 신아르 임금 아므라펠, 엘라사르 임금 아르욕, 이 네 임금이 다섯 임금과 맞섰다. 10 그런데 그 골짜기에는 역청 수렁이 많아, 소돔 임금과 고모라 임금이 달아나다 거기에 빠지고 나머지는 산으로 달아났다. 11 그러자 적군들이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모든 재물과 양식을 가지고 가 버렸다. 12 그들은 또한 소돔에 살고 있던 아브람의 조카 롯을 잡아가고 그의 재물도 가지고 가 버렸다. 13 그곳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 하나가 히브리인 아브람에게 와서 이 일을 알렸다. 아브람은 그때 아모리족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 머물고 있었다. 마므레는 에스콜과 형제간이었고 아네르와도 형제간이었는데,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을 맺은 사람들이었다. 14 아브람은 자기 조카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집에서 태어나서 훈련받은 장정 삼백십팔 명을 불러 모아 단까지 쫓아갔다. 15 아브람과 그의 종들은 여러 패로 나뉘어 밤에 그들을 치고, 다마스쿠스 북쪽에 있는 호바까지 쫓아갔다. 16 그는 모든 재물을 도로 가져오고, 그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함께 부녀자들과 다른 사람들도 도로 데려왔다. 17 아브람이 크도를라오메르와 그와 연합한 임금들을 치고 돌아오자, 소돔 임금이 사웨 골짜기 곧 임금 골짜기로 그를 마중 나왔다. 18 살렘 임금 멜키체덱도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 19 그는 아브람에게 축복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아브람은 복을 받으리라. 20 적들을 그대 손에 넘겨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21 소돔 임금이 아브람에게 “사람들은 나에게 돌려주고 재물은 그대가 가지시오.” 하고 말하자, 22 아브람이 소돔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신 주님께 내 손을 들어 맹세하오. 23 실오라기 하나라도 신발 끈 하나라도 그대의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소. 그러니 그대는 ‘내가 아브람을 부자로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오. 24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소. 다만 젊은이들이 먹은 것을 빼고, 나와 함께 갔던 사람들 곧 아네르와 에스콜과 마므레만은 저희의 몫을 가지게 해 주시오.” 창세기14장은 아브라함이 롯을 떠나보낸 후, 롯이 있는 이 세상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분문에 나타난 이 세상나라는 매일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 같은 삶인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서로 죽이는 전쟁과 같은 삶을 사는 이유는 서로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서로 주인 노릇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치열한 전쟁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먼저 롯이 간 이 세상나라는 끊임없는 전쟁이 있는 나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14,1-2) 1 신아르 임금 아므라펠과 엘라사르 임금 아르욕과 엘람 임금 크도를라오메르와 고임 임금 티드알의 시대였다. 2 그들은 소돔 임금 베라, 고모라 임금 비르사, 아드마 임금 신압, 츠보임 임금 세므에베르, 벨라 곧 초아르 임금과 전쟁을 벌였다. 1절에 북쪽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4왕과 2절에 남쪽 가나안에 있는 5왕이 싸웁니다. 남쪽에 있는 5왕이 북쪽에 있는 4왕과 싸우기 위해서 3절에 모두 동맹을 맺고 시띰 골짜기 곧 ‘소금 바다’로 모여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최초의 중동 전쟁이었습니다. 이들이 싸우는 이유가 4절에 있습니다. (창세14,4) 4 이들은 십이 년 동안 크도를라오메르를 섬기다가, 십삼 년째 되는 해에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남쪽에 있는 5왕이 북쪽에 있는 그돌라오멜 왕을 12년 동안 섬기다가 13년째 배반을 합니다. 그러니까 북쪽에 있는 그돌라오멜 왕이 자신과 함께 있던 3왕들과 함께 그동안 조금씩 반란의 기미가 보였던 부족들을 먼저 칩니다. 이것이 5절에서 7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남쪽에 반란을 일으킨 4왕을 치기 위해서 준비를 합니다. 8절에 남쪽에 있는 5왕들이 시띰 골짜기 즉 소금바다에서 북쪽에 있는 그돌라오멜을 중심으로 한 4왕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진을 칩니다. 그래서 9절에 보면 북쪽에 있는 4왕이 남쪽에 있는 5왕과 맞서 싸웁니다. (창세14,10) 10 그런데 그 골짜기에는 역청 수렁이 많아, 소돔 임금과 고모라 임금이 달아나다 거기에 빠지고 나머지는 산으로 달아났다. 시띰 골짜기 즉 사해 지역은 남쪽 왕들이 있는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남쪽 왕들은 이 지역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청 구덩이가 많은 지역에서는 남쪽 왕들이 유리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남쪽 왕들이 북쪽 왕들과 싸우다가 쫓겨나서 역청 구덩이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산을 도망갑니다. 그래서 북쪽에 그돌라오멜 왕을 중심으로 한 4왕이 승리합니다. (창세14,11-12) 11 그러자 적군들이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모든 재물과 양식을 가지고 가 버렸다. 12 그들은 또한 소돔에 살고 있던 아브람의 조카 롯을 잡아가고 그의 재물도 가지고 가 버렸다. 왜 당시에 전쟁이 일어났습니까? 표면적으로 보면 그 이유는 서로 주인노릇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더 힘이 있는 자가 힘이 없는 자의 것을 빼앗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당시에 세상에서의 전쟁이 일어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게 있었음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롯은 하느님보다 이 세상의 풍요로움을 선택했습니다. 롯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더라도 이 세상에서 더 많은 재물을 가지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죄악의 도시라도 소돔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고, 가졌던 재물도 다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물질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오늘 본문에 보면 물질적으로도 점점 더 풍성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가 하느님이 아니라 이 세상이 되면 우리가 이 땅에서 롯과 같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이 세상의 노예가 될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롯은 세상속의 삶에서 실패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쟁과 같은 이 세상 속에서의 삶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첫째, 우리 마음의 중심에 하느님과 교제하는 자리를 잃지 말아야합니다. (창세14,13) 13 그곳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 하나가 히브리인 아브람에게 와서 이 일을 알렸다. 아브람은 그때 아모리족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 머물고 있었다. 전쟁에서 도망한 자가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전쟁의 상황을 알려줍니다.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사로잡혀 간 이야기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아브라함이 아모리 족 헤브론의 마므레 참나무 숲 근처에 거주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13,18) 18 아브람은 천막을 거두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으로 가서 자리 잡고 살았다. 