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3 부활 제3주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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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4-22 | 조회수565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25 그래서 다윗이 그분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29 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32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주해 23절 23-24.32에서는 사도들이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관해 증언한다. 예수의 삶 가운데 하느님이 예수를 거쳐 이스라엘에 행하신 기적들을 든다. 그러나 사도들의 이 증언에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 전체가 함축적으로 들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10,37-39 참조) 예수께서는 “하느님이 미리 정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곧 하느님의 구원경륜에 따라 돌아가셨다. 그러나 동시에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유다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과 유다인들의 사악한 행위까지도 하느님으로부터 예정된 것인가? 이런 예정설은 루카를 비롯한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사고방식이나 신학적 관점이 아니라 훨씬 후대의 사변적 신학에서 나온 것이다. 성서 저자들은 단지 인간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하느님이 처움부터 주도권을 쥐고 구원의 실현과정을 당신 뜻에 따라 이루신다는 사실을 강조할 따름이다. 이 계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있었음도 아울러 지적한다. 25절 25-28절은 시편 (LXX) 15,8-11ㄴ을 인용한 것이다. 루카는 이 시편 구절을 예수 부활을 예고로 풀이한다. 그는 인용문의 단수 일인칭 “나”를 예수와 동일시한다. 29절 대략 10세기 말엽부터 순례자들이 시온 산 위에 있는 이른바 최후만찬 방 아래 다윗의 무덤이 있다고 하여 참배하곤 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다윗은 다웃 도시에 묻혔다. 다윗 도시 남쪽에 큰 인조동굴이 있는데, 다윗을 비록하여 왕족들이 묻힌 동굴들이라는 것이 고고학계의 정설이다. 30절 루카는 시편저자를 예언자로 확신한다. 루카는 현재 대목에서 시편저자 다윗이 자기 자손 가운데 태어난 메시아가 부활할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자손”의 직역은 “허리의 열매”다. 33절 “그분은 하느님의 오른편으로 높이 올려져” 대신 “그분은 하느님의 오른손으로 높이 올려져”(프랑스 공동번역)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 주석가 절대 다수는 우리 역문처럼 번역한다. 루카는 예수의 승천을 가리켜 그런 표현을 썼다. 루카는 예수 부활과 승천을 구분한 까닭이다. 그러나 루카말고 신약의 다른 이들은,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게 되셨다. 또는 높이 올려지셨다고 한다, 즉, 예수 부활은 성부 우편 좌정 또는 고양과 같은 사건이라는 것이다. “높이 올려짐”과 “성령의 약속”의 연결은 루카가 전승에서 빌려온 것이다. 부활하여 아버지의 배려로 고양되신 예수께서는 지상에 남아있는 제자들을 위해 성령을 쏟아 부으신다. 아버지로부터 성령의 약속을 받으신 그분이 이제 성령의 원천이 되신 셈이다. 제2독서 <여러분은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해방되었습니다.> 1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주해 17절 신도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야 할 이유는 그들도 심판하실 분의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18절 18-19절의 “속량”은 본디 일정한 몸값을 치르고 노예나 포로를 풀려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이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기 위해 치르신 값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였다. 하느님이 그 값을 누구에게 치르셨는지 따질 필요는 없다. 19절의 “흠없고 피없는 어린양”은 원래 야훼께 바치는 희생제물이다. 이제 필자는 그리스도를 하느님이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제물로 본다. 필자는 출애 12.46(“뼈를 꺾어도 안된다”)을 생각하며 그리스도를 새 빠스카의 어린양으로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1고린 5.7; 요한 19.36 참조). 20절 하느님의 엄청난 계획(“창세 이전부터”)에 의해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이 이루어진 것은 모두 “여러분을 위해서”라고 말함으로써 “나그네”(신도)들의 품위를 높이는 동시에 긍정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21절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그분의 고난이 하느님께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3.18 참조). 그분의 고난은 부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복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주해 13절 두 사람은 열두 제자단에 속하지 않으나 예수께 동조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엠마오 마을에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 날”은 현재의 문맥상 빈 무덤을 발견하고 확인한 일요일,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에 만찬례를 지냈기 때문에 엠마오 발현 날짜를 일요일로 잡았을 것이다. 한 스타디온은 약 185미터, 파피루스 75호. 바티칸, 알엘산드리아. 베자 사본에서는 “육십 스타디온”이라 하는데, 환산하면 약 11킬로미터, 그러나 시나이 사본에서는 “백육십 스타디온”이라 하는데, 환산하면 약 29.5킬로미터, “엠마오”가 어딘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다. 여러 후보지가 있다. 그냥 나열만 하면 예루살렘에서 6.5키로미터 떨어진 암마우스 일명 쿨론예. 12킬로미터 떨어진 엘 꾸베이베, 13킬로미터 떨어진 아부 고셔, 32,5킬로미터 떨어진 암와스 일명 니코폴리스. 18절 요한 19.25에 의하면 “글로파의(아내?) 마리아”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지켜보았는데, 이 “글로파”와 여기 18절의 “글레오파”가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21절 루카복음에는 “속량” 명사가 1,68에 한 번, “속량하다”동사가 24.21에 한 번 나온다. 24절 12절에서는 베드로 홀로 무덤에 가서 그것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 20,3-10에서는 베드로와 애제자가 함께 가서 확인했다고 한다. 27절 유다인들은 구약성서 전체를 가리켜 “율법과 예언자들”,“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또는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들과 시편들”이라고 일컬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구약성서를 이해했다. 그리스도야말로 구약성서의 목표요 핵심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신약성서 필자들은 한결같이 예언과 성취의 도식을 사용했다. 30절 이스라엘에서는 식사 때 가장이 30절과 같은 행동을 한다. 예수께서도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최후만찬때 그렇게 하셨다.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이 만찬례를 거행할 때도 역시 그렇게 했다. 30-31절은 분명히 교회의 만찬례를 암시한다. 34절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 우선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이 신조(1고린 15,3-7)에도 들어 있다. 베드로는 제자 가운데 맨 먼저 부활하신 예수를 뵌 다음 열한 제자와 동료들을 집결시키고 그들의 믿음을 굳세게 했다(23.32).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염소(goat)하면 맨먼저 유령이 떠오릅니다. 아마도 염소를 번제물이나 제단에 바칠 때 등등의 것 때문에 염소에게는 영이 있다라고 여겨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영어로 염소는 goat(고우트)이고 유령이나 영을 말하는 염소는 ghost(고우스트)입니다. 어찌 발음이 비슷하지 않나요? 또한 소금이라고도 부르는 염소의 기호는 cl입니다. 미사때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염소라는 것들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새로이 만들어진 양식에 따라 미사때에 “또한 사제와 함께”가 아니라 “사제의 영과 함께”라는 말이 들어가기 때문에 “영”의 말을 다시금 새겨봅니다. 그리고 염소(cl)는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르기도 하였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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