그는 거기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보는 땅을 다녀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땅 밟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참나무 숲에 거주하면서 야훼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서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가 있는 때도 아브라함은 여전히 헤브론 마므레의 참나무 숲 근처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롯이 전쟁을 겪는 중에 아브라함이 헤브론 마므레의 상수리 숲에 거주하면서 하느님과 뜨거운 교제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한 첫 번째 비결입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무와 같은 사람이고, 또 하나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은 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감정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또 사람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세상에서 이런 사람들이 잘 사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의 바람을 따라서 갈필요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복 있는 사람은 이렇게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상황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나무와 같은 사람입니다. 나무는 바람이 불면 흔들리기는 합니다. 그러나 절대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뿌리를 땅에 깊이 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와 같은 사람도 가뭄을 격기도 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나무가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산속에 있는 나무를 보셨습니까? 왜 그 산속의 나무가 온갖 비바람을 맞고도 굳건히 서 있는 줄 아십니까? 나무는 아프면 아플수록 더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 아픔이 있다면 그 아픔에 반응하지 말고, 아프면 아플수록 하느님께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비바람이 불면 불수록 생수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더 깊이 뿌리를 박읍시다. 그래서 세상의 문제를 따라서 이러 저리 날아가는 겨가 되지 말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그 어떤 바람이 불어도 하느님께 더 깊이 뿌리를 내리기를 바랍니다. 고민할 시간보다 밤낮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고, 잠이 오지 않으면 밤새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할 수 있으면 하루 종일 성경을 읽든지, 하루 종일 성경말씀을 필사도 해보세요. 그래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아브라함처럼 우리 마음에 하느님과 교제하는 자리를 잃어버리지 맙시다. 그래서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이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지 말고 바람이 불면 불수록 하느님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 번째 전쟁 같은 이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훈련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이 일어나는 가운데서 단순히 헤브론에서 하느님과 교제만 아니라 마르레 수풀 근처에 사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동맹을 맺고 살았습니다. (창세14,14) 14 아브람은 자기 조카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집에서 태어나서 훈련받은 장정 삼백십팔 명을 불러 모아 단까지 쫓아갔다. 여기서 보면 아브라함은 집에서 태어나서 훈련한 자가 318명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교제만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집에서 사람을 길렀습니다. 그리고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싸움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카가 사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훈련한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갑니다. (창세14,15-16) 15 아브람과 그의 종들은 여러 패로 나뉘어 밤에 그들을 치고, 다마스쿠스 북쪽에 있는 호바까지 쫓아갔다. 16 그는 모든 재물을 도로 가져오고, 그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함께 부녀자들과 다른 사람들도 도로 데려왔다. 우리가운데 “나는 하느님만 좋아, 더 이상 세상의 문제에 휘말리지 않을 거야”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신앙의 한쪽면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변모산위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변모 산에서 제자들은 영광스러우신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하면서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아 더 이상 이 세상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은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오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마음에 하느님과 교제하는 자리를 잃어버리지 말아야합니다. 그런데 그것만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교제하면서 집에서 318명의 사람을 기르고 훈련시킨 것처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대적할 이 세상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상대한 북쪽에 크도를라오메르 왕을 중심으로한 4왕들을 보기 바랍니다. 그들은 북쪽에 있는 모든 부족들을 무찌르고, 남쪽에 있는 5왕들을 무찌르고 이길 정도로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판관기에 보면 기드온의 300용사가 싸워야할 미디안의 연합군은 13만 5천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기도(祈禱)와 말씀의 훈련입니다. 변모산 위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하던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오니까 귀신들린 아이를 둔 아버지와 제자들 사이에 큰 논쟁이 일어납니다. 왜 이 아이에게 붙은 귀신이 물러가지 않느냐는 논쟁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귀신을 물리치고 난 다음에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마르9,29) 초대교회는 깊은 절망과 무능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오직 유일한 희망은 성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오로지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일에만 힘을 썼습니다. 오직 성령이 아니면 우리가 희망이 없다는 절박함입니다. 오직 기도가 아니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앞에는 아브라함에 싸워야했던 크도를라오메르 왕과 같은 이 세상이 있습니다. 기드온이 싸워야할 미디안의 13만 5천명과 같은 이 세상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밖에 없습니다. 오로지 기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318명의 기도의 용사들입니다. 그리고 오직 말씀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 전쟁 같은 이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이 세상 속에서의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해야합니다. (창세14,17-18) 17 아브람이 크도를라오메르와 그와 연합한 임금들을 치고 돌아오자, 소돔 임금이 사웨 골짜기 곧 임금 골짜기로 그를 마중 나왔다. 18 살렘 임금 멜키체덱도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 아브라함이 크도를라오메르와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이기고 돌아왔을 때 그 앞에 소돔 왕과 멜기세덱 왕이 맞이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자신의 힘으로 북방 왕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돌아온 모든 전리품들은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모든 왕들에게 환영을 받고 높임을 받을 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덱 왕이 어떻게 말합니까? (창세14,19-20) 19 그는 아브람에게 축복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아브람은 복을 받으리라. 20 적들을 그대 손에 넘겨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여기서 보면 하느님을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이 단순히 아브라함만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도 모든 주권을 가지신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왕들이 서로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높다고 하지만 이 세상에서 하느님이 제일 높으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멜기세덱은 그 하느님께서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하늘과 땅 즉 이 모든 세상의 주권을 가지신 하느님께서 이 싸움의 배후에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싸움의 배후에서 그를 대신하여 싸워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대적을 물리치셔서 아브라함의 손에 주셨습니다. 그래서 네가 가지고 온 모든 전리품들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다. 그래서 네가 찬양받고 높아질 것이 아니라 너를 대신하여 싸워서 이기게 하신 하느님을 높이고 찬양하라는 말씀입니다. (창세14,20) 20 적들을 그대 손에 넘겨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여기서 성경에서 처음으로 십일조가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십일조는 절대 율법이 아닙니다. 또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고 하지 않으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여기서 십일조는 아브라함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느님 저는 하느님이 단순히 저의 하느님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하늘과 땅 이 모든 세상의 주권을 가지신 분임을 믿습니다. 하느님 저는 내가 열심히 싸움을 잘해서 이 싸움에서 승리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하느님이 나를 대신하여 싸워주셔서 이 싸움에서 이기게 하신 것을 믿고 감사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내가 가진 이 모든 전리품들은 어느 하나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 예물을 통하여 하느님 영광을 받아주시옵소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는 신앙고백으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십분의 일은 단순히 열 개 중에 한 개가 아닙니다. 십분의 일은 십 분의 구를 대신하고 대표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십분의 일은 아브라함에게 있는 모든 것을 드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십분의 일에서 일은 성경에서 가장 귀한 것, 최고의 것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 최고의 것을 멜기세덱에게 드린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이 멜기세덱이 구약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이 모든 것을 드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18절에서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온 하느님의 제사장이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떡과 포도주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시는 살과 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이 환영을 하면서 떡과 포도주를 준 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우리를 위하여 살과 피를 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은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멜기세덱에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가장 귀한 살과 피를 주신 예수님에게 나의 가장 귀한 것, 나의 전부를 드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십일조는 세상에서의 하느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 세상에서의 하느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이 세상을 살아갈 때도 온전히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살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멜기세덱만 나온 것이 아닙니다. 소돔왕도 나옵니다. (창세14,21) 21 소돔 임금이 아브람에게 “사람들은 나에게 돌려주고 재물은 그대가 가지시오.” 하고 말하자,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네가 가진 모든 것은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왕인 내가 주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세상왕인 내가 주는 이 모든 물품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창세14,22-23) 22 아브람이 소돔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신 주님께 내 손을 들어 맹세하오. 23 실오라기 하나라도 신발 끈 하나라도 그대의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소. 그러니 그대는 ‘내가 아브람을 부자로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세상 왕이 주는 것이라면 실 한 오라기도 받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세상 왕이 나를 부요하게 했다는 말을 듣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제 이 세상 속에서의 모든 삶의 주권이 오직 하느님에게만 있음을 인정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부요하게하고 존귀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 한분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의 모든 삶의 주권이 하느님에게 있음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단순히 우리들의 기도의 자리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자녀를 결혼시키는 문제, 내가 이 땅에서 먹고 사는 모든 문제, 또 나의 노후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그 모든 문제의 주권이 하느님에게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삶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시고, 주인이 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이 주인 되심을 온전히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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